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선을 사흘 앞둔 1992 12 15, 정주영의 국민당이 하나의 녹음테이프를 세상에 내놓았다. 테이프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까지 법무부 장관이던 김기춘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었다. 김영삼의 대선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한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자리씩 꿰찬(전직 장관인 김기춘의 경우는꿰찼던’) 사람들의 얘기 맞나 싶을 정도로 대화 수준은 시정잡배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초원복집 사건은 그렇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녹음테이프는 막판으로 치닫던 대선판을 요동치게 했다. 그러나 실체 규명 작업은 허무할 정도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부실한 수준을 넘어 심각하게 왜곡된 사후 처리 과정은 다른 문제를 낳았다.

14대 대선 승리 후 당선 인사를 하고 있는 김영삼. ⓒe영상역사관

[초원복집 그날 1]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그해 12 11 이른 아침 초원복집(부산 남구 대연3) 부산의 주요 기관장이 모여들었다.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 지역 기무 부대장, 우명수 부산 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불러 모은 사람은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은 전날(10) 검찰총장 정구영, 민자당 의원 권익현 등과 함께 부산에 내려왔다. 그리고 유세를 위해 자신보다 늦게 부산에 김영삼을 공항에 나가 맞이했다. 초원복집 모임 연락책은 정경식 지검장이었다. 주요 대화를 되짚어보자.

지금 부산은 돌아갑니까?”

김기춘이 좌중에 물었다. 김기춘은 전날팀들하고점심 먹고 유세장에 가봤고 부산에 오기 광주, 대전, 대구, 경북 등을 다녔다고 말했다. ‘팀들 관련, 김기춘은제가 관계하는 회원들이라는 얘기도 했다. 김기춘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부산에서 김영삼 지지율이) 70% 되니 되니…… . 서울 있으면 걱정이 태산이라. 믿을 곳이라고는 여기밖에 없다.”

이어서중립 내각 언급하며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라고 말했다. 김대균 기무부대장이 말을 받았다.

나는 (부재자) 투표해서 중립을 지키겠다. 이제 저는 마음대로 해도 돼요. 장관님하고는 다릅니다.”

김기춘이 검은 뱃속을 드러냈다.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고, 접대를 해달라. 야당에서는 (선거 운동에 대해) 상당히 강경하지만, 당신들이야 지역 발전을 위해서이니 하는 것이 좋고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 .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 .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이 끼어들었다.

이거 양해라뇨. 제가 떠듭니다.”

경찰이 관권 선거에 앞장서겠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초원복집 그날 2] “김대중·정주영? 영도다리 빠져 죽자”

김기춘은고향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돈이 생기나 밥이 생기나, 말은 맞다면서도 해봐서 모른다.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라고 말했다. 곧이어 영도다리 발언을 했다.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면 어떠냐 정주영이면 어떠냐 이러면 영도다리 빠져 죽자.”

김기춘은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을 거론하며 “(국민당이) 요번에 조선일보하고 붙었는데…… . 조선일보하고 붙은 것은 우리 쪽에서 보면 호재다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정주영) 대통령 되면…… 됩니다라고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이 거들었다.

서울에 앉아서 (선거 상황을) 이래 보고받고 하면 잠이 오는기라.”

김기춘은 정도로 걱정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잘못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 들어가야 판인데 그럼 여당 해야지 어떡합니까?”

지은 죄가 많다고 여겨서인지, 김기춘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인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혁명적 상황으로 규정했다.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녹음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한겨레> 기사(1992년 12월 16일 자). ⓒ<한겨레> 화면 갈무리

[초원복집 그날 3]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참석자들은 개략적인 계산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호남 사람이 많이 보면 17~18% 보는데…… .”라는 김기춘의 말을 김영환 시장이 받았다.

“(정주영이 부산에서) 15% 가져가면…… 끝난 것이고 그렇게 가져가면 (김영삼 득표율이) 60%대로 떨어지니까 (정주영 득표율을) 10% 미만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김기춘이지금 CY(정주영) 20% 가져간다면 YS 위험하다는 것이 중앙의 공론이라고 말하자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과 김영환 시장이 나섰다.

