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 색출 시도와 친한파·반한파의 역설

문세광 신문을 계기로 1974 9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임명된 김기춘은 유신 독재 수호에 적극 나섰다. TK 색출 시도 그러한 활동 하나였다. 1973년부터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칼럼이 연재되는데, 익명의 필자가 TK생이었다.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칼럼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신 정권엔 눈엣가시였다. 청와대 경호실 쪽에서각하의 안위에 관한 문제라는 과잉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서 중앙정보부에서 TK 색출 작업에 나서는데, 김충식에 따르면 김기춘 국장이 이끄는 5(대공수사국) 일을 맡았다.

중앙정보부는 TK생을 색출하려 혈안이 됐지만, 결국 잡아내지 못했다. 연재는 1988년에 끝나는데, 이후 TK생이 <사상계> 주간 출신 지명관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대공수사국에서 거창하게 나선 것이 무색하게 칼럼도, 지명관도, 지명관의 칼럼 작성을 도운 다른 한국인들(주로 기독교 계통)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안에는 김기춘의 대공수사국이 관여했다는 이외에도 주의 깊게 살펴야 다른 문제가 얽혀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연재가 이어지고 TK생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도운 이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1970년대 일본에는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다. 이들은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해 일본의 전쟁 국가화를 지향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활동도 전개하게 된다.

유신 독재 시기 한국에서 이러한 일본인들은 주로 뭐라고 불렸을까? 어이없게도 반한파였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힘을 싣고 자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반한파가 있으면 친한파도 있기 마련. 유신 독재 시기에 친한파(또는 지한파) 불린 세력의 주축은 1945 일제가 패망하기 대륙 침략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세력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세력 역시 5·16쿠데타(1961) 직후부터 박정희 세력을 적극 지원했고, 유신 독재에도 힘을 실어줬다. 검은 유착의 연속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양쪽은 끈끈하게 엉겨 있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일그러진 한일 관계

이른바 친한파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인물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다. 어떤 나라도 공식 축하 사절을 보내지 않았던 유신 2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1978 12) 때에도 자체 사절단(일본 정부의 공식 사절단은 아니었다) 조직해 한국에 정도로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 정권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처음 만난 시기는 1961 11.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을 특별히 모셔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한편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만났다. 이들 앞에서 박정희가그들 (메이지유신)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는 등의 발언을 일본 측에서 놀라면서도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대통령을 그리며> 따르면 박정희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모두 일본의 괴뢰 국가 만주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일제 패망 행적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한 흔적을 찾을 없다는 것도 사람의 공통점이다. 강상중·현무암은기시도 박정희도 만주국 건국을 포함해서전전’(필자 : 1945 일제 패망 이전) 역사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보인다 지적했다.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를 거쳐 만주군 중위로 일본 패망을 맞았던 박정희가 쿠데타로 권력을 움켜쥔 나타나형님으로 모시겠소라고 했을 , 만주국을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유신 독재가 무너질 때까지 박정희 정권을 지원하면서 기시 노부스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오키 오사무의 <아베 삼대> 일본 전직 각료가 이렇게 회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기시 선생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박정희) 매우 귀여워했습니다. 그도 기시 선생을 의지했습니다.”

한국 쪽에서 보면 불편할 있는 회고이지만, 이런 얘기가 나오게 됐는가를 살피지 않으면 일그러진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다.

일그러진 역사는 훈장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2013 10 인재근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일본인 12에게 심각한 문제(A 전범 용의자로 체포, 생체 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 관련,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거나 일제의 침략 미화) 있었다.

그중 7명이 박정희 집권기에 훈장을 받았는데,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해 A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던 3명과 731부대 관련자 1명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양국 우호 증진에 기여한 점을 감안해서 훈장이 수여된 ”, “과거 정부(에서) 적법 절차( 따라) 결정된 이라며 서훈 취소를 요구하는 여론을 묵살했다.

2015 12 28 박근혜 정권과 아베 신조 정권은위안부합의라는 명목으로 야합했다. 그렇게 정권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대못을 박았다. 이러한 야합은 특히 박정희 집권기에 심각했던 검은 유착으로 일그러진 한일 관계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2016년 9월 7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 라오스 비엔티엔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대공수사국장 시절 대표작,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사건

TK 색출엔 실패했지만, 김기춘은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사건을 터트리며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사건은 1990 김기춘이 5·16민족상(안보 부문) 수상자로 선정될 주요공적 하나로 제시될 정도로 대공수사국장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5 11 22 신문 1 머리기사로대규모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적발이라는 중앙정보부 발표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북괴가 그들의 공작원을 유학생으로 가장 학원에 침투시킨 것을 적발해 일당 21명을 검거했다는 발표였다.

