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이 보도한 ‘간병살인 청년 강도영 –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가 인권보도상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지난 2월 말에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선정해 주는 상이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기사 보기]

기뻤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 했다. 그런 날 보고 <셜록> 수습기자 주보배가 물었다. 

“오~~~~ (떠보듯이) 솔직히, 기분이 어때요?”

“뭐, 별 느낌 없어. 상 한두 번 받아보는 것도 아니고.”

수습기자 눈이 커졌다. 

“이런 느낌… 아직 모르나?”

주 기자 표정과 눈빛이 ‘웬 잘난 척?’으로 바뀔 즈음에 농담이라고 정정했다. 이 세상에 별 느낌 없는 상은 없다. 모든 상은 고맙고, 영광스럽다. 불법 약물 투약 없이, 합법적으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젖게 하는 것도 상이다. 

“주 기자도 이런 기분 한 번 느껴 봐야지? 최대한 빨리.”

이 말은 진심이었다. 후배 기자가 잘 돼야, <셜록>도 잘 되는 거니까. 상금도 받아 밥까지 사면 더욱 좋고 말이다. 밥 얻어 먹자는 마음 반, ‘너 잘 되라’는 마음 반으로, 나는 수습기자를 앞에 앉혀 놓고 왕년의 수상 이력에 대해 ‘썰’을 풀었다. 

“내가 왕년에 말이야 어떤 상을 받았는지 아나? 내가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올해의 인터넷 기자상’ 뭐 그런 거 들어봤나? 그게 말이야…’

대놓고 허세를 떤 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날 점심을 내가 샀다. 

<셜록>이 ‘간병살인 청년 강도영 –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 보도로 언론인권상 본상을 받았다. @셜록

제11회 인권보도상 시상식은 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과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이 시상했다. 인권보도상 심사위원장을 맡은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도 참석했다. 

신미희 사무처장. 내겐 “신 선배”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 한시절, 친애하는 적이긴커녕 마녀로 보였던 존재. 어느 날 저녁엔 쌍시옷 섞인 ‘19금 욕설’을 서로에게 퍼부우며 싸우기도 했던 선배. 그 신미희 선배를 시상식에서 딱 만났다. 

2004년 11월 <오마이뉴스> 공채2기로 입사했을 때, 저 사람 밑에서 일하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기자 신미희였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배치받은 부서의 ‘장’은 신미희였다. 일하기도 전에 죽고 싶었다. 

선배는 좀처럼 퇴근을 하지 않았다. 약속한 기사를 써내지 못한다? 선배는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내일 다시 쓰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다시 써서, 끝내 끝을 봐야 퇴근이란 게 가능했다. 

“난 퇴근할 테니까, 다 쓰면 메신저로 기사 보내라.”

선배는 이런 말도 할 줄 몰랐다. 내가 기사를 못 쓰면, 같이 퇴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밤샘을 한다? 그럼 같이 밤샘을 했다. 

“선배, 그냥 퇴근하시면 안 돼요? 옆에 계시면 제가 더 불안해서…”

소심한(?) 나도 이런 말을 못했다. 입사 동기들도 그 말을 못했다. 우린 각자 자리에서, 밖이 어둡든, 아침이 밝아오든 기사를 마감해야 했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기사를 붙들고 앉아 밤새 낑낑대는 수습기자를 보면서 선배는 오죽 답답했을까. 

<셜록>의 언론인권상 수상은 모두 왓슨 여러분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셜록

“야, 별것도 아닌 기사를 들고 뭘 그렇게 쩔쩔매고 있냐!”

차라리 이런 구박이라도 하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선배는 또 이런 말도 안 했다. 그저 옆에서 수습기자들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 용케 마감하면, 보완할 내용과 고칠 부분을 알려줬다. 다시 수정본을 제출하면, 그걸 또 검토해서 피드백 주고. 다시 고치고, 또 피드백 주고…. (물론 가끔 큰소리가 나기도 했다. 인간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그러다 밤을 새고, 해장국에 소주 마시고 아침에 퇴근하고. 그땐 정말이지 선배가 미웠다. 기사를 못 쓰는 나보다, 나 때문에 집에 안 가는 선배가 얄미웠다. “야, 너 때문에 또 밤샘이잖아!” 그런 잔소리 하나 없이, 마치 집에 갈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듯한 그 태평한 얼굴이 밉고 미워서 내 속에서 다 열이 났다. 

우린 그렇게 지지고 볶고, 때로는 웃고 가끔은 불화하면서 1년여를 지냈다. 나는 사회부 기자, 선배는 사회부 부장으로 말이다. “세월은 사람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는 말을 좋아한다. 

2005년, 나는 ‘군 전역 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노충국 사건’을 보도했다. 신미희 선배가 이 보도를 지휘하고 책임졌다. 그해 연말에 선배와 나는 ‘올해의 인터넷 기자상’과 ‘언론인권상’을 받았다. 내가 주보배 <셜록> 수습기자를 앉혀 놓고 허세 떨며 자랑했던 상으로, 1년에 딱 1편만 주는 상이었다. 

[올해의 인터넷 기자상 관련 기사 보기]

혼자, 저절로, 그냥 되는 일은 없다. 짧은 기사 하나 마감 못해 밤새는 나를 꾸역꾸역 키워낸 게 신미희 선배다. 결국 그해 받은 두 상의 팔 할은 선배가 만든 셈이다. 이듬해 신 선배는 <오마이뉴스>를 떠났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나, 신미희 선배와 나는 시상식에서 다시 만났다. 선배는 심사위원장, 나는 수상자로 말이다. 단상에 올라 수상소감을 말하려는데, 맨 앞줄에 앉은 신 선배가 보였다.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선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강도영 씨 사건은 단신 보도로 묻힐 뻔했습니다. 그가 왜 아버지를 죽게 했을까… 그게 궁금해서 취재를 했는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강도영 씨가 혼자 아버지를 돌볼 때, 곁에 어른 한 사람만 있었어도 비극적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수감 생활을 하는 지금도 강도영 씨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셜록>이 곁에서 돕고 보살피겠습니다. <셜록>은 강도영 씨가 교도소에서 나오면 살 집을 마련해 줄 예정입니다. 오늘 주시는 상금은 그 집을 구하는 데 보태겠습니다.”

신 선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맨 앞에서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시상식이 끝난 뒤 나는 꽃다발을 신미희 선배에게 안겼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신 선배와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셔터 터질 때 내가 말했다. 

“선배, 고마워요.”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과 박상규 <셜록> 기자 @셜록

선배는 내 등을 몇 번 두드려줬다. 우리가 함께 일한 건 2005년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 신미희 같은 선배를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다. 후배 기사를 완성하기 위해 곁에서 함께 밤샘을 하는 선배 말이다. 돌아보면, 내가 지금껏 기자로 밥 먹고 사는 힘의 상당 부분은 신미희 선배의 가르침 덕분이지 싶다.

모든 사람은 서로 연결돼 있다. 느슨하든 끈끈하든, 영향을 주고 받는다. 자기 혼자 잘나서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좋은 성과는 대부분 함께 만들어 낸 일이다. <셜록>이 받은 인권보도상도 그런 결과물이다. 

누군가는 수습기자를 키웠고, 내가 강도영을 보도할 때 동료들은 회사를 책임졌다. 문제 해결까지 지향하는 <셜록>은 강도영 씨를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다. 이 모든 건 <셜록>의 친구 왓슨 덕분에 가능했다.  

정말이지 저절로, 그냥 되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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