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제자 광훈(가명)이가 취업 현장에서 손가락 네 개를 잃은 지 3년째 되던 해, 나는 3학년 담임을 맡았다.(관련기사 : <학교도 공장도 지켜주지 못한 열여덟 광훈이의 ‘네 손가락’>)

광훈이 사건이 벌어졌을 땐 기간제 교사로서 정담임의 빈자리를 메우는 임시였지만, 이번엔 진짜 중책이 떨어졌다. 공업고등학교에서 맡은 내 생애 첫 고3 담임. 새 학기 첫 날, 나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다.

“야들아! 우리 중 대부분은 취업을 나가게 될 거다. 근데 샘하고 하나만 약속하재이. 거기가 어디든 너희가 취업 간 곳에 샘이 꼭 갈 테니까, 너희는 그곳이 안전한 곳인지 꼭 말해야 된대이.”

아이들은 이상하리 만큼 비장한 담임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한 학생이 물었다.

“샘, 회사 오면 맛있는 거 사주나요?”
“당연하지! 맛있는 거 사줄게.”

아이들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먹는 것부터 말했다. 이 아이들을 과연 공장으로 보낼 수 있을지, 내 마음은 울적해졌다. 방법은 교육뿐이었다.

조례, 종례, 자율활동 시간 등 짬이 날 때마다 열여덟 살 아이들에게 노동 인권, 산업안전, 직장 예절 등을 가르쳤다. 내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이들의 하품 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샘, 우리도 다 알아요. 그냥 이상한 일 있으면 샘한테 전화할게요. 그만 좀 해요.“

이 아이들을 과연 공장으로 보낼 수 있을까. 방법은 교육뿐이었다. 자료사진. ⓒ셜록

내 걱정과 달리 학교 탈출 일환으로 취업을 애타게 기다리는 학생도 있었다. 마침내 취업 시즌이 다가왔다. 나는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늘을 시작으로 우리 반 교실에 빈 의자는 늘어나고, 아이들 대부분은 산업 현장으로 투입된다. 

“자, 오늘 우현이(가명)가 드디어 취업을 나간다. 책상 밀고 두 줄로 서라. 우현이가 지나가면 친한 사람은 안아주고, 덜 친하면 악수. 실시!”

우리 반에서는 학생 생일이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포옹 행사를 했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장난기와 웃음이 가득했다.

“우현아, 월급 타면 맛있는 거 사라잉.”
“우현아, 공장 가서도 지각하면 안 돼.”
“3개월은 버텨야 된다잉, 졸업식날 보자.”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 인사를 했다. 어쩔 줄 몰라 쭈뼛쭈뼛 서 있는 우현이를 나는 세게 한번 안아줬다. 무슨 말을 하든, 내 목소리가 너무 떨릴까봐 나는 말없이 우현이 등만 두드려줬다.

우현이가 취업한 회사는 칠곡에 있었다. 동료 교사가 취업 승낙서를 받아 온 곳이다. 당시 학교에서는 ‘1교사 3회사 시스템’을 운영했다. 교사 1인당 취업처 3개 이상을 발굴하는 사업이었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회사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100명 넘는 교사가 회사 3개씩만 발굴해도 300개가 넘는 취업처가 확보되니, 학교에겐 취업률 높이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나는 수업에 여유가 있는 날이나 방학 때 회사를 구하러 다녔다. 평생 책만 보며 학생 가르치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1년에 두 달은 영업사원처럼 지역의 공단 거리를 배회했다. 

특별한 인맥이나 연줄이 없었기에 공단을 돌아다니다가 공장이 깔끔하고 크다 싶으면 일단 밀고 들어가 취업 담당자를 만났다. 종일 회사 수십 곳을 찾아다니며 “우리 공고생 좀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사정했다. 문전박대만 당하고 ‘취업 승낙서’ 한 장 못 받은 날도 많다.

‘국어 교사인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이런 일 하려고 교사가 됐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버텨야 했다. 우리 학교에는 하루라도 빨리 취업해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공고 교사는 영업사원으로 뛰어야 했다. 영업 실적에 따라 학생의 삶이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취업해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공고 교사는 영업사원으로 뛰어야 했다 ⓒpixabay

내 제자의 첫 취업, 나는 우현이를 위해 아버지에게 차를 빌렸다. 페인트공인 아버지가 현장에 갈 때 이용하는 승합차였는데, 차가 없던 나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현이를 공장까지 바래다주고 싶었다.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공장에 도착하니, 주위에 그 흔한 마트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거리에는 이주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이 많았다.

우현이가 일할 공장 내부를 살펴봤다. 낡은 기계와 곳곳에 묻은 기름때, 한쪽에 가득 쌓인 ‘치킨 박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 시끄러운 공장보다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웠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지금 당장 우현이를 데리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내 마음과 달리 우현이는 환하게 웃으며 공장을 둘러봤다. 공장 책임자라는 ‘부장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현이를 훑어봤다.

