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큰아이가 지난주에 숙제를 하나 받아왔더군요. 직업에 관해 인터뷰하는 숙제였습니다. 귀여운 질문들에 웃으며 대답하다가, 마지막 질문에서 생각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는?”이라는 질문에서 13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2008년 노동전문지인 <월간 작은책>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읽고 쓰는 일을 한 것은 2009년. 바로 ‘쌍용자동차 옥쇄파업’이 있었던 그해였습니다.

딸이 직업에 관한 인터뷰를 하며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셜록

쌍용자동차가 총인원의 3분의1이 넘는 인력감축안을 발표하자, 노조는 상생안을 만들어 교섭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노사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정리해고는 강행됐습니다. 노조는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은 공장을 완전히 봉쇄하고 출입을 막았습니다. 음식물도 식수도 의료진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 공권력 투입과 강제진압 분위기가 고조되자, 불과 몇 달 전 일어난 ‘용산참사’를 떠올리며 가슴 졸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가깝게 알고 지내던 르포작가였습니다.

“규화야, 쌍차 개구멍이 열렸대. 지금 바로 출발하면 들어갈 수 있다니까 빨리 와라.”

일촉즉발의 대치가 숨 막히게 이어지고 있는 공장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잠입해서 취재할 기자들을 급히 모으고 있는데 그 소식이 저한테까지 왔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바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들어가는 건 오늘밤이지만 나오는 건 기약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진압이 되든 합의가 되든, 농성이 끝나야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기자라면, 가야 합니다. 가야 할 이유는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안 떨어졌습니다. “네, 바로 출발할게요”라는 한마디가 안 나와서 말을 빙빙 돌렸습니다.

결국 저는 그날 ‘개구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충 월간지 마감을 핑계 삼은 걸로 기억합니다. 솔직히 싸움도 무섭고 진압도 겁나서 못 가겠다는 말은 차마 못했습니다.

그날 개구멍으로 들어간 기자들은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농성 노동자들의 절박하고 간절한 이야기들을 기록했습니다. 기사가 되고 책이 되고 영화가 됐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왜곡됩니다. 주저 없이 개구멍으로 뛰어 들어간 기자들의 용기와 노력이 없었다면, 2009년의 ‘쌍차투쟁’은 자극적인 몇몇 장면의 폭력으로만 영영 기억됐을지 모릅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저 달이 차기 전에>(2009)의 한 장면. ⓒ따미픽처스

그날의 개구멍은, 그날의 부끄러움은 가슴속에 큰 빚으로 남았습니다. 1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빚을 갚으려고 부족한 능력이나마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왜 기자로 사는지 스스로 답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2009년 여름날의 개구멍을 생각했습니다.

 <셜록>이라는 이름, 그리고 ‘콘텐츠총괄매니저’라는 자리를 고민할 때도 그랬습니다. 또 다른 개구멍 앞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달아날 것인가, 또 부끄러움을 남길 것인가. 

 그동안 운 좋게 몇 권의 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는 늘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위성처럼 떠다니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 꿈이다.” 

 고민은 길었지만 답은 이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9월 1일 <셜록>에 첫 출근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당신과 함께 쓸 ‘기적 같은’ 이야기

저도 <셜록>을 좋아했습니다. 한때 ‘직업은 있으나 직장은 없는’ 사람으로 지낼 때도 ‘왓슨’만은 탈퇴하지 않았습니다. 뉴스와 이야기 사이의 어디쯤에서, 독자의 이성과 감정을 고루 깨워주는 기사. 탐사보도와 스토리텔링이 결합한 <셜록>의 기사가 좋았습니다.

<셜록>의 기사는 한국 사회 곳곳을 조명해, 부조리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첫 번째 ‘그림자’는 바로 부(富)의 그림자입니다. 부(富)의 그림자를 걷어내면 자본의 민낯이 보입니다. 공정과 공존, 평등과 존엄 같은 낱말들이 자본의 반대편에 놓여 있습니다. <셜록>이 좇아야 할 가치들, 우리 사회에서 지워져선 안 될 말들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의 그림자입니다. 돈과 권력은 오랜 세월 한 몸이었습니다. 돈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돈을 지키며 결탁하고 유착해왔습니다. 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떳떳하지 못했고, 그 은밀한 ‘작업’ 속에 소리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진실이 한 조각씩 밝혀질 때마다 세상은 한걸음씩 진보해왔다는 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은 침묵을 좋아합니다. 세 번째 그림자는 금기의 그림자입니다. 권력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으려는 이들을 차별과 혐오, 배제와 처벌의 대상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금기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정의의 상상력을 넓히는 일입니다. 이곳 또한 <셜록>의 시선이 ‘뜨겁게’ 닿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사람들은 ‘희망’을 찾고 싶어 합니다. 상식과 양심, 진실과 정의. 이 팍팍한 세상에 아직도 그런 낭만적인(?) 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진실의 힘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작은 ‘기적’들을 경험하는 것. <셜록>이라는 작은 언론의 무모한(?) 도전을 많은 분들이 응원하는 이유는 그것 아닐까 합니다.

<셜록>과 함께 세상을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자부심. 선한 이웃들의 마음과 행동을 모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연대감. 제가 <셜록>에서 해야 할 일은, <셜록>을 향한 이런 기대를 ‘확신’으로 바꿔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말이었을 겁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독전>(2018)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대사 한마디가 머릿속에 콱 박혔습니다. 딱 저한테 하는 말이더군요.

“우리가 내놓아야 할 것은 결론이야. 결심이 아니라.”

최규화 <셜록> 콘텐츠 총괄 매니저. ⓒ셜록

결심의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어찌 보면 결심은 쉽습니다. 어려운 건 결론이죠. 그래도 좋은 동료들과 함께, 든든한 ‘왓슨’들을 믿고 가보겠습니다. 세상이 지워버린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당신과 함께 쓸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박상규 기자가 ‘콘텐츠총괄매니저’ 채용 공고에서 이렇게 묻고 싶었다죠?

“모험이란 걸 언제 마지막으로 해봤습니까?”

네, 저는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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