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투쟁으로 수세에 몰린 정권의 구원 투수

1991 5 26 대통령 노태우는 김기춘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5개월 만에 김기춘은 검찰의 인사권, 예산 편성권을 쥐고 검찰 수사를 지휘할 있는 법무부 장관으로 올라섰다. 신임 법무부 장관 김기춘은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 역설했다. 그러나 김기춘 장관 재임 시기에 법은 또다시 흉기로 전락하고 만다.

무렵 노태우 정권은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해 4 26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에게 맞아 죽은 거리는 연일 반정부 시위대로 뒤덮였다. 그런 속에서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의 죽음을 맞고 학생, 노동자, 빈민 10 명이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연이어 분신하면서 ‘5 투쟁으로 불리는 반정부 흐름은 고조됐다. 5 25일에는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이 난무한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5 투쟁 배경에는 노태우 정권의 잘못된 정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안 정국 조성 3 합당(1990) 통해 이른바 보수 대연합을 형성한 노태우 정권은 공안 통치를 계속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3(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1986~1988) 막을 내린 것에 즈음해 노동자들에게 경제 문제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는 한편 노동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로 인한 불만이 쌓여가는 가운데 서민 생존권과 직결된 여러 경제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투기와 맞물려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급등했다. 전세금도 1988년부터 전국적으로 치솟으면서 견디다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남짓한 기간에 17명이나 자살할 정도였다.

국가 폭력 피해자 강기훈 씨. 그는 사건 조작 책임자와 오판 당사자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듣지 못했다. ⓒ오마이뉴스

그런 속에서 이뤄진 대규모 정경 유착은 서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수서·대치 택지 개발 과정에서 한보 그룹이 정관계, 언론계 등에 거액의 뇌물을 뿌리고 특혜를 받은 수서 비리 사건(1991) 대표적이다. 정권의 도덕성 문제로 번지자 검찰이 수사에 나서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와 국회의원 5, 청와대 비서관, 건설부 공무원 9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정경 유착의 전모를 밝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검찰은정치 자금 문제는 손대지 않겠다 태도를 취하는 해명성 수사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노태우 정권의 문제 많은 행태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다가 강경대 타살을 계기로 ‘5 투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가 김기춘을 법무부 장관에 앉힌 이유는 분명했다. 노태우로서는 민주화 운동 세력과 야당에 밀리고 있다고 느끼던 집권 전반기에 검찰총장 김기춘이 앞장서 조성한 공안 정국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을 잊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수세에 몰리자 김기춘을 불러들인 것이라고 수밖에 없다.

김기춘에게 부여된 임무는 정권 안보를 지키는 구원 투수로서 극우 반공 세력이 원하는 형태로 판을 새롭게 짜는 것이었다고 있다.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공개 등으로 박근혜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우병우가 맡게 되는 역할과 닮은꼴이다.

민주화 운동 세력을 패륜 집단으로 몰아가기

‘5 투쟁 대한 노태우 정권의 기본 대응 전략은 또다시 공안 정국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법무부 장관으로 구원 등판한 공안통 김기춘은 이를 지휘한 인물로 꼽힌다. 그런데 김기춘이 검찰총장이던 1989년과는 공안 정국 조성 방식과 초점이 다소 달랐다.

1989년에는 연이은 방북을 빌미로 극우 반공 세력이 이념 공세를 퍼부으며 민주화의 대세를 뒤집으려 했다면, 1991년의 경우 민주화 운동 세력 전체를 패륜 집단으로 몰아가는 초점을 맞췄다. 김기춘 장관 취임 전에 이미 시작된 극우 반공 세력의 이러한 전략은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이 확대·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물꼬를 사람은 김지하였다. 김지하는 1991 5 5 <조선일보> 실린 칼럼(‘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에서시체 선호증”, “자살 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등의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정권 비판 세력을 거세게 비난했다. 박정희 집권기에 반독재 운동을 했던 김지하의 칼럼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시체 선호증”, “자살 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 등의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정권 비판 세력을 거세게 비난한 김지하 칼럼(1991년 5월 5일 자 <조선일보>). ⓒ<조선일보> 화면 갈무리

서강대 총장 박홍이 김지하의 뒤를 이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목숨을 끊은 5 8, 박홍은 기자들을 모아놓고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주장했다. 발언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파장은 컸다.

박홍은 1994 7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등의 주장을 펴며 공안 정국 조성에 다시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밑도 끝도 없는 주장으로 마녀사냥을 부추긴다 비판을 자초했다. ( 세력의 주장, 지향 등을 조금이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주사파 사노맹이라는 설정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있기도 했다.)