간첩단의 주축으로 주로 지목된 이들은 재일 교포 유학생들이었고, 이들과 가깝게 지낸 재학생들도 사건에 휘말렸다. 같은 신문 사회면에는 발표 일문일답내용이 크게 실렸는데, 이를 통해 기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사람이 바로 김기춘이다.

일문일답에서 수사 책임자 김기춘은 재일 단체가 배후에 있다며, 그것과 연결된 하나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분노해 김대중 구출을 주장한 단체를 거론했다. 또한이번 사건에는 여학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학생의 경우지하철이나 버스 정거장 등지에서 중견 장교에게 추파를 던져 접근, 소속 부대의 임무 군사 기밀을 빼내려 했다 주장했다.

 김기춘은 이번 사건이최근 수년간 대학가에서 벌어졌던 데모가 북괴 간첩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 케이스라며학원 소요의 배후에는 북괴 간첩이 있다 강변했다. 따라서현실 참여, 학원 자유, 민주 회복을 명분으로 하는 집단행동을 절대 삼가고 (중략) 총력 안보 태세 확립에 기여하라는 훈계성 경고, 이것이 김기춘의 핵심 메시지였다.

유신 독재 반대를 색깔론으로 매도하고유신 체제에 반대하면 북괴의 조종을 받는 자로 간주하겠다 으름장을 놓은 셈이다. 대학생만이 아니라 유신 반대 세력 전반, 나아가 사회 전체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을 시점에 터트린 것도 때문이었다.

유신 독재 유지 위해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렵 유신 독재가 직면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신 쿠데타(1972) 1 유신 독재 철폐 요구가 터져 나오자, 박정희 정권은 1974 긴급 조치를 연이어 발동하고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트렸다. 8·15 저격 사건까지 터지며 잦아드는 듯했던 유신 철폐 운동은 1974 가을부터 1975 봄까지 다시 확산됐다.

어려운 처지로 몰리던 유신 독재는 인도차이나 사태(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공산화) 적극 활용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인도차이나 사태 직후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하고, 뒤이어 4 전시 입법을 단행했다. 안보 불안감을 최대한 부추기며 유신 철폐 운동을 찍어 눌렀다.

유신 독재에 대해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정권에 필요한 것이 있었다. 간첩 사건을 비롯한 각종 공안 사건이었다. 정권이 필요할 때마다 간첩단 검거를 발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잡으면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조작 간첩을 제조하면 담당자의 실적이 된다는 점도 당연히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적발’이라는 중앙정보부 발표를 전한 동아일보 1975년 11월 22일 자 1면 머리기사.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긴급 조치 9 발동 반년 후에 터진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사건은 조작 간첩을 대거 공급하며 정권의 필요를 정확히 충족시켰다. 사건은 1975 11 22 그날의 발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졌다. 독재자에 대한 충성 경쟁을 중앙정보부와 벌이던 보안사도 끼어들었다. 11 22 발표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재일 교포를 체포해 수괴급으로 조작한 다음 주변 사람들을 엮어서 간첩단을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일본에선 차별, 조국에선 간첩 조작재일 교포의 비극

일본에서 유학 교포 학생들은 유신 독재 시기에도, 전두환·신군부 정권 때에도 조작 간첩으로 거듭 제조됐다. 간첩을 만들어내는 쪽에서 이들이 손쉬운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는 일본에서 대대로 극심한 차별을 당했다. 그러한 현실에서 조국에 대한 관심은 커지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재일 교포는 남한과 북한의 실상을 직접 느껴보고자 모두 방문하기도 했다.

그에 더해, 일본에서 교포 학생들은 한국에서 극우 반공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자란 일본의 분위기도 한국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자민당이 1955 이래 일당 지배를 하고 있었지만, 사회당이 1야당이었고 공산당도 합법이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간첩을 만들어내는 쪽에서 보면 이들을 간첩단으로 엮기가 수월했다. 피해자는 간첩으로 발표된 이들만이 아니었다. 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으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은 사람, 가혹 행위와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 했던 사람 등도 모두 피해자였다.

