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형 검사로 5 피해자

1988 12 5 <경향신문> 신임 검찰총장 김기춘을 소개하는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기사에는탁월한 능력과 정책 감각을 겸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학구파” “깨끗한 용모가 차가운 인상을 주지만 속마음은 부드럽다는   듣기 좋은 얘기와 함께 이런 문장이 담겼다.

“5 8 동안피해자 때만 기다려왔다

김기춘은 5공 시절에도 고위 공무원으로 일했다. 6공화국 초기, 노태우 정부 때는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사진은 2014년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 출석한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의 김기춘이다. ©오마이뉴스

조작 간첩을 제조한 1975 11·22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다는 내용은 없다. 이때는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음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기 전이니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그렇다 쳐도,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한 것조차 빠뜨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같은 <동아일보> 유신 헌법 제작 관여 사실과 11·22사건을 언급하지 않고보안사 미움 꼿꼿한 검사라고 김기춘을 소개했다. 김기춘이유신 헌법 제정에 깊이 관여“(한겨레, 1988 12 6 )했다고 지적한 신문이 없는 아니었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전두환이 청와대를 떠난 김기춘은 “5 피해자” “꼿꼿한 검사 대중에게 제시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에 나온 기사 가운데 전두환·신군부 집권기를 김기춘의암흑기 표현한 경우가 있는데, 역시 “5 피해자라는 규정과 이어지는 면이 있다.

김기춘은 정말 “5 8 동안피해자‘”였을까? “암흑기 표현해야 만큼 전두환·신군부 집권기는 김기춘에게 혹독한 시절이었을까?

중앙정보부 떠난 덕분에 10·26 후 보안사 칼날 피하다

1979 10·26사건 당시 김기춘은 청와대 법률비서관이었다. 김기춘은 그해 2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덕분에 10·26 곤욕스러운 일을 피하게 된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다음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접수됐다. 대통령을 죽인 기관으로 낙인찍힌 중앙정보부의 고위 간부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과 헌병대로 끌려갔다. 보안사 요원들은 김재규와 공모했는지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호되게 다뤘다. 그간 중앙정보부에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했다. 중앙정보부 간부들은 경찰 조사도 받아야 했다.

10·26 때까지 대공수사국장을 계속 맡고 있었다면 김기춘도 보안사에 끌려갔을 것이다. 1977 전방 대대장 월북 사건 보안사를 몰아친 것을 감안하면, 김기춘은 중앙정보부의 다른 간부들보다 심하게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황호택은보안사 요원들이 중정을 접수했을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기춘) 국장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썼다.

좋게 이전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옮긴 덕분에 김기춘은 무사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총애하던 박정희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과거에 몰아쳤던 보안사 인사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김기춘은 여러모로 몸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기춘, 허화평에게 구구절절 충성 맹세 편지박철언 증언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1979) 군을 장악한 이어 1980 5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찬탈했다. 그러는 동안 김기춘은 청와대를 떠나 1980 8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임명됐다. 1981 4 24일에는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4·24 인사는검찰 최대 규모 인사 보도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인사를 앞두고 경력 10 이상의 검사 200 명은 일괄 사표를 제출해야 했고, 그중 26명은 사표를 돌려받지 못하고 해임됐다.

김기춘의 서울대 법대, 검찰 후배로 시기에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박철언에 따르면 4·24 인사 김기춘도 면직될 뻔했다. 박철언은 이때 청와대 보좌관 허화평이 김기춘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시키는 것을 넘어 아예 면직시켜 옷을 벗기려 했다고 자신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썼다. 보안사 출신인 허화평이 1970년대에 보안사를 몰아친 김기춘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

박철언이 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랜덤하우스중앙

허화평의 밖에 났다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허화평은 육사 동기이자 같은 보안사 출신인 허삼수와 함께(Two) 불린(<조선일보> 기자 출신 허문도를 포함해쓰리(Three) 불리기도 했다) 실세였다. 박철언은 허화평의 표적이 김기춘이 구명을 요청해, 김기춘에게 보좌관에게 전달해줄 테니 편지를 써달라 했다며 이렇게 기록했다.

“얼마 후, 김(기춘) 부장은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었다. 일종의 충성 맹세인 이 편지를 나는 허 보좌관에게 전달하고 허 보좌관을 설득하여 김 부장의 구명에 나섰다. 덕분에 김기춘 부장은 천신만고 끝에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비교적 한직인 법무부의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2014 <신동아> 인터뷰에서그런 편지를 일이 없습니다라며 이를 부인했다. 이어서 1980년부터 1985 초까지 맡았던 직책들을 열거하고 과정에서 소위 5 실세라고 하는 그분들로부터 도움 받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김기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철언이 편지 얘기를 조작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번째, 조작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는 김기춘에 대해 평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노태우 정권 김기춘이 김영삼 쪽과 밀착한 것에 앙심을 품고 조작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 보기도 어렵다.

