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처럼 여겼던 회사가 헐값에 팔려갔다. 키코(KIKO- Knock In Knock Out) 때문이었다. 매년 수백 억 원을 벌며 승승장구하던 회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2008년 가을, 원 달러 환율이 고공 행진하자 벌어들인 돈을 고스란히 은행에 줘야 했고 끝내 도산했다.

뻔한 스토리

키코 피해자 모임에 가서 ‘저 얘기가 누구 얘기입니까’ 물으면, 과연 손 들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그들에게 이보다 뻔한 래퍼토리가 없다.

키코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수천 명의 삶을 박살낸 테러범이다. 기업이 망하자 직원들이 길거리에 내몰렸고, 그 가족들은 평온했던 삶을 잃었다.     

2009년 10월, 김광림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517개의 기업이 총 3조3538억 원을 키코 때문에 잃었다. 피해 대기업은 46개에 불과했지만, 471개 중소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많은 이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들리는 얘기로는 몇몇은 자살을 했고, 누구는 여전히 빚잔치에 시달리고 있다. (도산과 상장폐지 등으로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기업까지 보태면 피해액은 10조 원 규모로 추산된다.)

동화산기 전 대표
박용관(75세)도 키코의
뻔한 피해자 중 하나다

그는 늘 누런 봉투에 자신의 피해사실이 요약한 문서와 소장, 기사들을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다. 반 평생을 일궈온 회사가 은행이 놓은 덫에 걸려 없어졌다는 분노와 허탈감은 여전히 거의 눈빛에 남아있다.

동화산기 전 대표이자 창업주 박용관(75살) 씨. ⓒ주용성

동화산기는
타이어 제조 설비를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다

1968년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일로 시작해서 점차 사업을 확장해 갔고, 나중에는매출액 500억 원을 찍었다. 2년 연속 국가품질경쟁력 우수기업에 선정될 정도로 알짜배기 수출 중소기업으로 키운 건 지금까지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25살 청년은 회사를 키우는 사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증가하는 직원과 그들의 가족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회사를 키우는 동력이 됐다.

금융전문가는 없었지만, 급하게 돈을 막아야할 때 은행은 큰 도움을 줬다. 주거래 은행 신한은행이 사업의 동반자처럼 느껴지는 건 박 전 대표 처지에서 당연했다.

번번이 회사의 발목을 잡은 건 환율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치기 직전, 원달러 환율은 1000원이 안 됐다. 2007년에는 900원대를 유지했다.

수출 기업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1달러짜리 물건을 팔아도 1000원조차 받을 수 없었다. 수출하는 입장에서 환율이 오르는 게 유리했다. 같은 물건을 팔아도 값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때 마침 신한은행이
내놓은 상품이
바로 키코였다

환율이 약정된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신한은행은 정해진 값에 달러를 사들이겠다고 했다.

하단환율(Knock Out)과 약정환율 사이에 환율이 결정되면 약정환율로 은행이 달러를 매입하고, 약정환율과 상단환율(Knock In) 사이에 환율이 결정되면 그 환율 그대로 달러를 매입해 주는 조건이었다. (키코는 여러가지 변형 상품이 존재하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환율이 900원(하단환율)에서 1000원(약정환율) 사이에 움직이면 은행은 무조건 1달러를 1000원(약정환율)에 사겠다고 약속했다. 기업 입장에서 이익인 것처럼 보였다.

환율이 950원이라면 원래는 1달러를 950원에 교환하는 건데, 은행은 1달러를 1000원으로 쳐주겠다고 하니 기업은 1달러당 50원의 이익을 보는 듯했다.

반면, 환율이 1000원(약정환율)보다 높고 1100원(상단환율)보다 낮으면 은행은 시장 환율 그대로 달러 값을 쳐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구간에서는 기업입장에서 손해볼 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키코를 가입하지 않았다면, 거래했을 원래 환율대로 달러를 원화로 교환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환율이 900원(하단환율)과 1100원(상단환율) 사이에만 있을 때만 기업은 이익을 봤다. 당시 은행은 수수료조차 받지 않았다. 사장님 입장에서 이러한 조건의 계약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환율이 폭락이나 폭등을 하겠어’라는 생각에 너나 할 것없이 키코에 가입했다. 수출에 기반한 중소기업에게는 유행같은 현상이었다.