어둠의 세력창조자 검찰의 야심작유서 대필 조작

어둠의 세력운운한 박홍 발언이 나온 (1991 5 8), 정구영 검찰총장은 분신자살 사건에 조직적인 배후 세력이 개입하고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박홍 발언과 검찰총장 지시는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 당정 회의에서 잇따른 분신과 투신자살의 배후 관계를 철저히 수사하기로 방침을 정한 하루 만에 나온 것이었다.

고위 당정 회의에서 정한 방침은어둠의 세력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어둠의 세력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 그건 정권 유지를 위해 조작 간첩을 오랫동안 제조해온 공안 당국의 손에 익은 일이었다.

열흘 (5 18), 서울지검 강력부 강신욱 부장 검사는유서의 필적이 (기설) 씨의 필적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며유서를 대신 써준 용의자를 1명으로 압축했다 밝혔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5 26, 검찰은 강기훈에 대해 자살 방조 혐의로 사전 구속 영장을 발부받았다. 김기춘 장관 취임 검찰은 유서 대필 조작에 속도를 내게 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미심쩍은 문서 감정 소견 이외에 증거라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어둠의 세력창조에 나선 검찰에 그런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6 3 총리 서리 정원식이 외국어대 학생들에게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는 등의 봉변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태우 정권은 관계 장관 대책 회의(김기춘도 참석했다) 열고, ‘반도덕적·계획적 패륜 행위 규정했다. 검경은 재야, 학생 운동권은 물론이고 노조 관계자들까지 표적으로 삼은 일제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수구 언론은 사건을 최대한 키우면서, 사건과 관련된 학생들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세력 전체를 패륜 집단으로 몰아갔다.

유서 대필 조작과 정원식의 봉변을 계기로 ‘5 투쟁 대한 참여와 호응은 급격히 감소했다. 분위기 반전을 바탕으로 여당인 민자당은 6 20 광역 의회 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유서 대필 조작 발판으로 검찰 공화국 굳히기 단계

여당 압승으로 유서 대필 조작은 탄력을 받았다. 7 9 김기춘은 국회에 출석해유서가 (기설)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유서 내용이 어색하다 강기훈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검찰이 강기훈을 구속 기소한 7 12, 김기춘은 국회에서 강기훈이 수사 과정에서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발언했다.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강기훈이 행사하고 있다는 취지의 김기춘 주장과 달리 무렵 검찰은 강기훈에게 재우기 등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하고 있었다. 검찰은 강기훈을 40시간 동안 계속 조사하기도 했고, 잠이 모자라 강기훈이 졸면 세워놓고 조사했다. 강기훈의 주변 사람들도 강압 수사를 당했다.

짜놓은 각본대로 강기훈이 움직이지 않자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하며 보복했다.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유서 대필은 반체제 운동 세력의 공산주의자적 행동이라고 강변하며 강기훈을 몰아세웠다. 부천경찰서 고문 사건(1986) 당시운동권이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삼고 있다 피해자를 오히려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검찰이 강기훈을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파렴치범으로 몰아간 것은 김기설을유서도 손으로 쓰는 사람으로 깎아내리는 행위이기도 했다. 대학을 나온 김기설은지식과 문장력이 부족 그런 유서를 없다고 검찰은 공소장 등에서 주장했다.

뚜렷한 물증도 없고 검찰 논리도 허술했지만, 사법부는 계속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유서 필적이 강기훈 필적과 동일하다 미심쩍은 감정(검찰이결정적 증거라며 제시한 이것이다)으로 검찰에 힘을 실어준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이 다른 사안에서 돈을 받고 허위 감정을 사실이 드러나 사건 2 선고를 앞두고 구속됐는데도, 법원은 검찰을 편들며 진실을 외면했다. 1992 7 대법원은 강기훈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징역 3, 자격 정지 1 6) 확정 판결을 내렸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노태우 정권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기춘은 다시 노태우 정권을 구해내는 역할을 하며, 2 전성시대의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검찰은 사건을 주도하며 정권 수호의 주력임을 과시했다. 김기춘 검찰총장 시기에 기반이 마련된검찰 공화국 사건을 거치며 굳히기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과정에서 세력은 법을 다시 흉기로 전락시켜 진실과 민주주의를 짓밟고, 강기훈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끔찍한 고통을 강요했다. 아울러 눈엣가시로 여기던 민주화 운동 세력 전체에 타격을 입히며 득의양양할 있었다.

1994 8 강기훈은 만기 출소했다. 어마어마한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 재벌 총수 등이 손쉽게 누리는 감형 혜택도 강기훈에겐 나라 얘기였다. 출소 후에도 마음 편한 삶은 허용되지 않았다. 각종 매체가 떠들썩하게 다룬 사건의 주역인 파렴치범으로 이미 낙인찍힌 상태였다.

