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구름이 평택으로 모여 들었다. 먹구름은 장대비를 불렀다. 억수 같은 비는 평택을 빠르게 적셨다. 그런 하늘을 보며 김주중 씨(48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김 씨는 새벽에 배달할 화장품 박스들이 빗물에 젖어 찢어진다며, 서둘러 트럭 운전대를 잡기위해 황급히 집을 나섰다. 2018년 6월 26일의 일이다.

사실 지난 10년간
김 씨는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안 한 일 없었다

벽돌공장에도 다니고, 빚을 얻어 친구와 고물상을 차리기도 했다. 시멘트 미장일에 이삿짐을 나르는 중노동까지 했다. 몸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화물차로 화장품을 배송하는 일을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다 잘 때, 김 씨는 운전대를 지키는 것으로 가족의 생계를 지켰다.

그렇게 고생했지만
남편 김 씨가 5월에 번 돈은
고작 ’76만원’이었다

생활고는 짜증을 자주 불러왔다. 6월 27일 오전 7시, 신상진 씨(44살)는 물류센터로 출근하기 위해 주차장에 갔다가 남편이 주차한 차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나무 아래 차를 주차해 나뭇잎이 차 창문을 다 가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신 씨는 새벽 일을 마치고 퇴근 중인 남편에게 전화해서 버럭 화를 냈다.

“차를 왜 여기에 세워 놨어! 나무 아래 주차해서 나뭇잎이 차 유리창을 다 덮었잖아.”

출근을 마친 신 씨는 여느 때처럼 물류센터에서 옷을 분류했다. 백화점에 배송할 옷들을 차곡차곡 박스에 담는 일을 했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 입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매일 일당의 몇 배에 이르는 값비싼 옷을 만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그 일을 반복했다. 특별할 것 없는 날처럼 여겨졌다.

그 문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그리고 천하에 못난 자식, 어머님께도 효도 한번 못하고 떠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라.”

– 남편 김주중 씨의 마지막 문자
김주중 씨가 신던 작업 신발. ⓒ주용성

5월 수입 76만 원… ‘생활고’와 ‘트라우마’로 결국 자살

6월 27일 오후 2시, 신 씨는 남편의 문자를 받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자를 보는 순간 신 씨는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바로 직감했다. 회사에 사정을 얘기하고, 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했다. 신 씨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애석하게도 남편의 휴대전화 신호는 야산에서 멈췄다. 휴대전화는 야산 아름드리 나무에서 남편과 함께 발견됐다.

“제수 씨. 마음 단단히 먹어.”

경찰은 신 씨에게
남편의 최후를
보지 못하게 했다

남편의 친구이자 직장동료인 지선열 씨가 대신 남편의 신원을 파악했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서 참혹한 남편의 마지막이 상상이 됐다.

현장에서 발견된 목장갑은 신 씨를 더욱 슬프게 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이 높이 매달려 있었다. 실패 없는 죽음을 위해 목장갑까지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하얀 면포에 덮인 아버지의 모습을 본 첫째 아들 김준구(23살) 씨는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울고 있는 어머니와 빈소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이 마치 다른 시공간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둘째 아들 김송구(22살) 씨 또한 넋을 잃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빈소를 찾는 조문객들의 손을 맞잡았다.

아들 준구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던 순간은 관을 들 때였다. 아버지의 몸은 삶의 무게와 달리 너무도 가벼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업전선에 뛰어든 탓인지, 한손으로 번쩍 들어올려지는 아버지가 애처로워 울었다. 아들 준구 씨는 평소와 달랐던 아버지 최근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 5만 원 권 2장을 살포시 침대 위에 올리고 간 아빠를 기억했다.

10만 원,
아빠가 이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김주중 씨의 영정사진. ⓒ주용성

아내 신 씨도 평소 같지 않았던 남편의 행동을 떠올렸다.

남편은 며칠 전 느닷없이 아내 신 씨가 보고 싶다며 약속을 깨고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오라고 했다.