박 전 대표도 같은 이유로 키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2007년 10월이었다. 신한은행이 키코 가입을 권유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박 전 대표는 은행에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돈이 급할 때마다 운영자금을 빌려줬는데, 외환까지 관리해 준다고 하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동화산기 전 대표이자 창업주 박용관(75살) 씨. ⓒ주용성

키코 계약으로 생긴 은행 빛 ‘200억 원’

독배를 마셨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환율이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키코는 환율이 하단환율보다 내려가거나 상단환율을 넘어서면 얘기가 달라졌다.단 한 번이라도 하단환율을 찍거나, 상단 환율을 찍으면 계약은 은행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다시한번 하단환율을 900원, 상단환율을 1100원, 약정환율을 1000원으로 가정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경우 환율이 900원 아래로 떨어진다면 계약은 무효가 됐다. 즉, 은행이 너무 큰 환차익을 보전할 수 없다고 보고, 약정환율인 1000원에 달러를 매입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환율이 상단환율을
초과했을 때였다

키코 사태는 이 상황이 연출되면서 벌어졌다. 환율이 1100원, 그러니까 상단환율을 웃돌자 기업은 2~3배 이상의 달러를 시장가격보다 한참 낮은 약정환율에 팔아야 했다. 그게 계약 내용이었다.

위 상황을 다시 가져오면, 쉽게 말해 환율이 갑자기 1500원으로 뛰어올랐을 경우 기업은 1달러당 500원씩 손해를 보는 건 물론이고 계약한 대금의 2~3배에 달하는 달러를 은행에 ‘억지로’ 팔아야 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1달러당 500원의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2배 3배의 거래 손실이 생겼다. 계약 기간이 있기 때문에 중도에 계약을 해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환율이 떨어지기 전까지 무제한으로 손실이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거래 업체였던 금호타이어도 대금 결제를 미룰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당시 금호타이어가 주지 않은 금액은 200억 원이 넘었다.

2008년 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빚폭탄이 이어졌다. 납품업체에 지급해야할 부품값이 100억 원으로 불어났지만, 지급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물건을 만들 수 없었다.

버는 돈을 몽땅 은행에 갖다 바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또 다시 물건 만들 돈이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다른 피해 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어느 전문가도 이 계약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최고치를 경신했다

처음에 은행은 이런 상황이 미안하다고 했다. 은행 본사 직원들이 찾아와 “손실이 발생해 죄송하다”면서 “이제는 더 이상 원 달러 환율이 오르지 않을 것”이라면서 달랬다.

그러면서 내놓은 카드가 ‘2배수 상품’이었다. 기업이 약정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는 기간을 늘려 손해를 보전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그 역시 소용없었다.

오히려 ‘2배수 상품’ 때문에 은행 빚은 180억 원에 이르렀다.

동화산기 전 대표이자 창업주 박용관(75살) 씨. ⓒ주용성

최대 채권자 된 은행, 결국 기업을 매각하다

2008년 11월, 박 전 대표는
결국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협력업체들 또한 응원해줬다. 동화산기가 망하면, 협력업체들은 물건을 거래할 곳이 없기 때문에, 수십 년간 정을 나눈 협력업체 사장들은 법원에 탄원서를 내서 동화산기의 빠른 재기를 원한다고 청원했다.

여기에 은행이 제동을 걸었다. 은행은 회사가 기업회생으로 목숨을 간신히 유지하는 것보다 빨리 처분하고 싶어했다. 은행은 기업회생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박 전 대표가 회사에 있는 걸 원치 않았다.

키코 계약 때문에 최대 채권자가 된 신한은행은 자기 사람으로 빨리 대표를 바꾸고 싶어 했다.

신한은행은 결국 지점장 출신의 관리인을 동화산기로 파견 보냈다. 박 전 대표를 밀어내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실제로 박 전 대표와의 불편한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0년 5월, 은행은 결국 동화산기를 시장에 내놓았다. 매각 값은 170억 원이었다. 키코가 아니었다면, 은행에 주지 않아도 됐을 빚 때문에 동화산기는 창업주 박 전 대표의 손을 떠났다.

제2, 제3의
박용관은 많았다

2008년 9월, 태산LCD가 최초로 도산한 이후로 키코로 벼랑 끝에 몰린 중소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키코 피해자들이 어쩔수 없이 선택한 방법은 소송이었다.

2008년 11월, 100개의 피해 기업들은 은행을 상대로 ‘키코는 불공정 계약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나중에 소송에 참여한 기업은 220여개로 늘어났다.

은행은
골리앗이었다

김앤장과 율촌, 태평양과 같은 국내 최대 로펌을 앞세워 대응했다. 로펌들은 무엇보다 여론화 작업에 힘썼다. 키코 사태를 ‘기업들이 환투기를 벌이다가 손해를 입은 머니 게임’이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웠다. 기업들이 원해서 스스로 거래했기 때문에 기업의 잘못은 없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논리였다. 기업에게 키코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고자 든 보험’과 같은 존재였다. 은행도 인정했다.

하지만 보험이라면 가입자가 적어도 적자는 나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키코는 상품에 가입한 모든 기업이 적게는 수십 억, 많게는 수백 억 원의 빚을 떠 앉았다.

