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여섯 번째 구술자는 윤민자 당시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 집행위원장이다. 윤 씨는 1972년 출생으로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학부모와 인화학교 성폭행 상담 이후,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를 만들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도가니 사건’ 진상규명에 앞장섰다. 이후 2009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현재 회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참교육학부모회’에서 학부모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주로 촌지나 학교 비리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학부모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인화학교 학부모 세 분이 상담하러 오셨어요. 그분들이 ‘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라든가 다른 곳을 먼저 상담을 다녀오셨어요. 그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하게 이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죠.

당시 상담한 내용이 시청으로 이야기가 바로 들어가 시청에서 인화학교로 연락이 갔는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건이 오히려 덮어지거나 아니면 아주 축소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문제는 좀 더 외부에서 더 많은 협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것이 여러 가지가 복합된 사건인 거잖아요. 여성 문제, 교육 문제, 장애인 문제.

완전히 고립된 곳에서 이렇게 축약돼서 집중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를 처음 단순하게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싶었어요. 물론 성폭력 문제가 아주 큰 문제이고 학교에서 일어난 심각한 인권 유린 문제이지만 그것이 특성상 장애가 있었고,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장애인 활동가들이라든가 단체, 기관들끼리는 알기 때문에 광주 장애인 사회에서 한계가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좀 더 오픈하고 확장해서 지켜보자고 해서, ‘참교육학부모회’에서 제가 이 문제를 각 단체에 연락하고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를 구성했어요. 그렇게 된 게 이 사건의 시작이죠. 사건의 특성상 그 당시 광주 사회 시민단체에 모두 다 오픈하기보다는 ‘여성, 교육, 장애 문제가 결합된 이 사건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단체가 가장 필요할까?’ 고민했죠.

그렇다고 하면은 여성, 장애, 교육 문제를 다루는 각 분야가 이미 있으니 여성단체로서 ‘여성민우회’, ‘여성의전화’에 연락하여 참여시켰죠. 그다음에 장애인단체들, 그리고 이 문제의 목소리를 직접 내지 못하지만,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농인 당사자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교육 문제는 저희 ‘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가 있었고요. 다음에 장애인단체로 ‘실로암사람들’, ‘여성장애인연대’가 참여해 대책위를 구성했어요. 각자가 가진 전문성이 있었잖아요.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 같은 교육단체들에서 담당하고, 여성 인권 문제해결은 여성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법적 지원이라든가 노하우가 있고요. 장애인단체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개인들의 장애인 인권 문제라든가 장애인들의 어떤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성명서 낼 때 처음에는 다 참여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성폭력이라고 하는 사건이 가지고 있는 프라이빗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오픈해야 하고, 많은 단체가 연대체를 꾸려야 할 필요성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각자 좀 더 전문화되고 특화된 단체들이 3단체(여성단체, 교육단체, 장애인단체)가 있어서 일단은 그렇게 꾸려보고자 했죠.

인화학교 동문회의 참여는, 처음에는 동문회 안에서도 법인과 친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는데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원칙에는 누구나 동의했어요. 제가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인화학교 동문회는 나중에 연대를 요청했어요. 저도 살짝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이 싸움이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기에 이분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면 긴 싸움을 이어가는 데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참여를 했을 것 같아요.

특히나 장애인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논쟁거리 중의 하나가 ‘당사자주의’라는 게 있거든요. 당사자주의에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다면 힘이 되죠.

인화학교 학부모는 세 분이 인화학교 학부모회 임원이셨어요. 학부모회 회장님, 총무님, 부회장님. 그래서 인화학교 학부모회 이름으로 들어오셨어요.

어떻게 실천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전략과 전술을 그렇게 디테일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일단은 사무국을 ‘참교육학부모회’에서 맡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것은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경찰 조사가 이루어지게 하는 거였어요. 당시에 이미 2차 가해가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요.

예를 들어 선배들이 당사자들을 만나서 입단속을 한다든가, 아니면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하게 하고 그것을 녹화했어요. 그래서 이러한 2차 가해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면 조금 시급했죠.

보통 성폭력 문제는 공개적으로 안 해야 하는데 일부라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오픈했던 이유는 당시 상황으로 경찰이 조사할 의지가 없었고, 학교는 은폐하고자 했고, 시청도 은폐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이것을 은폐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픈해야 했기에 교육청에서 기자회견하고 한 거죠.