신 씨는 급한 일이 있는 줄 알고 서둘러 왔지만, 남편은 그저 퇴근한 신 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머릿속에 오래 새겨 두려는 듯 이목구비를 하나 하나 뜯어 봤다.

‘왜 그때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남편은 빚을 남기고 가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정작 신 씨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 남편의 마지막 흔적은 따로 있었다.

남편은 마지막 길을 나서면서도 가족들의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나갔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집어 들자마자 신 씨의 눈가도 축축해졌다.

가슴은 찢어질 듯 미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챙겼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겨레>와 한 최근의 인터뷰도 신 씨의 가슴을 울렸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하고 싶은 얘기를 남긴 것 같아서 신 씨에게 그 기사는 특별했다.

유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남편을 미워했다. ‘설마 댓글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건 아니겠지.’ 남편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기사에 달린 댓글은 이랬다.

“고마해라.. 너네 나가고 쌍용 잘 나간다.”

“좌파 정부가 들어서니까 범죄자들이 당당해지는구나.”

남편은 쌍용자동차
해고자였다

서울 중구 대한문에 차려진 김주중 씨의 분향소 모습. ⓒ 주용성

특공대, 노조원들 폭력 진압… 6개월 구속

남편이 쌍용자동차 입사에 합격하던 날이 선명하다. 김주중 씨와 아내 신상진 씨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동거를 할 정도로 서로 사랑했다.

두 사람이 동거를 하던 1993년, 남편 김 씨는 그토록 바라던 쌍용자동차에 입사했다. 둘은 쌍용자동차가 주는 돈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쌍용이 주는 월급으로 두 아들을 키웠다.

누가 뭐래도 회사는
김 씨 가족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한 곳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건 2005년 1월이다. 중국 상하이차쌍용차 지분 48.9%를 59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쌍용차의 최대 주주가 된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상하이차는 4000여억 원을 쌍용자동차에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공염불로 끝났고, 회사는 빠르게 적자로 돌아섰다. 기술 유출 의혹도 있었다. 상하이차가 쌍용의 기술을 중국에 빼돌리고, 이른바 ‘먹튀’를 한 게 아니냐는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결국 쌍용자동차는 2009년 1월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상하이차는 손을 뗐고, 회사는 2009년 4월 총 인원의 37%인 2646명에게 구조조정을 통보했다.

1천100여명의 노동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회사는 발표 다음달 희망퇴직을 거부한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통지서를 발송했다.

직원들은 억울했다. 근로기준법 제24조에 따르면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회사가 부채비율을 크게 늘려 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회계 조작을 통해 만들어냈다는 의혹이 세간에 퍼졌다.

최종 해고자는
920여명

그 중 한 명이 바로 남편 김주중 씨였다. 살생부에 김 씨의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을 신 씨는 나중에 알았다

뒤늦게 집으로 날아온 해고통보서를 보고,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걸 알았다. 노조원들은 곧장 파업에 들어갔고, 남편 김 씨는 선봉대에 섰다. 2009년 5월 말부터 77일간, 노조원들은 뙤약볕 아래서 파업농성을 벌였다.

“상진아. 울지마. 내가 제일 덜 다쳤어. 걱정하지마.”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파업이 끝난 뒤였다. 2009년 8월 6일, 남편은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병원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 전날, 경찰은 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를 이용해 농성장을 덮쳤다. 경찰은 곤봉으로 남편과 파업 참가자들을 사정없이 팼다. 방패로 머리를 찍었다. 얼굴에 테이저 건을 쐈다. 스티로폼을 녹이는 2급 발암물질 디클로로메탄이 함유된 최루액을 하늘에서 뿌렸다.

방송에 중계된 모습에 비친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모습은 테러범이나 다름없었다. 경찰은 마치 테러집단을 체포하듯이 노조원 96명을 잡아 들였다.

수원지방법원은 공장을 점거하고 폭력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노조원 간부 8명에게는 징역 3~4년의 실형을, 나머지 간부 14명에게는 징역 2∼4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남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왜 면회를 매일 오고 그래. 진짜 괜찮다니까. 그냥 집에서 쉬어.”

