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다섯 번째 구술자는 박현정 당시 인화학교 교사다. 박 씨는 1969년 광주 출생으로 서울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전남대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했다. ‘도가니 사건’ 초기부터 대책위에 참여해 수집한 자료를 <PD수첩>에 넘겨주는 등 진상규명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현재 광주자연과학고에서 특수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인화학교는 1994년부터 2005년 2월 28일까지 근무했어요. 인화학교 관련한 기자회견이나 폭로가 된 거는 이 이후예요. 2005년 6월이요.

교사들 내부에서 이런 사건이 있다거나 인화학교가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 학교에서 가장 낮고 나이도 어린 교사였어요. 2005년이면 제가 35살쯤 될 때잖아요. 26살부터 35살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교사들은 한 번 근무하면 20년, 30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제가 경력이 가장 짧았어요. 어린 교사였기 때문에 학교 내부에서 도는 정보 자체를 들을 수 없었죠.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사립 특수학교는 족벌 경영이잖아요. 가족, 친척인 사람들과 그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급 정보를 갖고 있고, 나머지는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잘 모르죠. 제가 근무할 때 교감 같은 경우도 친인척이었어요. 또 여기 있는 근로시설 있잖아요. 인화학교, 인화원, 보호작업장. 보호작업장 원장도 친인척, 인화원 원장도 친인척이었어요.

인화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전체 회의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사장부터 시작해서 쫙 앉아 있잖아요. 근데 대부분 가족이 앉아 있으니 너무 떨리는 거예요. 그 압박감을 사립학교에 근무하지 않으면 잘 몰라요. 그리고 매번 말할 때 뭐라고 하냐면 “내 덕에 너희가 밥 먹고 살지” 그 논리가 상당히 있어요. ‘저 사람이 나를 채용해 줬지.’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목이 매여 있는 듯한 느낌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공립학교로 넘어온 이유 중 하나가 이 학교에서는 심리적으로 너무 힘드니까 50살 넘어서까지 근무하기 어렵겠다는 것들이 작용했죠.

채용할 때 금품을 요구하는 건 그 당시에 학교 전통적으로 다 있었어요. 법인의 잘못이기도 하고 그 당시에 풍토가 그랬던 것도 있었어요. 명절 때 인사하고, 선물을 안 하면 칠판에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스트레스죠. 그때 선물을 들고 찾아가면 차도 막히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있어요.

제가 융통성이 부족해서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면 티가 나는 스타일이에요. 그러니까 인사를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선생님들과는 서로 그런 고충을 이야기하죠. “명절 때 인사 가는 거 솔직히 힘들다.”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어른한테 인사해야지 뭐’ 그런 거요. 지금은 안 그러는데 옛날에는 그런 분위기도 팽배했던 것 같고요.

학교에서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선생님들이 이사장한테 돈을 모아서 줬어요. 명절 때 서로 인사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돈을 모아서 줬더니, 교직원 전체를 모아놓고 “다음부터 돈 주지 말아라. 개인적으로 와서 인사해라. 내가 거지냐? 돈을 모아서 주지 말고 개인적으로 와서 인사해라.” 그 사람 논리가 그랬어요. 그때 근무하면서 자괴감을 많이 느꼈죠.

인화학교에 근무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학생들이 아니라 관리자들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들과 생활하는 건 굉장히 편하고 좋았죠. 그 학교에서 근무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문화 풍토였어요.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학교 운영 이런 것들. 그래서 도저히 근무를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인화학교에서 피해 학생들을 가르쳤던 박현정 씨는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학교 운영이 가장 힘들었다. ⓒpixabay

제가 인화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긴 후 4~5개월 후, 기자회견을 통해 성폭력 사건이 알려졌어요. ‘내가 꼭 인화학교 문제에 같이 개입해서 뭔가를 해봐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전교조 교사잖아요. 사명감이죠. 그전에도 전교조 활동을 꾸준히 했어요.

비리를 알려면 행정실 재정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제가 파악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되고, 학교 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몰랐어요. 너무 무지한 상황에서 살다가 인화학교 문제가 터졌는데 전교조에서 요청이 들어왔어요.

전교조에서 저에게 “대책위에서 기자회견을 했고, 법인에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성폭력 사례가 있는지, 학생들은 어떤 상황인지, 학교와 교사들의 입장이나 의견은 어떤지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당연히 동의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전응섭 씨를 만났죠. 전응섭 씨가 이 문제를 내부고발 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분이 그때 확고하셨어요. 처음 내부고발자가 말을 흐릿하게 한다거나 생각이나 말을 바꾸지 않고 주관을 세우셨죠. 전응섭 선생님은 당시에 인화학교의 교사는 아니고 인화원의 생활재활교사였어요.

전교조에서는 조사도 부탁했지만, 전교조 차원에서 대책위 있을 때 조직적으로 결합한 거죠. 그 당시에 결합한 사람 중에 장휘국 교육감도 있었고요. 그때 교육위원이었으니까 대책위 오셔서 회의도 같이하셨어요.