출소 이후의 삶에 대해 강기훈은 2017 11 <시사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1991 계속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건의 장면 하나하나가 무한 반복되면서, 사는 것이 지옥 같았을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기훈은 진실을 밝히겠다는 뜻을 접지 않았다. 2007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 강기훈의 무죄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재심 권고 결정을 내렸다. 드디어 오명을 벗을 길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강기훈에게 그것은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검찰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재심 자체를 막으려 했고, 사법부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2008 강기훈은 재심을 신청했다. 2009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재항고했다.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거푸 상고한검찰스러운모습이었다. 대법원은 3년이나 시간을 후에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2012). 검찰은 재심 결심 공판에서사정을 모르는 국민은 검찰과 사법부가 합작해 억울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판결을 유지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심 신청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나는 데까지만 4 걸렸다. 사이에 강기훈은 암에 걸렸다. 2014 서울고등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지만, 검찰은 이번에도 불복했다. 2015 5, 대법원은 강기훈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사건 발생 24 만이었다. 사건에 휘말릴 20 청년이었던 강기훈을 50 중년으로 바꿀 만큼 길고도 잔혹한 시간이었다.

만약 강기훈이 중도에 포기했다면 상황은 어떠했을까? 가해 세력은 여전히 기세등등했을 것이고, 경우 유서 대필 조작 같은 끔찍한 국가 범죄가 많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없다. 그런 면에서도 한국인들은 강기훈에게 빚을 지고 있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 후 잘나간 검사들반성은 없다

잔혹한 시간을 견뎌야 했던 강기훈과 달리, 사건 수사에 직접 관여했거나 지휘 라인에 있던 검사들 그리고 김기춘은 대부분 잘나갔다. 대법관이나 국회의원이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들 다수가 박근혜 주위에 모여들었다.

지휘 라인 상층에는 법무부 장관 김기춘, 검찰총장 정구영, 서울지검장 전재기가 있었다. 김기춘은 사건 금배지를 3 달았고, 박근혜 정권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정구영은 이한동 한나라당 대표 법률 특보(1997) 거쳐 2012 대선 때에는 다른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를 공개 선언했다. 전재기는 사건 당시 강기훈을교활한 인물 규정하고검찰은 국가 최고 권력 집행 기관의 자격으로 이런악마 응징하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강조했다. 사건 대구고검장, 법무연수원장을 지냈다.

수사에 직접 관여한 사람은 서울지검 강력부장 강신욱, 주임 검사 신상규, 검사 윤석만·남기춘·곽상도 등이다. 강신욱은 청주·전주·대구·인천지검장과 서울고검장을 거쳐 김대중 정권 대법관이 됐다. 대법관 퇴임 후인 2007년에는 박근혜 캠프 법률 지원 특보단장을 맡았다.

신상규는 창원·광주·인천지검장과 광주고검장을 거쳐 변호사로 개업한 동덕여대 이사장에 선임됐다. 2013 대검찰청 사건평정위원회(무죄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검찰의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 재심이 진행되던 , 검찰이 바로 사건의 주임 검사를 사건평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14 서울고등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은 상고했다.

윤석만은 부장 검사를 지내고, 한나라당 대전시당 위원장을 거쳐 2011 박근혜 지원 조직인 대전희망포럼의 공동 대표를 맡았다. 남기춘은 울산지검장, 서울서부지검장을 지냈다. 변호사 개업 후인 2012년에는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클린검증제도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곽상도는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을 지내고, 변호사 개업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다. 정권 인수위원회를 거쳐 박근혜 정권의 번째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지만, 반년 만에 물러났다. 2016 총선에 이른바진박후보로 나와 금배지를 달았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 수사에 직접 관여했거나 지휘 라인에 있던 검찰 쪽의 주요 인사들. ⓒ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

이들 가운데 유서 대필 조작 사건에 대해 반성, 사과, 참회한 사람은 명도 없다. 유서 대필 조작이라는 국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에 상응하는 처분을 받은 사람도 없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끝난 것일까? 당연한 아니냐, 재심 무죄 판결이 이미 나지 않았느냐, 더욱이 2017 8 검찰총장 문무일이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손해 배상 소송이 진행되고 있지만 본질은 액수 문제다. 사건 자체는 이미 끝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논리대로 사건은 정말 끝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번째, 사건 수사에 직접 관여했거나 지휘 라인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반성, 사과, 참회하거나 국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분을 받은 사람은 명도 없다. 그런데도 끝났다고 말할 있을까?