“10%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 ”
“(
김영삼이) 80% 이상 (득표)하려면 (정주영 득표율을) 5% 이하로 떨어뜨려야 …… .”

결론 격으로 김기춘이 말했다.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

참석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부산 교육의 수장이라는 우명수 교육감이 김기춘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지역감정이 일어나야 .”

다시 김기춘이 나섰다.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는 일을) 도지사가 하겠습니까, 검사장이 하겠습니까, 시장이 하겠습니까? 천상(필자 : 올바른 표현은천생’) 민간단체에서야 …… . 이번에 제대로 부산놈들 본때 보이면 …… .”

[초원복집 그날 4] <조선일보칭찬과쥐약론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이 말했다.

최근 현대 (그룹을) 수사하고 나서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 지금 현재 국민당으로서는 한풀 꺾였습니다. 기가 많이 죽었는데, 전에 그대로 나왔으면 큰일 뻔했어요.”

그리고 덧붙였다.

“<조선일보> 그걸 해주는데 …… .”

주요 화제는 언론으로 바뀌었다.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이 <부산일보>, <국제신문> 거론하며 지역 언론의단결문제를 꺼내자 김영환 시장이 말했다.

이놈들이 원체 삐딱하니까 …… .”

김기춘이 나섰다.

신문사 사장이랑, 한번 밥이나 먹이면서고향 발전을 위해 너희가 해달라 해보십시오.”

관리들이 하기 힘든 일이니 업계에서 나서라고 김기춘이 주문하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말을 돌렸다.

저희들 바람은 오히려 (김영삼이) 호남 쪽에 유세 가서 두들겨 맞고 오면 …… 대구, 경북도에이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없어.”

지난 (19)87 (대선 ) 우리 (노태우) 대통령 각하, 전주 가서 한번 두들겨 맞고 와서는 (경상도 사람들이) 돌았잖아요.”

김기춘은 이렇게 답한 다시 언론 얘기를 이어갔다.

광고주들 있잖아요. 경제인들 모아가지고 신문사 간부들 사주면서 은근히 한번 …… .”

김영환 시장은 평기자들이 문제라고 답했다.

김기춘은쥐약 주는 사람은 …… 상공인들과 업계에서 일단 광고주 아니오?”라며 언론에 대한 공작을 주문했다.

“(광주 지역 언론은) 자기 고장 대통령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이렇게 압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목해 다시 언론 공작을 주문했다.

편집국장, 사회부장, 정치부장 이런 놈들 …… () 주면서, 걷어 뭐할라요? 명세서 끊어주면서 …… .”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녹음테이프 공개 후 정관계 반응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92년 12월 16일 자).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언론 공작 주문이 계속되자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은언론 계통에는 제가 제일 강하게 얘기하는데라면서요즘은 밑의 기자 애들 때문에라고 답했다. 김영환 시장과 마찬가지로, 평기자들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김기춘은 다시 강하게 주문했다.

배짱이 있으면미다시‘(필자 : 표제) 뽑을 편집국이나 편집국 차장이 텐데, 데스크 보는 애들이 괜히 밑의 핑계 댄다고. ‘나는 하려 했는데 애들이 말을 듣고‘ …… . 그러나 .”

그러면서 <조선일보> 칭찬했다.

, <조선일보> 과격한 기자 없나. 있지만 전부 신문사 간부가 달라지니까 합니다. 나가는 논조 보세요.”

이날 <조선일보> 모범 사례 또는우리 으로 거론한 김기춘만이 아니다.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도 그랬다. 김기춘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김대균 기무부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 써주는 같죠.”

김영삼·김기춘 밀착에 주목한 야권의 공세

녹음테이프 공개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지역감정 조장, 관권 선거, 언론 공작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음모를 꾸몄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참석자 면면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했다. 참석자 상당수(김기춘, 박일룡, 우명수)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이기도 했다.

야당은 김영삼과 민자당, 노태우 정권을 거세게 공격했다. 김대중의 민주당은 김영삼 후보의 대국민 사과,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참석자 전원 파면 구속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대책 회의 참석자 일부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고 김영삼 후보 사퇴를 주장했다.

