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첫 번째 구술자는 인화학교 졸업생 강복원. 그는 1960년 광주 출생으로, 5살 때부터 중학교 시절까지 인화학교(당시 전남농아학교)에 다녔다. ‘도가니 사건’이 알려지자 인화학교 총동문회장의 자격으로 대책위에 결합해 동문의 참여를 독려하고, 피해자 지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저도 처음에는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몰랐어요. 그때 당시에 광주에 살고 있었지만 잠깐 완도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2004년도에는 영상 전화가 없을 때였어요. 갑자기 황희정 농인한테 ‘농아학교에 성폭력 사건이 생긴 것 같다.’라고 문자가 왔어요. 그때 정확한 증거나 뭐도 없이 갑자기 그런 문자를 하나 받았어요. 저는 문자를 받고 광주로 다시 왔어요.

2004년도에 성폭력 사건 문자를 보냈던 농인은, 조점래, 황희정 등 동문 서너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조점래 씨나 황희정 씨 등 인화학교를 졸업한 동문끼리는 평상시에도 서로 연락하고 소통이 계속 있었어요. 황희정 씨 아들이 인화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황희정 씨가 처음에 아들 학교 문제 때문에 아들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며칠 후에 저한테 연락했고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그때 당시에 인화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후배들도 만났는데 2004년도에 황희정 씨 아들하고 다른 남학생 한 명을 오라고 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이 증거가 없고 말로만 들었어요. 그때 남학생들 이야기로는 그 여학생이 어느 날 아침에 학교에서 울고 있길래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피해를 봤다.” 이렇게 말했다고 들었어요.

학교 찾아가서 학교장 만나서 항의도 했고, 또 광주○○○협회 이사들한테도 이야기했고요. 동문들한테도 알렸어요. 2004년도 당시에 제가 임시 동문회장 대행을 맡고 있었고, 2005년도에 정식으로 동문회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문에게 알려지게 됐죠.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2004년도에 처음 그 사건이 생겼다고 했을 때, 농인 네 사람 정도가 학교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교장한테 따졌는데 교장은 “그런 적 없다.”라고 발뺌했습니다. 그 후에도 2004년도에 인화학교를 대여섯 번 정도 찾아가서 학교장한테 따졌는데 학교장은 계속 그런 적 없다고 외면했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광주에 있을 때 광주○○○협회 이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인들하고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는데 진짜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들 “증거가 없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피해자라고 하는 여자를 불러서 진짜 성폭력이 있었는지 물어봐야 할 거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피해자 여학생 한 명을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 성폭력 사실이 있었냐?”물었더니 학교장이 가해자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여학생과 성폭력 사실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이게 성폭력이 맞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협회 이사회에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학교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개입해야 하지 않냐?”라고 말을 했죠. 그런데 광주○○○협회 이사들이 “증거가 없지 않냐?”라고 하면서 제가 건의한 의견을 무시해 버렸어요.

그랬는데 다음 해인 2005년도에 이 사건이 제대로 터져서 국가인권위원회라든지 여러 단체가 같이 대응하면서 연락이 다시 왔어요. 그래서 그때 제대로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이 사건은 2004년 광주○○○협회에서 무시된 이후 2005년도에 제대로 사건화가 되었고, 이후 저도 2005년도부터 그 사건에 매달려서 계속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도에는 인화원에서 생활재활교사로 일했던 전응섭 씨가 처음으로 외부에 이야기하게 됐어요. 개인 이름으로 이야기하면 해고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돼서 동문회 이름으로 외부에 이야기했어요. 그때 당시에 전응섭 씨를 통해 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에 신고했던 거 같아요.