회고록에서 초원복집 사건(1992) 다룬 부분에서도 이를 느낄 있다. 박철언은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들이 김영삼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실, 그리고 사건이 터진 도리어 김영삼을 편든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할 김기춘 개인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5 내가 구해준 김기춘이 어떻게 나와 대립한 김영삼 편에 서서 그럴 있느냐 얘기를 법도 한데 그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번째, 전두환·신군부는 권력을 잡은 그전에 악연을 맺은 이들에게 실제로 보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창성이다. 1973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박정희의 명으로 수경사령관 윤필용을 조사하던 내부에 사조직 하나회가 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회를 강도 높게 조사했다. 위기에 처한 하나회를 구해준 박정희였다. 그전부터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구성원들을 챙겼던 박정희는 하나회를 척결하기는커녕 보안사령관을 강창성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꿨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 강창성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호되게 당한 이어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것에 더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이른바순화 교육 차례나 받아야 했다. 치졸하고 지독한 보복이었다. 이러한 당시 분위기와 박철언의 증언은 부합한다.

번째, 4·24 인사의 성격도 박철언 증언에 설득력을 더한다. 4·24 인사는 12·12쿠데타 1년여 만인 1981 3 5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시킨 전두환·신군부가이번엔 검찰 전체를 입맛대로 바꿀 차례다라는 자세로 단행한 물갈이 인사라고 있다. 경력 10 이상의 검사 200 명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하게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이때 정권 실세들로서는 미뤄온검찰 눈엣가시 제거 추진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그런데 보안사와 악연을 맺은 김기춘은 오히려 승진했다. 모종의 조치가 있지 않았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결과다.

박철언이철희·장영자 사건 때에도 김기춘이 간청

김기춘은 한직으로 여겨지는 출입국관리국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검찰국장 임명과 관련해 박정희 정권 시기 김기춘의 경력이 논란이 됐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김기춘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전두환 대통령께서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니 개의치 말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라고 하시오’ 하시며 쾌히 재가해주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얼마 김기춘은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계기는 1982년에 일어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었다. 김기춘은 사건 처리와 무관할 없었다. 사건이 터진 대통령 주재로 연이어 열린 대책 회의 하나인 5 27 회의에도 참석했다. 정권 실세도, 사건 처리 방향을 좌지우지할 있는 위치도 아니었지만 검찰국장이라는 요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두환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박철언이 상세히 증언했다. 박철언에 따르면, 그해 6 9 김기춘이 박철언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이어서 박철언은검찰이 사건 수사 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라는 식으로 김기춘이 국회에서 얘기했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 보고한 듯하니 대통령의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김기춘이 자신에게간청했다 증언했다.

박철언은 사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기춘에게 연락이 오기 9 , 전두환이 건을 거론하며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해 김기춘 국장을 조사하라 자신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박철언이 보기에 사건을 두고 (중략) 대통령 핑계를 댔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로서는 (김기춘이) 도저히 빠져나올 없을 같았다.” 그럼에도또다시 총대를 멨다.”

박철언은 김기춘에 대해 좋게 얘기하며 전두환의 노여움을 달랬고, 결과 김기춘이 법무연수원 부장으로 좌천성 발령이 나는 것으로 정리되고 옷을 벗는 것만은 면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과 전두환 청와대

이철희·장영자 사건은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 사건으로 불렸다. 일신제강, 공영토건이 무너지는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검찰은 이철희·장영자가 기업에 현금을 빌려주고 대신 곱절로 받아낸 어음 총액이 7111 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철희·장영자가 15개월 동안 개인 소비 명목으로 49 원을 썼다고 밝혔다. 10 경력 교사의 월급이 25 안팎이던 때에 개인 소비 명목으로 매일 1089 정도를 썼다는 얘기.

사건 관계자들의 면면도 범상치 않았다. 이철희는 일제 일본 육군 나가노 정보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에는 육사(2, 박정희·김재규와 동기) 거쳐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서 활동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1973)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였고, 중앙정보부 차장이 된다. 유신 독재 말기에는 유정회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장영자는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의 처제다. 사기 행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장영자가 이철희의 중앙정보부 경력은 물론 대통령과 친인척 관계라는 점도 써먹은 것으로 얘기된다.

이규광의 경우 전두환이 처가살이를 오래 탓에 처가에 약하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경력을 살펴보면 문제를 수준으로 한정하기 어려웠다. 이규광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9년에 육군 헌병감을 지낸 예비역 장성이었다. 유신 독재 후반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위한 사설 정보대를 운영하며 김재규를 곤혹스럽게 만든 인물로 거론된다.