번째, 사건 당시 관련됐던 사람들은 조금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현임 검찰총장의 사과로 부분을 대체한다는 자체가 성립할 없지만, 그와 별개로 문무일 총장의사과발언 검찰이 보인 모습은 사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기훈이 제기한 손해 배상 소송 항소심에 대한 반응에서 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강기훈 본인도 밝힌 것처럼 손해 배상 소송의 핵심은 액수 문제가 아니다. 사건을 조작한 검찰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 판결(2017 7) 항소한 것도, 1심에서 모든 책임을 국과수에 돌리고 수사 검사들에 대해서는소송 제기 시효가 지났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무일 총장 발언 나온 소송의 재판 준비 서면에서 정부는 국과수에 책임이 있을 검사들로서는 유죄로 만했다며 항소 기각을 주장했다. 서면을 제출한 정부법무공단이지만 검찰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검찰의사과 말뿐이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검찰의사과 강기훈 말대로 그렇게 했는지, 자기 행동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등을 얘기하고 용서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없다.

번째, 사건의 전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2015 재심 무죄 판결 안병욱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말한 대로, 밝혀진 것은진실의 일부. 위원장이 그렇게 말한 것은 틀에서 세력이 공모해 유서 대필 조작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 때문이다.

번째로 처음에 이것을 음모·모의했던 검찰과 당시의 수구 세력들, 그리고 번째로 이것을 뒤에서 응원해줬던 보수 언론, 그다음에 번째로 이런 명확한 허위 사건을 1, 2, 3 대법원까지 그대로 추인해줬던 사법부입니다.”

위원장은대법원 판결에서는 가운데 너무나 명확한 증거가 있는 유서만 가지고 판단을 이라며 “24 전의 이와 같은 엄청난 사기를 누가 했는가( 대해서), 그리고 거기에 동원됐던 사람들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 일일이 밝혀야한다고 지적했다. “24 동안 우리 사회가 저지른 파행을 이제라도 분골쇄신해서 바로잡는 노력을 했을 그것이 강기훈 씨의 희생, 피해에 대한 진정한 보상이 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그랬다. 검찰이 주범이라면 사법부와 수구 언론은 공범이었다. 사건 당시 사법부는유서가 대필됐다 감정한 국과수 간부가 다른 허위 감정으로 구속됐는데도 사람의 감정 결과를 받아들이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검찰 편에 섰다.

검찰 쪽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판결을 내린 판사들(1 부장 판사 노원욱, 2 부장 판사 임대화 배석 판사 부구욱·윤석종, 주심 대법관 박만호) 재심 무죄 판결 반성, 사과, 참회를 사람은 명도 없다.

수구 언론도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다. <한겨레> 소수를 제외하면, 사건 당시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검찰에 심하게 편향된 보도를 일삼으며 강기훈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진실 추구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중립적 보도나 무죄 추정 원칙 준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보인 모습도 검찰, 사법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서 대필 조작의 주범이 검찰이라면 수구 언론과 사법부는 공범이었다. 이미지는 노태우 정권 시기 언론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한겨레>(1992년 1월 10일 자) 기사. ⓒ<한겨레> 화면 갈무리

진실 규명 없으면 미래도 없다

언제까지 옛날 일에 매달려 있을 거냐. 적당히 덮고 미래로 나아가자’,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근래 일각에서적폐 청산과 개혁으로 인한 피로감 강조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논리다. 일본 극우가위안부문제를 비롯한 전쟁 범죄 추궁에 거세게 반발하며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 운운할 펴는 논리와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 같은 국가 범죄에 관여한 이들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승승장구한 현실은 출세를 지향하는 검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그런 범죄에 가담해도 아무런 문제가 된다는, 나아가 그렇게 해야만 크게 출세할 있다는 분명한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기춘의 후예들 검찰에서 계속 나온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점은 사법부, 언론도 다르지 않다.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제대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검찰·사법부·언론 개혁의 진전을 위해서도, 제대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이와 관련,최소한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나 소멸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강기훈의 호소를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또한 기술자로서 국가 범죄에 관여한 것이 확인될 경우 서훈은 물론 변호사 자격도 박탈하는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직자일 국가 범죄에 가담한 기술자가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서 법을 이용해 (경우에 따라 전관예우까지 받으면서) 돈벌이를 한다면, 그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일일까?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다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의 한 장면. ⓒ해밀

서훈 문제와 관련해 김기춘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1 재판부는 김기춘이 오랜 기간 공직자로 일하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것을 형량에 참작했다고 밝혔다. 1 형량(징역 3) 특검 구형량(징역 7) 절반에도 미쳤다.

김기춘이 무슨공적으로 훈장을 받았는지를 면밀히 살폈다면, 검찰 사법부 개혁이 철저히 이뤄져 전두환·노태우 등이 12·12쿠데타 광주 학살과 관련해 받은 훈장을 박탈한 것에 준하는 조치가 이뤄졌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건과 관련해 곳곳에서 나타난 파행을 분골쇄신해서 바로잡지 않으면, 힘센 권력 기관이 법을 흉기로 전락시켜 무고한 국민을 짓밟는 일은 언제든 재연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