야권은 대책 회의가 김영삼 쪽과 무관할 없다고 봤다. 김기춘 개인의 돌발 행동이 아니라 김영삼 쪽의 조직적·총체적인 불법 선거 공작의 일부로 판단한 것이다. 김기춘이 김영삼 쪽과 밀착했고김영삼 사람으로서 후임 안기부장으로 여러 차례 거론된 알려진 사실이었다.

김기춘 씨는 김영삼이 집권하면 안기부장 0순위라는 말이 김영삼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대책 회의 전날 김기춘이 먼저 내려와서 김영삼을 영접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초원복집에서 열린 것과 같은 성격의 대책 회의가 김기춘이 부산에 오기 전에 다닌 광주, 대전, 대구, 경북 등에서도 있었던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기춘이서울에 앉아서 (선거 상황을) 이래 보고받고 하면 잠이 오는기라”, “제가 관계하는 회원들”, “팀들 얘기한 점도 사건을 김기춘 개인의 돌발 행동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여러 측면이 작용해 김기춘이 김영삼 후보 지원을 위한 밀사 자격으로 행동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뒤엎은 김영삼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나”

여권의 기본 대응 전략은사적인 모임‘, ‘우리와는 상관없다 주장하며 파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중립 내각을 내세운 것이 오히려 민망하게 노태우 정권은전직 장관이 주최한 사적인 회식 자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책 회의 참석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를 빠르게 취해 파문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조치는 파면도, 구속도 아닌 직위 해제에 그쳤다. 민자당도 김기춘은 당원이 아니므로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기춘도부산 지역의 후배 기관장들과 식사를 함께한 매우 사사로운 자리였다 주장했다.

그러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선거 부정은 오랫동안 이어진 악습이었다. 1992년만 놓고 봐도 14 총선에서 터진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 선전물 살포 사건, 한맥회 사건 여권과 관련된 선거 부정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에 더해 한준수 연기군수가 14 총선 당시 광범위하게 자행된 관권 부정 선거 실태를 폭로했다.

그런데도 대선에 접어들면서 안기부가 각종 단체에 불법 자금을 지원하며 김영삼 지지를 독려하고 있다는 등의 각종 관권 부정 선거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것이다.

김영삼은 분명 위기 상황이었다. 한준수 양심선언 관권을 동원해 대통령이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싸우다 지는 편을 택하겠다 관계 기관 대책 회의 금지를 공언한 김영삼이기에 궁색한 처지였다.

그러나 정치 경력 40년의 김영삼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다음 (16) 김영삼은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대화 내용을 녹음한 자체가 공작 정치의 일환이며 자신은공작 정치의 피해자라는 주장이었다.

사건의 핵심은 불법 도청이라며 판을 뒤엎은 것이다. 그것은 김기춘 등이 자행한공작 정치 사실상 덮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최대 피해자는 김영삼이라는 명제는 경우에만 성립할 있었다.

김기춘, 김영삼에 앞서도청이 문제라는 제시

눈여겨볼 하나는도청이 문제라는 틀을 김영삼에 앞서 김기춘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직후 김기춘은사사로운 자리에서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행태에 유감이라고 주장했다.

반성하기는커녕 대책 회의를 도청해 내용을 공개한 것이 문제라고 받아친 것이다. 발언은 김영삼이 자신을피해자 내세우기 전에 보도됐다. 도청이야말로 문제라고 김영삼이 주장하기 전에 김기춘과 교감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사건 직후 기술자 김기춘이도청이 문제라고 주장한 것은 가벼이 여길 사항이 아니다.

자신이최대의 피해자라고 김영삼이 주장한 , 검찰은 김기춘 등에 대한 소환 여부 시기를 대선 이후에 정하겠다고 밝혔다. 본격적인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겠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당선자는 김영삼이었다.

면죄부 검찰김기춘조차 기소 면할 뻔했다

대선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그러나 수사의 초점은 김기춘 등의공작 정치 아니라 도청 문제였다. 김기춘, 김영삼이 제시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수사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녹음테이프 공개 직후 검찰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내용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검찰 공화국구축의 주역 김기춘이 주재한 모임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현직 지검장 정경식이 대책 회의 참석에 더해 연락책 노릇을 점도 검찰을 곤혹스럽게 했다.