물론 교육 문제로 우리가 접근하고 해야 하지만 시급한 건 성폭력 문제였기에 처음에 갔던 상담 기관이 ‘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였어요. 성폭력상담소가 피해자들하고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성폭력 사건 지원을 하기로 했죠.

활동 내용과 관련해서는 기억할 이야기들이 많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상상력이 부족한 투쟁 방식들이었어요. 처음에 우리가 활동을 잘하지는 못했어요. 성폭력 문제에 일단 좀 집중하자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기소할 때 검찰 기소장에 성폭력 피해 사실들이 상당히 빠져버린 거예요.

저는 그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요. 그래서 조금 더 세심하게 활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데, 처음에 시작할 때 사건 전개가 더디었던 것은 경찰이 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경찰이 수사하게 할 것인가가 가장 급했기 때문에 경찰청을 방문하기도 하고, 항의서를 썼는데도 경찰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요.

카메라 자료사진
“계속 수사가 지지부진했는데 ‘PD수첩’ 팀이 와서 수사하고 방영하니까 그게 바로 효과가 오더라고요” ⓒpixabay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언론이죠. 언론에 사건의 개요를 간단히 적어서 제보했어요. 제보했는데 마침 연락 온 곳이 ‘PD수첩’이었어요. 또 당시에는 ‘PD수첩’이 집중 취재 탐사 보도를 하고 있었어요.

성폭력 부분에 있어서 정말 제가 많이 무지하기도 했지만, 최대한 디테일한 부분은 알고 싶지 않았어요.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게 당사자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런 부분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죠.

2차 가해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인화원에서 생활시설로 옮기는 과정이 있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수사가 지지부진했는데 ‘PD수첩’ 팀이 와서 수사하고 방영하니까 그게 바로 효과가 오더라고요. 그렇게 한 번 나가니까 후속으로 지역 방송에서 보도하고, 그것 때문에 다시 학교나 경찰청에 수사 결과 진행 상황은 어떠냐고 묻게 되니까 그때야 조금 움직이더라고요.

경찰들이 수사했지만, 많이 축소했죠. 그러다 보니까 처음 피해자들이 진술했던 것들이 다 포함되지 않고 아주 일부만 보게 되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재판 상황에 대해서 경찰이나 검찰이 반응하는 것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찰 대응, 검찰 대응, 수사 상황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대책위 전체로 공유하고자 했죠. 그렇다면 이것을 보조할 목격자들이나 다른 피해자들을 우리가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도 들었고요.

피해자의 증언 확보도 필요하고, 이미 학생들은 그전에 많은 좌절을 겪은 상태인 거잖아요. 그전에 교사한테 말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말했지만, 아무것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거죠. 우연히 인화학교 학부모회 회장님 딸이 성폭행 얘기를 듣고 전달한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이 ‘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도 만나러 다니고, 우리한테도 오고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인화학교 학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그다음에 누군가에게 말할 사람이 없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일단 필요한 것은 그러한 피해자들에게 이제는 말해도 될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는 거였죠.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할 사람도 있다고 확신을 주는 게 필요했어요.

우리가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여론을 환기하는 거였고, 그러면서 인권위에 진정을 넣게 되고요. 국가인권위가 상당히 도움이 됐어요. 왜냐하면, 아주 전문적으로 어떤 시설에 대해 감사를 할 수 있었고, 따로 1대 1로 학생 전수 조사를 했거든요. 전체 피해 규모를 어느 정도나마 파악할 수가 있었고, 상당히 신빙성 있는 증언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국가인권위 조사 안에서 가해자가 몇 명 나오게 된 거죠.

‘국가인권위원회’는 일단 장애인시설을 감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당시 국가인권위가 관리 감독이 있는 광주시청, 광산구청 이렇게 두 군데에 감사하면서 그때 가해자들을 고발 조치하라고 권고했죠. 그렇게 됐기 때문에 상당히 엄청난 힘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나 아주 구체적인 피해 사례들을 우리가 확보할 수가 있었어요.