2005년도에 처음 이 사건을 들었을 때는 공○○ 수어통역사와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가 당시 가해자 남자들과 피해자를 분리해서 피해자들만 따로 이야기했고 저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도 돼서 사회에 알려지면서 김용목 목사님을 포함해서 실로암사람들, 참교육학부모회라든지 다른 단체들까지 합세하여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학교를 찾아가지 않았고, 그때 전응섭 선생님이 인화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여학생을 데리고 나와달라고 해서 밖에서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또 인화원에 박○○이라고 농인 선생이 한 명 있었어요. 농인 생활재활교사인 두 사람한테 이야기해서 데리고 나오라고 하니까 박○○ 씨는 안 된다고 해서 전응섭 선생님이 데리고 나왔어요. 그래서 상무지구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광주○○○협회 최○○ 회장, 김○○ 이사에게 이야기해서 수어통역사를 부르려고 했는데 광주○○○협회에서 공○○ 수어통역사에게 수어통역을 하지 못하게 막았어요. 광주○○○협회는 증거가 없다며, 그 사건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 수어통역사가 못 오게 되니까 불렀던 통역사가 김창호 통역사입니다.

광주○○○협회는 증거가 없다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 ⓒpixabay

대책위는 참교육학부모회와 실로암사람들,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등이 초기에 참여했고 인화학교 총동문회가 결합해서 모든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농인 동문 같은 경우는 주로 전응섭 씨하고 연락해서 피해자 학생들을 찾고 몰래 데리고 나오게끔 연락하는 일을 했습니다.

저와 동문은 그때 천막 농성이나 시위에도 참여했습니다. 광산구청에서 천막 농성을 굉장히 오랫동안 했습니다. 광산구청 앞 천막 농성을 242일 동안 했던 것 같고요. 또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도 2박 3일 동안, 비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삭발까지 하면서 농성했습니다.

저도 그때 두 번 삭발했던 것 같아요. 대책위에서 광산구나 정부에 요구한 것은 농아학교 학교장, 사건에 가담한 학교 교사들을 해고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청이나 시청 사회복지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안 해서 저희가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교육청에도 천막을 쳤고 학교 가기를 거부한 인화학교 학생들이 거기서 공부했어요. 천막 교육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문장이라든지 단어라든지 이런 것들을 생각 외로 뜻을 잘 모르는 거예요. 학생들의 문장력이 형편없어서, 그때 당시에 두 분 모두 농인인 이용보 목사님과 노지현 전도사가 애들 교육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화가 났던 게 “이런 성폭력이 만연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얘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는데 왜 월급을 주고 있냐, 이런 문제가 되는 사람들을 해고해라.” 이렇게 요구했는데도 당시에 우리 요구가 수용이 안 돼서 계속 다퉜던 기억이 납니다.

참교육학부모회 윤민자 선생님이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그분이 제일 기억에 남고요. 또 대책위 김용목 목사님, 박찬동 선생님 이렇게 세 사람이 제일 도와줬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도가니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중에 제일 많이 고생한 사람은 제가 생각할 때는 김용목 대표님인 것 같아요.

오히려 광주○○○협회에서 방해를 많이 했어요. 광주○○○협회 이사들이 굉장히 방해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상당히 갈등이 많이 생겼어요. 2006년도인가 제가 김○○ 씨를 카페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학교장하고 여자 박○○ 선생하고 두 사람이 저한테 와서 빌면서 부탁한 적이 있었어요. “성폭력 사건에서 저 좀 빼주세요.”라고 하면서요. 그러면서 돈 봉투를 준비해 왔길래 제가 쫓아버렸어요. 제가 만약에 그 돈 봉투를 받았다면 뭐가 되겠어요. 그때 당시에 저도 인화학교 총동문회장으로서 대책위에 결합해서 일하고 있었는데요. 그 돈이 얼마였는지 열어보지도 않았고요.

가해자인 학교장은 강복원 씨를 찾아와 “성폭력 사건에서 빼달라”면서 돈 봉투를 건넸다. ⓒ셜록

김○○ 광주○○○협회 이사, 인화학교 이○○ 교장, 박○○ 교사, 이 세 사람은 이미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맞춰진 상태였던 것 같아요. 철저히 법인 편이었고, 그 사람들이 사건을 은폐하는 데 한몫을 한 거죠. 박○○ 교사는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나 관련자는 아니었지만, 법인 편에 서 있었죠.