권력 기관이 취한 태도도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부터 여러 권력 기관에서는 이철희·장영자의 행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1980 7월에 장영자가 의문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첩보가 보안사에 들어갔다. 안기부에도, 청와대 민정 비서실에도 이철희·장영자의 수상한 활동에 대한 얘기가 들어갔다. 그럼에도 1982년에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보안사도, 안기부도, 청와대도 이들의 사기 행각을 막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자 많은 사람은배후에 청와대가 있는 아니냐 의심했다. 전두환은 불똥이 청와대로 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규광 구속을 막아장영자→이규광→이순자·전두환이라는 의혹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이규광 구속은 피할 없었다.

박철언에 따르면, 후에도 전두환은핵심은 이철희이고 장영자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수사 지침을 거듭 내렸다. 그런 상황에서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춘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라는 식으로 김기춘이 국회에서 얘기했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발끈했던 것이다.

사건은 권력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두환은 ’(허화평·허삼수) 사건 처리 방향을 놓고 자신과 다른 태도를 취하자, 1982 12 사람을 청와대에서 잘랐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권력이 더욱더 전두환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허리띠 졸라매고 모아온 국민들은 이철희·장영자 사건에 분노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신군부 정권과민주’‘정의당이 내세운 구호가 허울에 불과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국민들이 받아들인 당연한 일이었다.

박사 논문 쓰고 고검장 거쳐 법무연수원장으로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김기춘은 법무연수원 연구부장으로 밀려나 1985 초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기간 동안 시간이 났는지 박사 논문 작업을 진행해 1984 <형법 개정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안 처분 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 것을 주장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17 만이었다.

1985 3 김기춘은 대구지검장으로 임명됐다. 지검장이 되는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충식에 따르면, 어느 법무부 장관이 김기춘을 딱하게 여겨 지검장으로 보내려 하자 청와대 민정수석이 전화로장관, 신상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누가, 언제 그런 전화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김기춘에 대한 정권 일각의 견제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김기춘은 1986 5 대구고검장으로 승진했다. 1987 6월에는 법무연수원장으로 이동했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1987 육영재단(당시 이사장은 박근혜) 분규 법무연수원장 김기춘이 최태민 측을 만나기 위해 재단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는 의혹이 훗날 제기된다.

김기춘이 법무연수원장으로 있는 동안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정권 첫해인 1988 12 김기춘은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다시 권력의 중핵에 진입하게 된다.

“5 피해자김기춘과장된 신화에 가깝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김기춘은 정말 “5 8 동안피해자’”였을까? 전두환·신군부 집권기는 김기춘에게암흑기였을까? 10·26사건 이후 김기춘의 구체적인 행적을 바탕으로 검증해보면, 그러한 규정은 과장된 신화 가깝다.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일했던 김기춘. 그는 11·22사건을 직접 발표했다.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번째, “5 피해자 수밖에 없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신군부와 맞서 싸우다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고문 끝에 조작 간첩으로 제조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김기춘이 수사 책임자였던 1975 11·22사건 같은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은 전두환·신군부 집권기에도 숱하게 일어났다).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권리를 요구하다가 일터에서 쫓겨난 것에 더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밥줄을 찾기도 어려웠던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경우 이외에도 “5 피해자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례가 있다.

유신 독재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기여한 사람 중에도 전두환·신군부 집권기에 피해를 봤다고 인정할 만한 경우가 없는 아니다. 하나회를 조사했다가 1980년대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등의 보복을 당한 강창성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전두환·신군부 집권기에 고위 공무원으로 계속 살아간 김기춘은 강창성과 경우가 전혀 다르다. 공무원 김기춘이 공익을 위해 내부 고발을 했다가 피해를 봤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있지만, 그러했나?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 어느 하나라도 김기춘과 부합하는 것이 있나? 없다.

다른 여러 범주를 적용해도 김기춘에게 맞는 것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5 피해자 규정하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고, 부적절하기도 하다.

번째, 김기춘이 전두환·신군부, 그중에서도 특히 보안사 출신들의 미움을 사고 일정하게 견제를 당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유를 분명히 필요가 있다.

보안사 출신들이 김기춘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김기춘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던 1977 전방 대대장 월북 사건 보안사를 몰아친 데서 비롯됐다. 당시 김기춘과 중앙정보부가 보안사 쪽과 빚은 갈등의 본질은 정보 기관 영역 다툼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보안사와 맞서다 미움을 아니라는 역시 김기춘을 “5 피해자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에 더해, 김기춘에 대한 견제로 확인된 조치는 “5 8 동안 아니라 김기춘의 지검장 부임 , 전두환·신군부 집권 전반기에 주로 이뤄졌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번째, 미움을 이유가 어떻든 간에 김기춘이 직위와 관련해 피해를 사실 아니냐고 누군가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5 피해자” “암흑기 규정돼야 만큼 피해를 봤는지는 엄밀히 따져봐야 문제다.

