화장실 변기에 붉은 혈뇨가 차올랐다. 중학생 김민준 군(가명, 당시 16세)은 놀란 기색 없이 변기 물을 내렸다.

‘오랜만에 혈뇨를 봤네…’

돌이켜보니,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에 잠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 탓이 컸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김 군은 엄마를 덤덤하게 불렀다.

“엄마, 저 혈뇨 나왔어요. 잠을 못 자서 그런가봐요.”

엄마 김혜주(가명) 씨는 마음과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신장에 무리가 가지 않게 음식의 나트륨을 조절하거나, 아이가 피곤하지 않도록 편히 쉬게 하는 정도다. 잠이 부족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오는 김민준 군. 간혹 보는 혈뇨가 그 증상이다.

민준은 왼쪽 신장 없이 태어났다. 나머지 오른쪽 신장도 ‘IgA신증‘을 앓고 있다. 이 병은 단백뇨와 혈뇨가 발생하는 염증성 신장 질환이다. 혈액투석이나 신장이식이 필요한 말기 신부전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은 질환으로 알려졌다. 현재 김 군의 오른쪽 신장은 10%만 제 기능을 하고 있다.

김민준(가명) 군이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등지고 서있다. ⓒ주용성

엄마 김 씨는 덤덤하게 병과 싸우는 아이 모습이 더 마음 쓰인다.

“민준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신장 약을 먹었어요. 아기 때도 혼자 알아서 먹을 정도로 약을 정말 잘 먹었어요. 아프다고 어리광 피울 법한데도 아이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니까, 한편으로는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김 씨는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민준의 곁을 지켜왔다. 민준은 선천적으로 방광요관역류증도 앓았다. 신생아 때부터 생식기에 식염수를 넣고 소변 역류 여부를 판단하는 검사를 받았다. 돌 무렵 받은 수술로 소변 역류 증상은 극복했지만, 3년 동안 매일 요관역류 약을 먹어야 했다.

네 살 때는 선천성 지방종 제거 수술도 받았다. 지방종이 피부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어 수술이 필요했다. 사라진 종양 자리에는 아픔이 남았다. 민준의 정수리에 흉터가 생겼다.

민준이가 유치원을 다녀온 날이었다. 아이 정수리에 검정색 볼펜 자국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엄마는 직감했다.

‘다른 아이들이 민준의 수술 흉터에 장난을 쳤구나.’

아이의 상처를 건드린 볼펜 자국이 김 씨의 마음에도 박혔다.

“민준이는 선천적으로 많이 아팠어서, 주변에서 늘 ‘아픈 애‘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민준이가 저한테 ‘엄마 나는 왜 아파?’ 이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는 거죠. 애가 또 상처받을까봐 유치원 선생님한테도 아이 수술 이력을 설명하고 부탁했는데, 이런 일이 생겼더라고요.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어요.”

엄마 김혜주(기명)씨와 아들 김민준(가명, 18세) 군. 이들이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반도체 공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주용성

수년간 아이의 아픔을 돌본 김 씨는 2020년경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전 직장에서 직업병을 앓는 직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여기에는 선천적 자녀 질환도 포함됐다.

김혜주 씨는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다. 그는 1995년 만 17세에 삼성 기흥공장에 입사해 2015년 명예퇴직했다. 근속 기간만 약 20년이었다. 김 씨는 마스크를 통해 반도체에 전자 회로를 그리고, 회로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포토 및 식각 공정‘에 배치됐다. 마스크는 설계된 전자회로를 그려놓은 유리판을 말한다.

‘포토 및 식각 공정‘은 반도체 공정 중에도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하는 공정으로 꼽힌다.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이 2012년 발간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 따르면, 이 공정에서 다루는 벤젠, 불소, 크실렌,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 화학물질이 태아의 선천성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

김 씨는 마스크 여러 개가 담긴 통을 설비에 넣고 빼는 일을 주로 했다. 설비 가동을 끝낸 마스크를 뺄 때마다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임신 중 고온 환경은 태아의 선천성 질환을 유발한다고 알려졌다. 학계에 보고된 여러 사례 중엔 민준이와 같은 콩팥무발생증도 있다.

김 씨는 이 일을 임신 8개월까지 계속했다. 김 씨는 올해 5월 20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엄마의 직업병으로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였다.