검찰이본모습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기 전부터 초원복집 모임은 사석이며 김기춘은 공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검찰에서 나왔다. 김기춘이나 정경식과 관련해 조직 차원에서 반성한다면 나올 없는 얘기였다. 정치에 민감한 검찰답게 김영삼의 부담을 가중하는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검찰은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에서 자행된 김기춘 등의 공작 정치가 아니라 도청에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이미지는 도청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 소식과 김기춘 소환 사진을 나란히 배치한 <한겨레> 기사(1992년 12월 22일).  ⓒ<한겨레> 화면 갈무리

1992 12 22, 대책 회의 참석자 김기춘 4명이 검찰에 소환됐다. 김기춘은순수한 우정으로 열린 아침 식사 모임이었고 선거와 관련해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한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 또한처가가 광주라며지역적 편견 없이 국민적 화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주장했다.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는 초원복집 모임 같은 것이 없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조사가 끝난 김기춘이 검찰을 떠날 , 검찰청 직원과 검사 20 명이 서울지검 청사 1 로비에 늘어서 배웅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 범죄와 관련해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사람이라는 생각을 검찰 쪽에서 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와 달리 도청에 관한 수사는 강도 높게 진행됐다. 초원복집 모임 도청은 정주영 아들 정몽준 의원 쪽에서 진행한 것으로, 현직 안기부 직원도 관계돼 있었다. 정치 공작에 특화된 중앙정보부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김기춘의 검은 뱃속이 안기부 직원이 관련된 도청을 통해 드러난 것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검찰이 도청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자, 야권에서는도둑질한 자를 두둔하고 도둑 잡으려다 장독 사람을 처벌하는 본말이 전도된 처사라고 반발했다.

12 29 검찰은 대책 회의 참석자 김기춘만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혐의 처리하며 면죄부를 줬다. 김기춘에게 적용된 조항은 선거법 36(선거 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 운동 금지)였다. 대책 회의 참석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분과 달리, 검찰은 도청과 관련해 정몽준 4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그것으로 수사가 마무리되고, 대책 회의와 관련된 여러 의문은 덮였다.

이날 검찰은모임의 성격, 대화 내용, 분위기 등에 비춰볼 공식 대책 회의로는 없다 발표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관권 선거를 획책하며 언론 공작을 모의한모임의 성격, 대화 내용, 분위기 검사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또한 검찰은 다른 참석자들의 경우(기춘 ) 장관의 발언을 듣고 수동적으로 자신들의 견해와 체험담을 짤막하게 제시한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김기춘의 궤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거나 한술 (예컨대이거 양해라뇨. 제가 떠듭니다.”) 발언 모두수동적이었을 뿐이라고 검사들은 판단했다.

초원복집에서 김기춘은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검찰은 초원복집 사건 수사를 통해 김기춘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덧붙이면, 검찰 내부에서는 기관장들은 물론 김기춘도 기소해서는 된다는 의견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도됐다. 결과 발표를 앞두고 김기춘만 불구속기소 하는 것으로 윗선에서 조정됐지만, 김기춘에 대해서조차 기소 불가론이 우세했다는 것은 검찰이 어떤 조직인가를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100 발언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가지 문제를 짚어보자. 번째,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라는 김영삼의 뒤엎기는 성공했다. 뒤엎기 시도를 분수령으로 김영삼 지지층이 결집하고 국민당은 역풍을 맞는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결과만 놓고 보면, 김기춘이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김영삼 표를 모아준 셈이다.