김기춘이 담당했던 사건은 아니지만, 다른 피해 유형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재일 한국인 3세로 연세대에 다닌 김병진은 1983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북한 공작원으로 날조된 보안사에 강제로 채용돼 다른 재일 한국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에 투입됐다. 보안사의 이러한 행태는 1951 거창 학살을 자행한 군부대가 학살 현장의 생존자를 끌고 다니며 잡일까지 하게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김병진의 <보안사>에는 간첩단 사건이 어떤 식으로 조작됐는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인 것이지.”

김병진이 기록한 어느 준위의 말이다.

피해자들에게 11·22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1975 11·22 사건(중앙정보부에서 11 22일에 사건을 터트렸기 때문에 보통 그렇게 불린다)으로 재일 교포 유학생 사회는 쑥대밭이 됐다. 사건에 휘말린 이들이 어떤 일을 겪어야 했는지 사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교토에 살던 여학생 김오자는 부산대로 유학을 왔다. 유신 독재가 강요한 살벌한 침묵을 견딜 없어 혼자 유인물을 써서 배포했다가 중앙정보부에 걸려들었다. 김오자 옆방에 붙잡혀 있던 다른 재일 교포 유학생 김동휘는 인간의 비명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1975 11 22 신문 1면에간첩김오자의 이른바 암약 내역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김오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됐다. 교토로 돌아간 김오자는 2011 피해자들 사이에서 재심 신청 이야기가 오갈 주저했다. 공범으로 몰렸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도 괜찮은 것인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사건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김오자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신대에 다니던 김명수·나도현·전병생은 재일 교포 유학생이 아니었지만 사건에 휘말렸다. 재일 교포 학생에게 말도 가르쳐주고 보살펴줘라라는 학장의 부탁을 받았던 김명수는 사건 발표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갔다. ‘네가 가깝게 지낸 유학생이 간첩이고 너도 그에게 포섭된 간첩이다. 한신대에서 일어난 유신 철폐 운동은 모두 간첩인 네가 조종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렇게 강요하며 고문했다.

유신 철폐 운동에 참여했던 나도현과 전병생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나도현에게 옆방에서 나는 전병생의 비명 소리도 듣게 했다. “소가 죽을 내는 우는 소리같았던 소리에 나도현은 미칠 같았다고 훗날 증언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김명수는 감형돼 4 3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나도현도 4 3개월, 전병생은 2년간 옥살이를 했다. 2011 사람은 재심을 청구했다. 2016 서울고등법원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즉각 상고했다. 2017 3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42 만이었다.

누명을 벗은 김명수 목사는 사건은현재 진행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건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작한 바로 김기춘 씨다. (중략) 적폐 청산 없이 결코 세상이 도래하지 않는다.”

함께 사건에 휘말렸던 재일 교포 유학생의 안타까운 사연도 전했다.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학생은폐인으로서 가정에서 두문불출하는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보안사에 연행된 사람들도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려대 대학원에 다니던 재일 교포 유학생 이철(1974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이철과는 동명이인) 결혼을 앞두고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약혼녀와 예비 장모를 데려와 눈앞에서 범하겠다 입에 담지 못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거물 간첩으로 조작된 이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철의 약혼녀도 간첩을 방조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3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감형 감옥에서 13년을 보낸 이철은 재심을 신청해 2015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강종헌은 고등학교까지 일본 학교를 다녀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유학을 결심했다. 계기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었다. 일본 신문의 작은 토막 기사로 소식을 접한 강종헌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그런 결심을 했을까. 같은 민족으로서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해 한국에 가야겠다 마음을 굳혔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역사를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학 입학을 위해 어학을 공부하던 시기에 서울대 병원 앞에 가난한 사람들이 피를 팔기 위해 줄을 모습을 보고, ‘의학을 공부해 어려운 사람을 돕자 마음먹고 의대로 진로를 바꿨다.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보안사에 끌려간 강종헌은 물고문, 전기 고문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거물 간첩으로 조작됐다. 이철과 마찬가지로 사형 선고를 받은 감형돼 감옥에서 13년을 보내고, 재심을 신청해 2015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재일 교포 유학생으로 11·22 사건에 휘말려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 사건 발생 40년 만인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오마이뉴스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문은 일상적으로 자행됐다. 김기춘이 제작에 관여한 유신헌법에서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벌할 없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도 그것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김기춘의 설득력 없는책임 회피성변명

11·22 사건 피해자들이 체포, 고문, 옥살이, 재심을 거치는 동안 김기춘은 장관, 국회의원을 거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기춘에게 사건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조작 간첩 제조 문제에 대한 김기춘의 반응 하나는기억나지 않는다”(영화 <자백>) 발뺌하는 이다. 이와 달리,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공격적으로 받아친 경우도 있다. 국회의원이던 2005 김기춘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대간첩 수사로 과거사 진상 규명 리스트에 오른 적이 없다”, “권력을 남용해 인권을 침해했다면 자리에 있을 없다 주장했다.