신 씨는 매일 안양교도소를 찾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자마자, 평택에서 차를 끌고 안양으로 향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전 10시에 딱 맞춰 갔다.

면회 시작시간에 맞춰 가면, 허락된 면회 시간인 10분보다 조금 더 대화할 수 있었다. 얼굴만 보면 눈물이 주룩 쏟아지는 바람에 대화는 거의 못했다. 그래도 신 씨는 6개월간 교도소로 향했다.

남편의 진심은 주고받은 편지에 담겨 있었다. 김 씨는 구속 기간동안 자주 가족들에게 손 편지를 썼다. 따뜻했다. 두 아들에게도 메시지를 남겼다.

학원비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이런 아빠가 창피할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나가서 (왜 구속됐는지) 자세히 이야기 해줄 게”라면서 아들들이 혹시 엇나갈까 노심초사했다.

김주중 씨가 수감 중 아들에게 작성한 편지. ⓒ주용성

경찰과 회사, 수십 억대 손해배상 청구

교도소 문을 나왔지만
감옥과 같은 삶은 계속됐다

회사는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업무방해와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노조원 139명에게 손해배상금 150여억 원을 청구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노조의 파업 목적과 수단에 정당성이 없다”며 노조원 109명에게 33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나중에 사측은 대법원에 계류돼 있는 상황에서 개인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취하했다. 다만, 금속노조에 대해서는 34억여 원의 손해배상비를 내라는 입장이다. 34억여 원은 이자가 계산되지 않은 금액이다.)

경찰도 돈을 물어내라고 했다. 헬기와 기중기가 부숴진 것을 보상하고 출동했던 경찰들의 치료비와 위자료를 달라며, 24억여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노조에 청구했다. 1심 법원은 14억 원, 2심 법원은 11억 8천여만 원을 인정했다. 그 금액은 계속 이자가 붙어 20억 원으로 덩치를 키웠다.

졸지에 채무자 신세가 된 김주중 씨는 자기 목에 목줄이 채워진 느낌을 받았다. 사측은 그나마 개인에 대해서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했지만, 경찰은 “돈을 갚으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경찰은 돈으로
해고자들을 죄인 취급했다

“젊은 사람이 딴 일을 알아보면 되지, 왜 거기에만 매달려!”

김 씨를 좌절시키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친척들을 포함해, 세상 사람들을 김 씨를 되려 ‘게으름뱅이’라고 욕했다.

일을 알아보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더 억울했다. 부지런히 서류를 넣어봐도, 어찌된 일인지 번번히 채용이 무산됐다. 세간에는 “회사들끼리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명단을 돌려본다”는 말까지 돌았다. 김 씨 뿐만이 아니었다.

쌍용 해고자들은
채용시장에서
블랙리스트가 됐다

“일자리를 어렵게 소개받아도, 소개해주는 사람이 ‘웬만하면 쌍용자동차에 다녔다고 하지 마라’라고 얘기했어요. 쌍용자동차에 다녔던 걸 이력서에 쓰면, 실제로 안 뽑아줬고요. 쌍용을 나온 사람들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일하게 된 것도, 받아주는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공간 <와락>의 권지영 대표
서울 중구 대한문에 차려진 김주중 씨의 분향소에 열린 추모제 모습. ⓒ 주용성

김 씨 일가족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김 씨는 벽돌 공장을 시작으로, 고물상도 해보고, 건설 현장에서 이른바 ‘노가다’로 불리는 일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7년 5월부터 화장품 배송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트럭 구할 돈이 없어 지인 명의로 된 트럭을 빌려 썼다.

첫째 아들도 대학생이 되자마자 태권도 사범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아내 신 씨는 마트 캐셔, 치킨집 서빙건설 노가다, 나중에는 물류 센터에서 옷을 분류하는 일을 했다.

견디기 힘든 생활고와의 싸움은 점차 김 씨를 벼랑끝으로 몰아냈다. 술 없이는 하루하루 견딜 수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한 번은 죽을 결심을 하고 사라졌다.