서울에 있는 소설가 공지영 선생님이 광주에 와서 대책위하고 상담도 하고 회의도 하고 이러면서《도가니》소설을 쓰셨잖아요. 그러면서 선생님이 피해자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또 그 이후에 피해자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상담, 교육, 치료 프로그램을 대책위에서 주관했어요.

그때 당시에 피해자 학생들이 가해자 선생님들하고 함께 있으니까 학교 기숙사가 너무 위험하고 인화원에서 생활하는 게 무섭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대책위에서 고민하다가 만든 게 실로암사람들의 ‘카페홀더’였어요. (편집자주-‘사단법인 실로암사람들 카페홀더’는 광주 인화학교 졸업생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제일 먼저 여학생 그룹홈을 만들고 그다음에 남학생 그룹홈도 만들었어요. 여학생 그룹홈은 A선생님이 지도했었고, 남학생 그룹홈은 B선생님이 몇 년 지도했어요. 지도자 조건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수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요.

여학생 그룹홈은 아마 2006년도에 만들어졌을 거예요. 그다음 2007년도에 남학생 그룹홈이 생겼고, 지금도 있어요. 근데 여학생 그룹홈은 지금은 대상자가 농인은 1명인가 밖에 없고 지적장애인으로 많이 바뀌었고, 남학생 그룹홈은 지금도 농인들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아주 어린 후배였던 애들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죠. 그룹홈 거주 기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본인이 원하면 계속 살 수 있고 독립을 원하면 독립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요.

재판 때 피해 여학생의 통역을 여자 통역사가 맡았는데 제가 내용을 봤을 때 너무 맞지 않게 통역을 하는 것 같았어요. 또 여학생에게 교장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계속 반복적으로 물어봐서 여학생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 재판정에서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통역이 엉터리다.”라고 완전히 화를 낸 적이 있었어요. 재판정에서 그렇게 소란스럽게 하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한 번 그렇게 큰 소리를 내고 재판 진행을 방해한 적이 있어요.

원래는 재판정에서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또 너무 중요한 재판이기도 하고, 제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 너무 다르게 통역이 되다 보니까 화를 참지 못한 거죠. 그 이후로 광주가 아닌 전북 지역의 수어통역사를 요청해서 1심 재판을 진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예전에 공지영 작가라든지 <도가니> 영화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영화가 100% 실화가 아니고 약간의 허구들이 섞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영화를 봤을 때, 아픈 사건이었기 때문에 영화가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그리고 100% 사실대로만 영화를 만들어버리면 문제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약간의 허구가 좀 섞이는 것들에 대해서 이해는 했어요. 그래도 그 영화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도가니 사건’이 공론화가 되고 해서, ‘참 다행이다. 이게 참 좋은 예가 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은 하게 됐어요.

인화학교가 폐쇄됐을 때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는 조금 후회가 됐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가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때 당시 선우학교가 인화학교 대신으로 생기기는 했는데, 선우학교는 지적장애인과 같이 있어서 온전한 농학교가 아니다 보니까요. 못된 선생님들만 다 없애고 ‘학교는 그대로 유지를 했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게 안타까워요. 이제 우리 학교가 사라져버렸다고 농인 동문이 불평했을 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 인화학교가 없어진 부지에 인권기념관이라든지 장애인 수련시설이 설립된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개인적으로는 농학교가 없어졌으니까 그게 그렇게 달갑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도가니 사건’ 인권기념관이 생겨서 자료들이 조금 남게 된다니까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기는 해요.

‘도가니 사건’의 경험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근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학교가 없어졌다는 거에 대해서 아쉬움이나 고민이 남아 있는 거죠. 정말 못된 사람들만 내쫓고 해서, 새롭게 물갈이가 되고, 학교는 유지가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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