사건을 계기로 움직인 표는 어느 정도일까? 2005 김기춘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 표가 많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적잖은 표가 움직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게 “100 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주목할 점은 김기춘의 이야기에서 반성은 고사하고 은근한 자랑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김영삼 당선에 공을 세웠음을 부각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번째, 뒤엎기, 가장 중요한 핵심을 다른 사안으로 덮으면서 본질을 흐리는 공작은 되풀이된다. 2005 삼성·안기부 X파일 사건의 경우 삼성의 대선 자금 불법 지원, 검찰을 대상으로 금품 로비 등은 제대로 규명·처벌되지 않았다. 대신 검찰은 독수독과(毒樹毒果, 위법한 방식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론을 내세워 도청을 주로 문제 삼았다. 떡값 검사가 즐비하다는 지적을 받은 검찰다운 선택이었다.

도청과 관련된 아니지만, 2012 대선 당시 국정원의 댓글 공작 사건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사건의 성격을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감금과 인권 유린으로 호도하며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이라는 본질을 덮으려 했다.

파렴치한 뒤집기는 박근혜 집권기에도 나타났다. 예컨대박근혜 대통령이 집권 내내 세월호에 당했다 악성 풍문이 박근혜 지지자들 사이에서 나돈 것이 과연 우연일까? ‘세월호 죽이기공작은 박근혜 집권기에 정권 차원에서 자행됐다.

김기춘은 박근혜 정권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3년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 받을 때 모습이다. ⓒ연합뉴스

번째, 초원복집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 검찰, 경찰, 기무사 주요 권력 기관에 대한 철저한 개혁에 착수해야 했지만, 김영삼을 축으로 당시 집권 세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의지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권력 기관을 개혁하지 않은 나쁜 결과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뒤엎기와 관련해 앞에서 제시한 사례들도 그러한 나쁜 결과와 무관치 않다.

초원복집 사건과 언론 권력 문제

번째, 초원복집 사건은 언론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건넸다. 우선 김영삼의 뒤엎기 과정에서 언론 보도도 한몫했다. 몇몇 신문은 대책 회의 내용보다 정부의 후속 조치를 크게 보도했다. 대책 회의에 대해 별도로 제목을 뽑는 대신 여야 비방전의 하나로 취급하며 눈에 띄지 않게 보도했다가 노조 공정 보도위원회의 반발 성명을 자초한 신문도 있었다. 김기춘 등의 공작 정치보다 도청을 부각한 보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었다.

초원복집에서 언급된 <조선일보> 경우 대선에서도 편파 보도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특히 국민당과 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정주영 밀면 김대중 된다 김영삼 주장과 부합하는 칼럼 등을 비중 있게 실었기 때문이다. 김기춘 등이 <조선일보> 상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훗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후 박근혜 정권은 검찰총장 채동욱 찍어내기에 성공하는데, 과정에서도 <조선일보>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언론 권력의 부상과 맞닿아 있다. 1987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정치 권력의 압박이 약해짐에 따라 언론의 힘이 세지는데, 문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밀착했던 언론인들이 여전히 주축을 이뤘다는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하나의 권력으로 떠오른 언론의 폐해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문제다.

초원복집에서쥐약운운하며 광고주를 통한 압박, 언론 매수 등을 독려한 것은 김기춘의 언론관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 초원복집 사건 직후 김기춘 본인이쥐약론 나름대로 실천에 옮겼다가 걸렸다 것이다.

1993 2 기자협회보는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구속기소 김기춘이 법조 기자 30 명에게 고급 양주와 인삼 세트를 선물로 돌렸다고 보도했다.자성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글과 함께. 재판을 앞두고쥐약 먹이다가 들킨 셈이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2014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사실이기에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모른다‘, ‘아니다 답하기 일쑤인 김기춘이 예외적으로 사안은 전면 부인하지 않았다. ‘일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묘한부분 인정이라고 있다.

사안과 관련해 빼놓을 없는 사항은 1993 당시 일부 기자들의 반응이다. 건과 관련된 기자들이 기자협회보에 ‘ 그런 보도하느냐 항의하거나 기자협회에서 탈퇴하는 소통이 벌어졌다고 한다. 언론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되새기게 만드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짚을 것은 초원복집 사건에 대한 검찰의 허술한 처분과 김기춘 부활의 연관성이다. 1992 12 29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부터 사건에서 공소 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게 나왔다. 김기춘은 틈새를 파고들어 뒤집기를 시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초원복집 사건은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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