조사 과정에서 제가 놀란 것은 단순하게 성폭력 문제만이 아니었어요. 교육 문제의 심각성을 그전에도 알았지만, 저로서는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수어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이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놀랐어요. 또 놀랐던 것은 그 당시에 수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선생님이 있었어요. 성함은 생각이 안 나는데 학생들에게 “그 사람이 누군데? 뭘 가르쳤어?”라고 하니까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 거예요. “국어를 가르쳤다.”, “아니다. 미술일 거다.”, “사회일 거다.”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지조차도 몰랐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교육해달라고 국가에서 지원했던 곳에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죠. 그렇다면 청각장애 학생들을 잘 보살펴 주고 건강하게 사회인으로 기르고 보살펴 달라고 한 곳에서 보호하지 못한 것이죠. 오히려 성폭력이 일어나도록 방조했고, 보호하지 못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교육적인 문제에서도 우리가 단순하게 그 학교가 문제 많다고만 하기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교육적인 문제에서 수호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권고문을 내줌으로써 우리가 좀 더 힘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됐죠.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말씀드렸듯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인화원 시설에 대한 철저한 감시·감독을 요구했지만, 진전이 없었어요. 이 사건에 대한 지역사회 여론을 끊임없이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까 “천막 농성하자!” 그런 싸움이 쉽게 끝날 리가 없고, 천막 농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기 싫은 싸움이죠.

어쨌든 간에 좀 더 가시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리만의 최선일 것이라는 단체들의 결정에 따라서 광산구청에서 천막 농성을 하게 되었어요. 천막 농성의 목적은 광산구청이 법인을 정상적으로 관리·감독하고 학교 운영을 정상화하는 데 역할을 하라는 거였어요.

생활시설에 대한 관리·감독은 광산구청에 있었고, 학교에 대한 관리·감독은 교육청에 있었죠. 그 당시 교육청의 문제도 있었지만, 생활시설(인화원)에 대한 문제가 컸죠. 사회복지법인 ‘우석’에 대한 인·허가권은 시청에 있고, 시설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은 구청에 있어요. 그것 때문에 광산구청에서 시청 소관이니 여기서 천막 농성하지 말고 시청으로 가라고 그랬죠.

생활시설은 밀폐된 공간이잖아요. 특히나 인화학교를 가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에요. 그래서 그동안 문제들이 그렇게 묻혀 있을 수가 있었던 거죠. 그 법인과 시설의 문제에 대해 관리·감독을 하기 위해서는 이사회를 개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광산구청의 힘이 필요했죠. 하지만 구청은 하지 않으려고 해서 천막 농성을 하게 된 것이고요.

그러면서 아주 긴 싸움들이 이루어졌고, 장애인시설 문제는 장애인 생활시설이나 아니면 법인들과 관공서와의 약간 유대관계가 있었어요. 좋은 말로 하면 관계가 끈끈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예요. 그러다 보니까 싸움이 길어지게 됐고 전국에 있는 장애인 문제들과 연대하기도 하고, 이 문제를 광주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으로 더 확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서 삭발 농성도 하게 되고요.

왜 그런 걸 했냐면, 순전히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자해하는 것밖에 없는 거잖아요. 우리 말이 주변 여론의 집중을 받는 것은 그런 이벤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단식도 아마 한 3번 했을 것 같은데요. 단식하고 그다음에 구 도청에서부터 광산구청까지 삼보일배도 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싸움을 오래 끌고 가는 것이 버티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여론이 필요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여론을 조성하고, 현재 이 사건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고, 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까가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매주 수요일마다 문화제를 하기도 했어요.

마침, 이 장소가 광주전남 지역 농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기에 성인 농인들에 대한 교육도 한번 해보자 해서 성인 농인분들 모셔다가 성교육도 해보고, 그다음에 그분들에게 뭐할까 하면서 같이 기타 사회활동 같은 소소한 프로그램을 짰어요. 천막 농성장이 우리의 중심이었죠.

천막 농성장에 시민분들이나 여러 단체가 격려도 많이 오시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궁금해서 오시기도 하고, 마침 좋았던 게 광산구청이 역이랑 가까웠잖아요.

