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일곱 번째 구술자는 홍은아 당시 인화학교 학부모다. 홍 씨는 1966년 부산 출생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큰아들이 인화학교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면서 학교와 인연을 맺게 됐다. 도가니 사건이 터지자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를 꾸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동안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큰아들과 함께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에 청각장애인 특수학교는 인화학교밖에 없어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어요. 큰아들 영훈이는 일반 학교에 다니다 청각장애인만 다니는 특수학교에 다니게 되어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했지만, 저는 안도감에 마음이 편하고 좋았어요. 영훈이 입학 당시에 인화학교 고등반 학생 수는 한 학년에 10여 명 정도였지만, 광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각장애인 수가 적어서 이 정도의 학생 수도 많은 거였어요. 그래서인지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학생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인화학교 모든 선생님이 수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농학교 선생님이 수어를 못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저는 일반 학교에서 하도 주눅 들어 살다 보니 인화학교 선생님에게도 주눅 들어서 선생님 자격이 되나?’라는 생각보다 우리 아이 잘 부탁합니다.”라면서 정말 이런 아이를 보살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라는 마음밖에 없었죠.

당시에 인화학교는 거의 다 부모 없는 애들이 많았어요. 이들은 기숙사로 활용된 인화원에서 거주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인화원에서 생활하는 애들은 전체의 절반이나 되었어요. 설령 부모가 있더라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애들을 보살피지 못했어요. 당연히 학교에 관심을 가진 부모들은 거의 없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보니 인화원에서 도가니 사건과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죠.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을 제대로 가졌더라면 그런 일이 있었겠어요. 어떻게 보면 인화원생 모두가 피해자인 거죠.

큰애가 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한 아이의 엄마가 저한테 전화해서우리 딸 친구가 성폭행당했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그래, 그럼 한 번 모여서 논의하자라고 제안해서 저의 집에서 몇 명이 모이게 되었죠. 모여서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무서웠어요. 

홍은아 씨는 다른 학부모를 통해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을 전해 듣고, 교육시민단체 ‘참교육학부모회’에 알렸다 ⓒ셜록

저는 바로 참교육학부모회에 인화원 성폭행 사실을 알렸어요. 그 당시에 영훈이 때문에 학교가 아이들에게 급식 배급을 잘하는지 점검하기 위해 여러 학교에 찾아다녔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참교육학부모회 사람들을 좀 알았거든요. 우리는 이분들 덕분에 시민단체하고 연결이 됐어요

도가니 사건은 성폭행 피해 학생이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소장에게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상담하면서 외부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알기로는, ‘도가니 사건의 최초 제보자는 전응섭 선생님이 아니라 저에게 인화원 성폭행 사실을 알려준 학부모였어요.

처음에 우리가 상담소에 인화원의 만행을 알렸는데, 소장은 아이의 안전과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인화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말했어요. 인화원은 외진 곳에 있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어요. 소장님하고 전응섭 선생님이 이 일에 나섰어요. 이들은 인화원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마치 첩보 작전처럼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그 아이는 행정실장으로부터 성폭행당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 도가니≫(공지영, 창비, 2009)와 영화 내용은 그 아이의 진술에 비하면 오히려 빙산의 일각이에요. 저는 아이의 충격적인 피해 사실을 들으면서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가 나중에는 상실감이 오더라고요. 이야기 내용이 너무 충격이어서 마치 몸과 영혼이 마비되는 것 같았고 내가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피해 학생의 진술 내용은 우리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영화에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성폭행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당시에 인화학교에 다녔던 동문 선배들도 나도 이랬다”, “나도 이랬다.”라고 우리에게 제보했어요. 그때 학교법인 이사장의 큰아들인 교장과 둘째 아들인 행정실장은 저녁에 학생을 교장실로 데려와서 손을 묶고 성폭행했고, 화가였던 셋째 아들은 학생의 옷을 벗기고 누드 그림을 그렸대요. 그리고 더 심한 것은 인화원에서 죽은 애들을 어디에다가 묻었다는 증언도 나왔어요.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렇게 들었어요. 

나중에는 진짜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어요.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많은 선생님이 하나같이 알고 있었는데도 사립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자신의 생계 때문에 진실을 말 하고 다들 쉬쉬하며 입 다물고 있었어요.

나중에 선생님들이 찾아와서 진실을 말할 때는 고맙기도 했지만자기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면서 자신이 직접 나서지 못하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을 원망했어요. 성폭행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 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이게 정말 학교인가? 내가 아이를 학교가 아니라 어디에다가 보낸 거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 전에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하루아침에 괴물로 보이면서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어요. 

홍은아 씨가 들은 인화학교 학생의 성폭행 피해는 영화나 책에서 묘사된 것은 “빙산의 일각”일 정도로 심각했다 ⓒpixabay

성폭행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선생님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수습하기에 급급했어요. 우리는 그게 더 괘씸했어요. 조수경 선생님이나 윤창선 선생님 같은 의식 있는 분들은 우리를 만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학교의 문제점에 관해서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물론 자기 생활 터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겠죠.

그들은 우리 학부모랑 진실을 밝히려는 선생님과 많이 싸웠고, 애들을 선동하고 회유했어요. 그게 웃긴 게요. 그들이 회유하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요. 예를 들어 수어를 제대로 하는 선생님들이 애들을 무시하면, 애들도 선생님의 수어 실력을 비판하며 오히려 자기네끼리 뭉쳐요. 

저의 아들이 인화학교 고등학교 3학년 회장을 맡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대책위에 결합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졸업하자 대책위에서 활동할 구실이 없던 차에 윤민자 씨가 대책위 사무국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아마 한 4년 정도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저 말고도 청아 엄마, 지혜 엄마도 함께 활동했어요. 자기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함께 대책위에 결합했죠.