엄마 김혜주(가명) 씨가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바라보고 있다. ⓒ주용성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불투명하다. 만일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는다해도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질 가능성이 낮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은 엄마의 업무상 요인으로 인해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의 싸움은 법 개정으로 향했다. 이미 21대 국회에서 태아 산재 관련 개정안이 총 5개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장철민, 송옥주, 박주민, 국민의힘 소속 이영, 정의당 소속 강은미 의원이 태아 산재 관련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발의된 개정안 모두 법안의 취지와 필요성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다. ‘엄마와 한 몸인 태아‘가 엄마의 직업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선천적으로 건강 손상을 입었다면 산재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다만, 법안 별로 보상을 받는 주체가 다르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안은 보험급여 주체를 ‘건강손상을 입은 자녀 본인‘으로 명시했다. 먼저 올해 6월에 발의된 송옥주 의원안을 살펴보자.

 ‘출산한 자녀는 제5조 제2호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할 때 그 모(母)가 속한 사업의 근로자로 본다.’

–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송옥주의원 대표발의) 제91조의12

‘출산한 자녀를 엄마가 속한 사업의 근로자로 본다는 표현‘은 태아를 독립된 수급권자로서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런 조건은 세부 보험급여 해석에도 적용된다.

제40조(요양급여) ① 요양급여는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제57조(장해급여) ① 장해급여는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려 치유된 후 신체 등에 장해가 있는 경우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즉, 엄마의 작업 환경에 의해 건강 손상을 입은 자녀도 근로자로서 적절한 보험 급여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강은미 의원안도 “급여 조항에서의 ‘근로자‘는 ‘선천성 질환아’로 본다“는 표현으로 자녀의 수급권을 보장한다.

시민단체 반올림 활동가들이 2021년 6월 21일 국회 앞에 모여 태아 산재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시민단체 반올림

두 발의안과 달리 박주민-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 이영 국민의힘 의원안에서는 자녀가 아닌 근로자인 엄마가 보험급여의 수급권을 갖는다.

이럴 경우 보상 체계에 구멍이 생길 위험이 있다. 보험급여 수급권자와 청구권자가 같지 않으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해당 법안대로 산재 급여를 태아가 아닌 여성노동자에게 지급한다고 가정해보자. 수급 주체인 엄마가 사망하면 수급권은 아예 상실된다. 또 이혼 등으로 자녀를 돌보지 않을 때에도 노동자에게 산재급여가 지급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우려 탓에 독일은 이미 1977년부터 산재법상 수급 주체를 태아로 인정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건강손상이 있는 태아가 법적 산재보험급여를 받지 못한다면, 기본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1977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태아로서 임신 중인 어머니의 산업재해를 통해 건강손상된 자는 피보험자와 동등하다. 제551조의 응용에 있어서 어머니는 의료보험에서 의미하는 질병상태도 그의 소득활동능력 감소도 필요하지 않다.”
– 제국보험법 제555a조 신설 (1977년 11월)

반면, 5개 개정안에서 보험급여의 수급 주체조차 통일되지 않는 한국에선 태아 산재 관련 개정안 통과는 아직 먼 일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산재법 개정안을 최근 심사하기로 했지만, 잠정 보류됐다.

고등학생이 된 민준은 지금도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 외래 진료를 간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으로 가는 주기가 떄로는 2주에 한 번으로 짧아지기도 한다. 그 주기는 민준의 몸 상태에 달려있다.

아들 김민준(가명) 군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모습. ⓒ셜록

민준은 8월 4일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편도선염 때문에 신장 질환이 악화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 가능성을 낮추고자, 고민 끝에 수술을 결정했다. 현재 민준 곁을 아빠가 지키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병원에 상주할 수 있는 보호자는 1명밖에 안된다고 하네요. 민준이가 병원에 입원하는 모습도 못 보고, 저는 출근했어요.”

엄마 김 씨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기자에게 말했다. 막 걷기 시작할 때 방광요관역류 수술, 네 살 무렵의 선천성 지방종 제거 수술, 초등학생 때 신장 조직검사를 위한 개복 수술까지. 나이 열여덟 김 군이 세 번의 수술을 혼자서 이겨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로지 민준과 그 가족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국가가 아픈 아이를 산재보험으로 책임지지 않고,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 넘긴 꼴이다. 엄마 김 씨는 수년간 겪은 고통을 이번에도 또 참으며, 기약 없는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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