아내 신 씨는 불안했다. 최악의 선택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돼 실종신고를 해서 남편을 찾았다. 뜻밖에도 남편은 충남 보령경찰서에 있었다. 현금서비스를 받아 술집에서 술을 혼자 먹던 중 폭행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잡혔던 것이다.

집행유예 상태였던 김 씨에게 곧장 실형이 선고됐다. 폭행죄가 적용돼 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고 2016년 3월 출소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사측의 복직 약속 때문이었다.

2015년 12월, 사측은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믿음은 더 큰 고통을 불러왔다. 회사는 해고자들을 면접한 후 선별적으로 골라 뽑았다.

그렇게 복직된 해고자는 지금까지 45명. 전원 복직을 하기로 약속한 기한이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복직을 원하는 해고자 119명이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해고자 119명
여전히 길거리 농성 중,
복직 약속 ‘1년’ 지나다

경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씻어지지 않는 상처가 됐다. 죽을 각오를 하고 가족과 연락을 두절한 채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감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들에게 만연했다.

쌍용자동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은 “그럼에도 회사가 해고자 복직 시기라도 알려줬다면, 두 아들의 아버지인 김주중 조합원은 목숨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공간 <와락>이 존재해도, 해고자 가족들에게 이따금씩 밀려오는 고립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 때문에 <와락>을 만들었는데, 또 다시 이런 사건이 터져서 개인적으로 무기력함을 느끼는데요.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회사가 약속을 지키는 거죠. 복직이요.

–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료공간 <와락> 권지영 대표

김 씨는 죽어서
다시 쌍용자동차
작업복을 입었다

서울 대한문 앞에 차려진 빈소에 활짝 웃고 있는 김 씨 그림이 걸렸다. 그토록 다시 입고 싶었던, 왼쪽 가슴에 ‘쌍용자동차’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 작업복을 김 씨는 입고 있었다.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 이후 정리해고된 노동자와 그 가족 가운데 지금까지 숨진 사람은 서른 명이다.

서울 중구 대한문에 차려진 김주중 씨의 분향소 모습.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치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용성

양승태 대법원, 2심 뒤집으며 “정리해고 유효하다”

“아직도 남편 휴대전화를 없애지 않으셨네요?”

아내 신상진 씨는 인터뷰 내내 시끄럽게 울렸던 휴대전화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그건 신 씨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 김주중 씨 거였다. 신 씨는 남편 휴대전화를 없애면, 남편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굳이 없애지 않았다고 했다.

‘과연 무슨 메시지가 그렇게 오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허락을 받고 김 씨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문자메시지 창은 온통 알 수 없는 복잡한 표로 도배돼 있었다.

김 씨가 일했던 화장품 배송업체가 보내는 일정표였다. 단체 메시지 창을 통해 공유되는 업무 지시가 김 씨 휴대전화에 계속 도착했다.

신 씨는 남편의 마지막 문자도 보여줬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고맙다’와 ‘미안하다’였다. 어머니와 누나에게는 “못난 자식, 못난 동생 만나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했고,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항상 신경써 줘서 고마웠다, 신세만 지고 간다”고 했다.

순간 눈시울을 붉히게 한 건 김 씨의 최근 통화내역이었다. 070으로 시작하는 대출 권유 전화가 통화내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상을 떠났지만
김 씨를 계속 찾는 이들은
대부업체였다

신상진 씨. ⓒ주용성

“신 선생님.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오랜 대화 끝에 본론에 들어갔다. 지난 5월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금요일 늦은 밤 3차 조사 결과를 내놓았는데, 그 안에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쌍용자동차 부당해고 재판을 두고 청와대와 거래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고 전했다.

쌍용자동차와 관련된 내용은 2015년 7월 31일에 작성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에 등장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상고 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에게 정성(?)을 들이는 중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판결 사례를 모아, 박 전 대통령에게 자랑했다. ‘우리가 이만큼 청와대에 협조했으니, 상고법원을 만드는 데 협조해 달라’는 식이었다.