대책위에는 윤민자 집행위원장님, 광주여성민우회 나인형 선생님, 최초로 성폭행 피해자 ●●를 면담하신 오명란 소장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 안재철 선생님, 광주농아인협회 회장이었던 강복원 선생님, 실로암사람들김용목 대표님, 학부모 대표 등이 참여했어요. 그분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시위할지, 법적 대응을 어떻게 할지 등을 같이 논의했어요.

당시에 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기독교에서는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너무 마음이 불편했지만, 성폭행 가해자들은 신앙적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신앙인으로서 타인을 미워한다는 게 또한 제 마음을 아프게 해서 4년 정도 활동하다가 윤민자 씨에게 저의 고민을 말하고 대책위 활동을 그만두었어요. 

제가 활동할 당시에는 소설 도가니≫가 아직 나오기 전이었어요. 도가니 사건이 세상이 알려지기 전에는 대책위 활동이 너무 힘들었고 진실 규명이 곳곳에서 막혀나 진짜 그만하고 싶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날이 많았어요. 집에 들어가서는 남편 눈치 보지, 애들 엉망이지, 집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지치더라고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그렇다고 일이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도 아니었어요. 인화학교를 수사하던 남부경찰서는 우리에게 자꾸 안 된다는 말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맨날 남부경찰서 쫓아가서 경찰하고 싸웠어요. 그때 사무국장이었던 제가 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면, 경찰들이 사무실로 와서 집회에 대해서 다른 말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악이 받쳐서 많이 싸우면서사람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진짜 이래서 노동 운동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어요.

또 서울 올라가서 집회도 몇 번 했어요. 성폭행 진실 규명을 위한 삼보일배도 참여했고요. 상경 투쟁도 여러 번 했죠. 구청, 시청에서 천막 농성도 했어요. 아마도 구청에서 천막 농성한 것은 최장기간으로 알고 있어요.

그랬어도 광산구청이나 시청의 반응은 묵묵부답이었어요. 언론이 도가니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면 그때야 조금 움직이는 척 면담 한 번 받아줄까, 다른 때는 천막 치고 맨날 면담을 요청해도 안 해줬어요. 우리가 막 밀고 들어가면 그때야 움직이는 척 시늉하고요. 딱 한 번 당시 박광태 광주광역시장하고 면담했어요. 박 시장은알아보겠다. 우리는 법적으로 어떻게 방법이 없다. 그걸 어떻게 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라는 원론적인 말만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어떤 날은 차를 타고 가다 김용목 대표님 말씀에 울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내 아들이 살아갈 세상이 이렇구나.’ 되뇌며 아이가 맞닥뜨릴 미래를 생각하며 울었어요. 이렇게 장애인의 고통을 날마다 너무 절실히 느끼고 살았어요. 

반면에 윤민자 대책위원장님은 자녀가 인화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열심히 활동했어요. 당시에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이었는데, 대책위에 결합하면서 김용목 대표님하고 공동 위원장을 맡았어요. 그분의 열정과 헌신은 농인들이 알아야 해요. 그런 사람 없을 거예요.

인화학교 진상규명을 위해 정순임 씨하고 공동으로 삭발식도 했고, 농인들이 오면 밥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후원도 했고, 다른 기관에 후원을 요청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누군가가 농성 천막을 철거할지 몰라서 항상 밤을 새워야 했고, 7~8 그 뜨거운 여름에 천막을 지키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했는데, 정말 경제적으로 팍팍했어요. 그 와중에도 윤민자 위원장님은 인화원 사건 해결을 위해 사회복지법을 공부했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저는 사방이 꽉꽉 막히고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아서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서나 내일은 안 가야지.’ 그랬다가 윤민자 선생님 혼자 고생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힘을 내 나가서 막 일을 하곤 했어요. 하도 힘드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했어요. 정말 시민단체 분들은 자기의 신념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었어요. 학부모라는 입장에서 참여했는데, 억울하고 분함만으로 일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활동이 생소했어요.

윤민자 선생님을 보면 짠하기도 하고, ‘자기하고 관련 없는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 아이 일인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4년 동안 활동했던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저는 하다가 그만했을 것 같아요. 이게 정말 뭐가 풀려야 사람이 보람도 있고 그러는데 날마다 나가면 싸우고 욕먹고 서로 미워하는 게 저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힘들더라고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이제는 사회가 농인을 좀 품으면 좋겠어요. 관공서 어디를 가더라도 간단한 수어 정도는 하는 분이 계시거나 농인 학생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통역사가 동행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농인이 잘 살아갈 수 있죠. 

저는 아들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어디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야무지게 떡하니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해요. 걱정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는데, 세상은 너무 조심스러운 데가 많으니까 그냥 안전하게 아이를 내놓고 키울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만약 저에게 어떤 세상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세상이 편견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도가니 사건 전에는 농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을 청인하고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도가니 사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어요. 대책위에서 일하던 어느 날 농인 부부가 천막으로 찾아왔는데, 그 부부가 너무 행복하게 보였어요. 그걸 보면서내 아들도 저렇게 행복하면 되겠다. 자기들끼리만 저렇게 행복하다면 농인이라도 괜찮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농인은 불쌍하다는 생각, 짠하다는 생각같은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들하고 가게에서 일하다가 손님들한테제 아들이 청각장애인인데 빵을 만들어요.”라고 말하면 손님들은 그때부터 아들을 불쌍하게 쳐다봐요. 근데 아들이 그 눈빛을 보면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지겠어요. 그래서 비장애인들이 그런 눈으로 좀 안 봤으면, 그냥 똑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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