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항소를) 안 해서 빨리 (소송을) 종결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이가 많이 드셔서 조금이라도 빨리 (배상금) 받고 편하게 사시라고….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의 아들 김윤성 인터뷰 2023. 2. 15.)

간절했던 그의 바람은 끝내 꺾이고 만다. 지난 2일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납치 사건 이후 67년.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한 세월은 또 기약 없이 늘어나게 됐다.

황해도 용연군 바닷가 마을에 살던 북한 중학생 김주삼(86, 남)은 1956년 북파공작원 3명에게 납치돼 서울 구로구 공군 첩보대에 억류됐다. 한국군과 미군은 군사정보를 빼내려고 1년간 번갈아가며 김주삼을 신문했다. 하지만 중학생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없었다.

이후 부대 안에서 보수도 없이 잡일을 하던 그는 4년 뒤 부대 밖으로 쫓겨난다.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혈혈단신으로 남한 사회에 떨어진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감시 속에서 일생을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관련기사 : <남한이 납치한 북한 소년… 대한민국은 그를 지워버렸다>)

“(북한에) 가서 내 동생들 만나보고 싶은 건 솔직히 사실이지. 근데 그건 될 생각도 안 하고. 만나게 해준다고 해도 만날 수가 없는 거야 지금은.”(김주삼 인터뷰 2023. 1. 31.)

지난 1월 31일 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김주삼 씨를 인터뷰했다 ⓒ셜록

10대 중학생이었던 김주삼은 80대 백발 노인이 돼서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2020년 시작한 소송은 지난달 14일에야 1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한민국이 김주삼에게 ‘1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2020가합509022). 소송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납치 사건 이후 67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됐다.

소송의 쟁점은 ▲납치를 자행한 북파공작원의 소속과 ▲청구권 소멸시효의 완성이었다.

김주삼을 납치한 공작원의 소속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배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과거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보상지원단은 김주삼을 납치한 북파공작원 A가 당시 공군 제25첩보대 소속이 아닌 미 제6006부대 소속이었다고 판단한 바 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미 제6006부대는 (…) 대한민국 공군 장병과 함께 첩보활동을 전개한 부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점”과 “(A가 국방부) 조사 과정에서 ‘원고(김주삼) 납치 당시 자신이 소속된 부대는 공군 첩보대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A는) 당시 사실상 대한민국 공군으로부터 지휘와 훈련을 받으면서 특수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해 “피고(대한민국)가 원고(김주삼)에 대한 납치행위를 주도적으로 저질렀거나 최소한 그 납치 과정에 피고가 관여 내지 가담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문 일부

청구권 소멸시효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김주삼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민법 제766조의 소멸시효기간 도과로 소멸하였다”고 항변했다. 김주삼이 남한으로 납치돼온 것은 인정하지만, 이미 67년이나 지나 민사소송을 제기할 시간이 지났다는 주장이다.

이에 재판부는 지난해 국가 조사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김주삼 납치 및 억류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점을 언급하며, “이에 불구하고 국가가 피해자 등에 대하여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봤다.

“원고(김주삼)의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행복추구권 등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넉넉히 인정되고, 원고가 이로 인하여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임이 명백하므로, 피고(대한민국)는 원고에게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의 정신적 손해에 대하여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따른 배상책임을 부담한다.”(1심 판결문 중)

67년간 계속된 김주삼의 겨울. 하지만 그가 기다리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2일,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장을 제출했다.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도 3년이 걸렸다. 김주삼의 나이는 벌써 아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80대 노인들이 큰돈 들어온다고 펑펑 쓸 줄이나 알겠습니까. 그냥 춥고 더울 때 밖에서 몇 십 분씩 노란 버스(마을버스) 안 기다리고 택시 타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드시고 싶은 것도 참지 말고요.”(김주삼의 아들 김윤성 인터뷰 2023. 1. 31.)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주삼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pixabay

1심 판결을 환영하며 정부에 항소 포기를 요구한 건 김주삼의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달 15일 진보당 인권위는 논평을 통해 “67년 동안 강제납치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국가폭력에 의해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설움은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다”며, 정부가 항소를 포기하고 즉각 배상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김주삼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생전에 배상받을 수 있도록 항소로 시간 끌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도의”라고 말했다.

지난해 김주삼 납치 사건의 진실을 밝힌 진실화해위원회 역시 지난 24일 1심 판결을 환영하며 “피해자가 고령임을 감안하건대, 명예 회복과 소망하는 가족 상봉 기회 등 남은 권고 조치도 함께 조속히 이행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관련기사 : <진실화해위, ‘북한 민간인 납치’ 국가배상 판결 “환영”>)

소송을 대리한 이강혁 변호사도 6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다른 국가기구(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환영하고 동의하는 취지의 판결을 불복한 정부 입장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원고(김주삼)가 연세가 많기 때문에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데, 시간을 끄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김주삼의 납치됐다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법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이 변호사는 이 점을 고려해 남은 재판들은 1심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다만 북한 민간인 납치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다투는 것은 이 사건이 ‘최초’이기 때문에, “재판부에서 전례를 남기는 것에 부담을 느껴 시간을 지체시킬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이에 이 변호사는 “재판부가 국가재정 사정이나 정치적 사정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법적인 문제에 집중해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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