그런데 광산구청은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고 교육청에서는 ‘예산을 횡령했는가?’ 그런 식으로 접근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비리 내용을 보기 쉽게 적어놓고 밝혀놓고 그러지는 않죠. 그 당시에 제 기억이 맞다면 교육 예산만 한 13억을 지원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예산이 제대로 집행됐는가를 따졌을 때 우리 생각으로는 수어를 못 하는 교사들을 채용하고 그 교사들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 너무나 부당한데, 법인 측은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교사 자격증이 있는 조건에 맞게 교사를 채용해서 수업을 운영했다고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관료들과의 생각 차이가 있었고, 심각하게 교육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시교육청이 적극적으로 뭘 하는 일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벌어진 게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교육청 앞에 천막을 쳤어요. 애들이 거기로 오니까 천막 교실을 치고 우리가 교육프로그램을 넣었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수어통역사분들을 섭외할 수 있으니까 다른 프로그램 하시는 분들 오셔서 성교육하실 분들은 성교육도 하시고, 아니면 종이접기 같은 일반 레크리에이션을 했고요. 아니면 좀 더 교육적인 면에서 과학이라든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이루어졌어요. 인화학교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 수준도 천차만별이었죠. 그래서 자원봉사자분들이 간단한 교육 정도는 할 수 있도록 천막 교실을 운영했죠.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교육청 앞에 천막을 쳤어요. 애들이 거기로 오니까 천막 교실을 치고 우리가 교육프로그램을 넣었죠” ⓒpixabay

당시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교육청 교육감하고 학생들하고 면담 일정이 잡힌 거였어요. 그동안 인화학교 학생들이 선생님하고도 말을 안 했는데 소통이 차단되다가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가 조직이 되고 자기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전달이 되고, 교육감하고 면담이 잡히니까 너무나 좋았던 거예요.

자기들이 학교에서 겪었던 거, 아니면 학교가 좀 변화가 될 것 같은 순진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면담을 안 하고 오히려 교육청 문을 다 잠가버리더라고요. 그것이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와의 면담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뭘 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나 분통이 터지더라고요. 못 들어오게 교육청에서 문을 잠가버렸어요.

그 당시에 우리 행정가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죠. 너무나 억울해하고 하는데, 마침 퇴근 시간 됐다고 교육청 직원들 다 퇴근하고, 애들은 억울해서 막 동동거리고 있는데 교육감 퇴근해버리고 교육청 직원들은 퇴근한다고 차 빼고 있었어요.

너무나 억울하잖아요. 그 당시에 아마 비가 왔을 거예요. “우리가 못 가면 너희도 퇴근하지 마!” 그래서 문 앞에 그냥 드러누웠어요. 교육청 직원들이 “이게 뭐냐고, 왜 우리도 못 가게 하냐?” 사람들이 항의하죠. 그래서 “도대체 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퇴근하는 당신들은 교육자들이 맞냐!” 악을 써가면서 드러눕고 했는데 그래봤자 다 피하고 잘 가더라고요.

물론 이 제도가 가진 한계점 혹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 있겠지만 우리 어른들이 피해자 학생들을 대할 때 좀 더 진심 어린 방식,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대해주면 하는 마음이 있었죠. 이미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른 어른들이니까요. 그게 너무 억울했고 너무나 슬펐던 일입니다.

즐거웠던 일도 많죠. 성인인 농인들을 만나고 또 그 사람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분들이 저한테 와서 “이것 좀 도와달라. 저것 좀 도와달라.” 많았죠. 그것이 제가 어떤 일을 바꾸기보다는 그렇게 인간관계 맺음을 가진 거죠.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도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떤 한 좋은 어른, 좋은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했던 거, 또 그렇게 관계를 맺었던 것들이 기뻤던 일이죠.

글쎄요. 우리가 재판을 받고 그 가해자들이 아주 솜방망이 처벌이지만 그렇게라도 결론이 나와 줘서 기뻤죠. 이미 우리 대한민국에서 장애인 인권 운동이 수많은 패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작은 승리라도 있었다는 점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기뻤어요. 소소하게 기뻤던 일은 분명히 많았어요.

그다음에 기뻤던 보람이라고 한다면 인화학교 ‘도가니’ 영화가 나온 이후로 ‘성폭력법’, ‘사회복지법’이 좀 많이 바뀌었잖아요. ‘교육법’도 살짝 바뀌었을 거예요. 그런 것은 기뻤죠. 왜냐하면, 한 싸움이 그런 결과로 맺어지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도 그런 면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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