“여기서 일할 수 있겠나? 어떡하다가 여기까지 왔노?”

3년간의 학교 교육을 마무리하고,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어야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회사를 둘러볼수록 한숨만 늘었다. 나는 부장님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부장님, 우리 우현이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하지만, 성실하게 열심히 일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꼭 연락주세요.”

부장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시소. 애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시키겠습니까? 여기 계신 어르신들과 치킨 박스 좀 만들고 하면 됩니더. 육십 넘은 노인들도 다 하는 일이니 잘 할 겁니대이.”

부장님의 위로(?)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평정심이 무너졌다. 3미터 넘게 쌓인 치킨 박스를 종일 접고, “육십 넘은 노인들도 다 하는” 일을 시키려고 학교는 3년간 그 노력을 했던 것일까. 허망하고 허탈했다. 현장에 와서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던 우현이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기 보이는 백인 아저씨랑 제가 같은 방을 써야 된대요.”

해외여행을 못 가본 우현이는 덩치 큰 외국인이 익숙하지 않은지 “솔직히 무섭다”고 토로했다. 학교와 집을 떠나자마자 외국인과 한 방을 쓰는 게 많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나는 부장님께 사정을 설명했다. 우현이 숙소는 재배정 됐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우현이를 그냥 두고 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치듯 차에 올라탔다. 아버지의 승합차에서는 페인트와 꿉꿉한 냄새가 났다.

‘노가다’로 삶을 일군 아버지에게 ‘화이트 칼라’ 교사 아들은 자랑이었다. 그런 아들이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을,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노동 현장에 떨구고 있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계속 나를 자랑스러워할까? 지금이라도 우현이에게 학교로 돌아가자고 할까?

운전대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한동안 페인트 냄새 속에 앉아 있었다.

‘노가다’ 아버지의 승합차에서는 페인트 냄새가 났다. 나는 한동안 페인트 냄새 속에 앉아 있었다. ⓒpixabay

우현이를 시작으로 현장으로 향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약 두 달간 나는 수 십 군데의 회사를 다녔다. 성서, 현풍, 구미, 왜관, 울산, 거제까지 여러 도시를 다니며 학생들을 취업시켰다.

공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에게 “조례시간에는 가급적 영상통화라도 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횟집에 취업한 아이는 칼로 오이 자르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영상으로 보여줬고, 어떤 아이는 회사에서 기계 돌리는 모습을 화상으로 송출했다.

아이들이 모두 취업을 나가면 공고 3학년 담임교사는 11월부터 순회지도를 하며 학생들의 근태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위험한 기계가 있는 건 아닌지, 노동법은 잘 지켜지는지 등 나름대로 꼼꼼하게 살폈다. 하지만 교사의 확인에는 한계가 많다. 결정적으로 공장에서의 일상은 어떤지 알기 어렵다.

어느 추운 겨울, 눈과 바람을 뚫고 왜관으로 제자 종철(가명)이를 만나러 갔다. 일이 많은지 종철이는 퇴근 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공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손과 발이 시렸다.

“샘~!”

종철이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달려왔다. 거친 피부에 작업복, 기름 묻은 장갑 낀 아이의 얼굴을 보니, 또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크게 웃으며 물었다.

“회사는 마음에 드나?”
“당연하죠. 샘 우리 회사 진짜 좋아요.”

나는 잠시 안도했다.

“오, 다행이네. 뭐가 그리 마음에 드노?”
“밥 겁나 맛있어요.”

안도감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밥 말고 좋은 건 없나?”
“컴퓨터가 있는데요. 개빨라요.”
“아, 그렇구나. 밥 먹으러 가자.”

약속대로 나는 종철이에게 따뜻한 저녁을 샀다. 공장 밥보다 겁나 맛있는 한 끼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종철이는 밥이 ‘겁나’ 맛있다며 해맑게 웃었다. 나는, 우리는, 이 아이의 웃음을 지켜줄 수 있을까.(AI로 만든 사진입니다) ⓒ셜록

몇 년간 3학년 담임을 하며 학생 대부분을 취업 시켰다. 현장으로 순회지도를 나가 마음 안 아팠던 적이 없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삶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공고에 온 아이들이 꿈꿔온 학창시절의 종착역이 치킨 박스 접는 일이란 사실이, 꿈과 희망을 가르치는 초중고 12년의 끝이 대개 비정규직이란 팩트가 허망하고 슬플 뿐이다.

공장에서 종일 치킨 박스를 접어도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고, 그런 노동도 존중받는 세상이 오면, 나는 학교에서 당당하게 꿈과 희망을 학생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은 멀어 보이고 여름은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다. 여름이 끝나면 공고 3학년 교실은 텅 비어간다. 아이들은 공장으로, 식당 주방으로, 배달 현장으로 흩어진다.

영남공고 지한구

 

글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그래픽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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