우선 김기춘이 전두환·신군부 집권기에 고위 공무원으로 계속 살아갈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된다. 면직 위기도 있었고 한때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고위 공무원 자리를 유지할 있었다는 문제를 평가하는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그에 더해, 검사장으로 승진해 나중에 고검장에 올랐다는 사실을 빼놓아서는 된다.

동기, 선후배들과 비교했을 진급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다. 1987 5 김기춘의 고시 동기 최초로 이종남이 검찰총장이 됐다. 그때 김기춘의 직위는 검찰총장 바로 아래 단계인 고검장이었다. 전두환·신군부 집권기에 고검장을 하지 못했다면 노태우 정권 김기춘이 이종남의 후임 검찰총장이 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동기생에게 추월당했다는 것이 김기춘에게는 있을 없는 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박정희 집권기에 김기춘은 동기들 선두 주자로 나선 정도가 아니라, 기수 선배들까지 제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했을 김기춘이 느꼈을 있는 불편한 심정을 기준으로 직위와 관련해 상당한 피해를 봤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노태우 정권 출범에 이르는 시기 전체를 놓고 보면 어떨까? 박정희의 눈에 들면서 선배들까지 뒤로하고 혼자 멀리 치고 나갔던 김기춘이 동기들 선두에서 멀지 않은 2 그룹 정도로 조정됐다고 있다. 보안사와 맺은 악연이 그러한 조정 과정에서 작용했는데, 갈등의 본질은 정보 기관 영역 다툼이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김기춘을 “5 피해자“, 전두환·신군부 집권기를 김기춘의암흑기 규정하는 타당할까?

번째, 김기춘이 겪은 위기의 정도에 대해서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목에서 가정을 해보자. 1981 허화평 또는 1982 전두환이 김기춘을 검찰에서 쫓아냈다면 김기춘은 어떻게 됐을까? 좌절감은 맛봤겠지만, 변호사로 개업해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신군부가 표적으로 삼은 이들을 내쫓는 것에 더해 밥줄까지 끊은 사례가 없는 아니다. 노동 운동을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재취업을 막은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인 가운데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언론사에서 쫓아낸 것으로 모자라 경력을 살려 관련 계통에 취업하는 것도 막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신 독재 정권이 양심수, 정치범을 변론하는 앞장선 한승헌 변호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해 실업자로 만든 일도 있다.

그러나 전두환·신군부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극우 반공 세력의 일원인 김기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노동 운동가, 언론다운 언론을 지향한 사람들, 한승헌 변호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김기춘을 “5 피해자 단정하기 전에 이러한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지 생각해야 문제가 있다. 전두환·신군부 집권이 김기춘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작용한 것일까?

유신 독재가 무너진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자 당시 대세였다.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찬탈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갔다면, 독재의 오물을 씻어내는 청산 작업이 당연히 진행됐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사 정리 작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경우 유신 독재를 지키는 열과 성을 다한 김기춘도 조사 대상이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김기춘으로서는 결코 원치 않았을 상황이다. 전두환·신군부도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만은 막고 극우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계속되길 바랐다는 점에서는 전두환·신군부와 김기춘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있다. 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기춘에게 훈장 안긴 격인 “5 피해자규정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막을 내린 광주 학살과 천문학적인 비리로 얼룩진 전두환·신군부 정권을 청산해야 한다 여론이 고조됐다. 그러한 시기에 김기춘은 “5 피해자” “꼿꼿한 검사 대중에게 제시되며 검찰총장이 됐다. 그와 달리 유신 독재와 관련된 어두운 과거,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수사 책임자를 맡은 사실 등은 부각되지 않거나 묻혔다.

전두환·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찬탈했다. 이미지는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주)기획시대

그러한 상황에서 “5 피해자” “꼿꼿한 검사라는 포장이 김기춘에게 일종의 훈장 같은 기능을 하면서 김기춘의 본모습을 가리고 이미지를 세탁해주는 효과를 낳았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신임 검찰총장 김기춘은 그러한훈장등을 자산으로 삼아 전두환·신군부 정권 관계자들 상당수를 구속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김기춘이 이끄는 검찰이 지속적으로 겨냥한 진짜 표적은 따로 있었다. 6월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1987)으로 분출한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의 물결을 짓눌러 극우 반공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진정한 목표임을 김기춘의 검찰은 행동으로 입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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