실제로 쌍용자동차
해고 무효 소송은 판결이
나올 때마다 논란이 됐다

1심에서는 회사가 이겼다. 2012년 1월, 1심 재판부는 “쌍용차는 당시 비용 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해고를 단행할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다”며 사측 손을 들어줬다.

반대로 2심에서는 회사가 졌다. 2014년 2월, 2심 재판부는 “정리해고에 긴박한 필요나 유동성 위기는 인정되지만 재무 건전성 위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불분명하다”면서, “쌍용차가 해고회피 노력은 했지만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항소심 판단을 뒤집었다. 2014년 11월, 대법원은 1심과 똑같은 이유를 들면서 사건을 파기해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판결은
회사 쪽 주장만
받아들인 결과였다

대법원은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의 적정 규모는 경영자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사후에 노사대타협으로 해고인원이 축소됐다는 사정만으로 사측이 제시한 인원 감축 규모가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은 예상대로 대법원의 판결을 따라갔다.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명박 전 대통령 내곡동 사저 특검을 지낸 변호사들이 무료변론을 하며 도왔지만 2016년 5월, 2심 재판부는 2년 3개월 만에 태도를 완전히 바꿔 사측의 논리를 수긍했다.

실낱 같은 희망으로 2016년 9월, 해고자들은 대법원에 재상고를 하지만 대법원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다시 거리로 향했다

서울 중구 대한문에 차려진 김주중 씨의 분향소에 열린 추모제 모습. ⓒ 주용성

보수 단체, 김 씨 죽음에 “시체 팔이, 종북 빨갱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쌍용자동차 해고가 타당하다’고 쓴 재판 거래 문건 보셨어요?”

“그런 얘기는 들은 것 같아요.”

“사법부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게 노력했다면서, 해고 무효 소송에서 쌍용자동차 사측이 이기게 도와줬다고 말했다는데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죄송해요. 제가 그 내용을 잘 모릅니다.”

김주중 씨 가족의 지난 25년 간의 과거를 듣고, 이제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신 씨의 생각을 물으려던 차에 순간 목이 잠겼다. 당연히 ‘신 씨가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서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해서도 잘 알리라’ 확신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코 앞의 가난을 치우면, 다음 가난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남편 죽음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정치적 의혹은 신 씨에게 먼 얘기였다. 정리해고 후 10년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의 가난은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빚은 늘고, 가족들은 점차 멀어졌다. 외로워졌다. 사람이 죽었다. 그 이상은 손에 잡히지 않는 거창한 얘기들이었다.

“혹시 그럼, 박보영 대법관이라고 아세요?”

“그 분은 누구세요?”

“문제의 판결을 내린 대법관이예요.”

인터뷰를 하러 고 김주중 씨의 아내 신상진 씨를 찾아간 날, <중앙일보>에서는 박보영 전 대법관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제목은 ‘‘전관 꽃길’ 사양하고 시골판사 택한 박보영 前대법관’이었다. “지난 1월 퇴임한 박 전 대법관이 대형 로펌이 아닌, 서민의 애환이 담긴 생활 법정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면서 박 전 대법관을 “법조계에 뿌리 깊은 전관예우 관행을 극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신상진 씨. ⓒ주용성

김주중 씨는
과연 누가 죽였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6년 임기를 모두 채우고 아무 탈 없이 사법부를 떠났다.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가 타당하다고 판결을 내린 박보영 전 대법관은 ‘서민의 애환을 챙기는 판사’라는 칭송을 받으며 여전히 판사봉을 쥐고 있다.

김주중 씨는 보수 단체로부터 ‘시체 팔이’, ‘종북 빨갱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지막 길을 갔다. 수천 만 원의 빚을 남기고 떠나 미안하다며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가  남편을 많이 아꼈어요. 주중 씨 낳았을 때 당신께서 젖을 제대로 못 물리는 바람에 체구가 작은 것 같다고 하세요.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받아 들이기가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지금까지 세상을 등진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은 30명.

이 죽음의 숫자는
여기서 멈출 수 있을까

서울 중구 대한문에 차려진 김주중 씨의 분향소 모습. ⓒ 주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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