이렇게 받아친 발언들을 가지 차원에서 검토해보자. 첫째, 김기춘이 맡았던 사건에서 인권 침해가 없었나? 그렇지 않다. 11·22 사건만 해도 갖은 고문과 불법으로 얼룩졌다.

둘째, 고문으로 조작한 김기춘과는 무관한 일일까? 고문 문제에 책임이 있는 고문을 직접 자행한 사람만이 아니다. 고문을 허가하고 부추긴 윗선, 국가 권력의 책임 문제를 빼놓아서는 된다. 김기춘은 11·22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다. 사건에 대해 기자들에게 직접 설명했고, 사건에서 세운공로 상까지 받았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이 조작 간첩 제조 사건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명이나 납득할 있을까?

셋째, 2005년에대간첩 수사로 과거사 진상 규명 리스트에 오른 적이 없다 부분이 면죄부 역할을 있을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가지 차원에서 그렇다.

하나는 11·22 사건 피해자들이 재심을 신청한 시기가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음을 분명히 2010 이후라는 점이다. 이전에는 재심을 신청할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간 진행된 과거사 정리 작업이 가해자를 철저히 처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주요 요인은 가해 세력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다 것이다.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 작업이 가해자 처벌보다는 진상 규명, 피해자 명예 회복 쪽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그마저도 만만한 작업이 결코 아니었다. 극우 반공 세력은 과거사 정리 작업을 저지하거나 방해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과거사 위원회 출범을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출범을 막을 없을 때에는 어떻게든 권한을 줄여 진상 규명 작업을 누더기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2004 김기춘도 일원이었던 한나라당이 과거사 관련 법안을 비롯한 4 개혁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보인 행태에서도 점은 드러난다. 김대중 정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유족들이 무려 422 동안 위에서 철야 농성을 해야 했던 것도 그러한 세력의 방해, 반발과 떼어놓고 생각할 없다.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방식 하나가 돈과 관련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 기구를 예산 낭비의 주범인 것처럼 매도하거나, 피해자 유족들을 돈에 눈먼 사람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 그런 사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을 , “대간첩 수사로 과거사 진상 규명 리스트에 오른 적이 없다 부분이 김기춘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있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덧붙이면, 과거사 정리 작업에 대한 저지와 방해, 도덕성 흠집 내기는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작업에 대한 극우 반공 세력의 태도를 떠올리게 만든다. 방식도, 논리도, 그걸 밀어붙인 세력도 닮은꼴이다. 부분에 해당하는 앞의 문단에서과거사 정리자리에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과거사 위원회(또는 진상 규명 기구)’ 자리에세월호 특조위, ‘피해자 유족들자리에세월호 유가족 넣고 한번 읽어보시라.

이게 그저 우연일 뿐일까?

물고문과 관련해 김기춘이 말하지 않은

2017 12 14 블랙리스트 사건 공판에서 물고문 얘기가 등장했다. 2014 2 7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논의된한국사 시험 이념 편향성 해소 방안때문이었다. 특검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에게지문에물고문 썼다는 이유로 이념 편향성이라는 예시를 들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의미하는 같은데 맞느냐 물었다. 김기춘은아는 없다 답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계속 보인 모습 그대로였다.

눈길을 끄는 그다음 발언이다. ‘수사 기관에서 물고문한 사례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비판해야 하는 인권 침해 사례라고 특검이 지적하자 김기춘은 이렇게 답했다.

공감한다.”

당연한 답변이다. 그런데 여기에 김기춘의 진심이 담겼을까? 진심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담당했던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진작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어야 하는 아닐까? 백번 양보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전에는 권세를 누리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박근혜와 함께 나란히 죄수복을 입은 후에라도 그렇게 했어야 하는 아닐까?

현재 김기춘은 수감돼 있다. 42 11·22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김기춘은 42 피해자들과 달리 고문과 폭력에 시달릴 걱정을 필요는 없는 처지다. 그런 김기춘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영욕의 지난 세월이 매일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귀퉁이에라도 11·22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죄할 생각이 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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