판사도 의문을 가졌다. 키코 법정에서 한 재판관이 은행 측에 “카지노에서도 6:4 비율 정도의 승률은 지켜지고 있는데, 키코 사태는 12:0으로 중소기업이 완전히 잃고 있는데 이 정도면 사기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동화산기 전 대표이자 창업주 박용관(75살) 씨. ⓒ주용성

김앤장의 자료를 복사한 듯 인용한 법원

법원은 끝내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에 참여한 220여개 기업 중에서 1심에서 165개사는 패소하였고, 41개사는 10~50%의 일부 인용을 받았다.

절반 이상의 규모로 인용을 받은 회사는 10개 미만이었다. 2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더했다. 2013년 9월, 은행에게 완벽한 KO 승을 안겨줬다.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수백 건의 판결문이 마치 복사라도 한 듯 똑같은 내용이 많은 것도 이상했지만, 김앤장이 발간한 <키코-오해와 진실> 책 내용 상당수가 판결문에 그대로 들어간 점은 중소기업들을 분노하게 했다.

‘추가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통화옵션상품’이라는 말미로 끝나는, 김앤장이 정의한 키코의 정의가 판결문에 포함됐다. 정의부터 대기업의 논리를 따라갔으니, 중소기업들이 승소하리 만무했다.

“키코 통화옵션계약은 확률이 낮은 구간의 위험을 부담하는 확률이 높은 구간인 넉아웃 환율부터 넉인 환율 사이의 구간에서 행사환율을 높여 통화선도거래에 비해 추가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통화옵션상품이다.”

– 김앤장 법률사무도 <키코-오해와 진실> 2010.6.

해외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으로 받아들여진 점이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것 또한 이상했다.

IMF 자료에 따르면, 키코와 비슷한 파생상품 때문에 피해를 본 지역에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지역 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과 폴란드 등 유럽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키코가
‘사기’로 판명돼 기업이 승소했다

미국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 일찌감치 사기로 결론난 상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부분이 쟁점화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키코 상품이 환율의 일부 구간에서라도 헤지 기능이 있기 때문에 헤지 상품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중에서도 손꼽히는 문제적 판결로 지적됐다.

“전체 환율 구간이 아닌 일부 구간에서만 환위험 회피가 된다고 해서 구조적으로 환헤지(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없애는 작업)에 부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2012다13637 전원합의체 판결

이밖에도 키코 사태에서 사법적인 조치에 대해 지적할 내용은 많다. 상품에 대해 전문가나 다름없는 은행이 파생상품에 대해 거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기업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불공정 계약이었다.

그리고 기소의지가 분명했던 키코 담당 수사 검사가 갑자기 공판부로 전보 조치되고 곧바로 사표를 제출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대법원 ⓒ주용성

키코 대법원 결정은 국가경제발전을 위해서다?

동력을 잃었던 키코 피해 기업 공동대책위원회가 올해 5월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넋 놓고 있던 중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벌인 사법 농단에 키코 사태도 포함된 것을 알았다.

2018년 5월,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한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보고서에 ‘사법부가 VIP(박근혜 전 대통령)과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한 사례’를 설명하면서 키코라는 단어가 나온다.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 중 일부

양승태 대법원은 키코 소송에서 피해 기업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박근혜 정부를 도와주는 거라고 여긴 듯하다.

은행이 승소하는 것이
국가를 배부르게 하는 방법이라고
법원은 평가했다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문건 중 일부.

“금융기관과 기업이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에서 역시 대법원 공개변론 중계방송을 실시하는 등 절차적인 노력을 통하여 양측이 승복할 수 있는 결론에 도출했다.”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피해 기업이 소송 결과에 불복할까봐 걱정했던 걸까. 문건에서 공개 변론 결정 또한 정무적인 이유라는 것을 고백했다. 당시 대법원은 키코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 3건에 대해 공개변론을 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직접 공개변론의 필요성을 재판 앞두고 말했다. 소송에 대한 이해심을 높이기 위해 공개변론을 열었다고 했지만, 정무적 판단에 근거한 ‘쇼’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오늘 변론을 열기로 한 KIKO 사건은 몇 년 전에 있었던 세계적 금융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사안으로서 중요한 법률적 쟁점이 많고 사회적 관심이 높아서 공개변론과 방송중계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민사 사건입니다.”

– 2013년 7월 18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개변론 발언

키코는 기업이
은행에 오히려
암보험을 들어준 꼴

키코 사태를 두고 자주 인용되는 우스갯소리다. 기업이 키코를 보험으로 여기고 가입했으나, 알고보니 은행의 보험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은행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는 점을 꼬집는 말이다.

이 불공정 계약에 대법원 13대 0, 만장일치로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경제발전을 위해서라는, 근거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재판을 짜맞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용관 전 동화산기 대표를 비롯해 수 많은 키코 피해 기업들의 주인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회사가 없다. 회사는 도산이 났거나 어딘가로 팔려 조각났다.

덩달아 이들의 인생도 파산 지경에 이르렀거나 산산조각났다. 어떻게 흩어진 과거를 다시 모을 수 있을까. 사법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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