제가 가정적으로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초등학교 1학년, 5살이었는데, 뒷바라지해야 하잖아요. 그런 와중에도 대책위 회의에 최대한 참여하고 집회를 계속했었죠. 1년 가까이 광산구청에서 천막 농성했잖아요. 거기에 꾸준히 결합했어요. 그다음에 집회 있으면 교육청 앞에서 집회 참여하고요. 시간이 되면 조퇴하고 가서 집회에 참여하고 이런 식이었죠.

학부모랑 같이 피해 학생들을 만나러 다녔어요. 피해 학생들을 만나러 다니면 전응섭 씨가 옆에 앉아서 수어통역도 했어요. 수어가 농인의 수어가 있고, 문법 수어가 있어요. 저희는 주로 문법 수어를 써요. 문법 수어와는 달리, 농인 수어는 축약해서 써요. 애들이 수어를 하면 읽다가도 이해가 안 돼요. 영어도 예를 들어서 미국 촌에 들어가면 좀 다르잖아요. 제주도 방언하고 다르듯이 수어도 그런 게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을 전응섭 씨가 해설해 주면 제가 그걸 다 타이핑해서 파일철 한 권이 나온 거죠.

그러고 나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지금은 특수학교에서 교감으로 계시는 김△△ 교사가 <PD수첩>에다 그걸 제보했어요.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는 취지로 <PD수첩>에 제보한 건데 <PD수첩>에서 취재하러 나왔어요. 그 사람들이 내 자료를 보더니 이걸로 자기네들이 검증하기 시작한 거예요.

근데 그 사람들이 경찰보다 더 좋은 게 뭐냐면, 경찰들이 움직임이 상당히 느렸어요. 조사 속도가 너무 느리더라고요. 경찰들은 왜 이럴까 생각했는데, <PD수첩>은 2주 만에 한 팀이 내려와서 제 자료를 들고 조사를 하더니 “선생님, 이거 그림이 상당히 재밌게 나오겠는데요.”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방송 용어예요. 근데 실은 방송 용어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죠. 이 사람들은 아픔이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내가 조사한 것이 이 사람들한테서 확실시되고 확인이 되니까 감정이 좀 그러더라고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그때 전응섭 선생님이랑 같이 만났던 피해 아이들이 10명 이상이었어요. 저희가 전혀 몰랐던 게 그때는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하던 시대였잖아요. 놀랬던 것이 토요일 오후하고 일요일 날 교장과 행정실장이 학교 나와서 아이들을 성폭행한 거, 우리는 상상도 못 했던 거죠. ‘성폭행이 일어났다는데 어디서 뭐가 어떻게 일어났다는 거야? 우리가 학교에서 근무하는데.’ 하면서 의아해했었죠.

선생님들 퇴근하고 그런 거예요. ‘도가니’ 영화 보면 한 80~90%가 비슷한데요. 몇 사례만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에 나온 것처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아이를 밤새 묶어놓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밖에서 소리가 안 들리게 하려고 그렇게 성폭행했던 거예요. 세탁기 폭력 사건도 사실이에요.

그때 공지영 씨가 직접 광주에 오셨거든요. 우리하고 식사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그걸 소설로 쓰고 영화로 나와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영화에서 첫째 아이가 철도에서 자살 기도한 그것은 사실에 맞지 않아요. 만들어진 이야기예요.

그리고 생활재활교사도 처벌받았다고 들었는데, 생활재활교사가 남학생한테 성폭행한 것도 있었고요. 그것도 저는 충격이더라고요. 생활재활교사도 남성인데 남성이 남학생을 상대로 그랬어요.

또 하나는 수학여행이었는데 그 당시 수학여행을 저도 갔었거든요. 수학여행 때 여학생들이 자는 방에서 행정실 직원이…. 그 사람도 처벌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직원이 자는 여학생 얼굴을 힘으로 누르면 상대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그렇게 성폭행을 했어요. 얼굴을 누르고 보이지 않게 해서 누군지는 몰라요. 근데 몸부림치니까 시끄러웠을 거 아니에요. 같이 자는 애들이 일어나서 본 거예요. 후다닥 나가는 모습을요.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었어요. 대책위를 끌어가는 와중에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거든요. 교사들과 학교가 법인 쪽과 법인 아닌 쪽으로 두 개로 나뉘었어요. 사립학교는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로 대부분 두 쪽으로, 법인 측에 편승하는 사람과 편승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죠. 인화학교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성폭력 문제가 터졌을 때 법인 쪽에 협력하는 사람과 협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 거죠.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죠. 학교 선생님들 간의 갈등은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과 분노 안 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거죠.

“학생이 성폭행당했다는데 당신은 왜 이걸 분노하지 않느냐! 이 사람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쪽 사람들이 소수였죠. 다들 분노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전체 교사 중 4~5명만 참여했어요. 처음에는 7~8명까지 됐는데 중간에 다 마음이 변해서 법인 측에 넘어갔어요. 본인이 눈치 보는 거죠. 스스로 계산하고, 눈치 보고 다 그래요. 그래서 4~5명이 남은 거죠.

학교 내부 직원들은 일주일 전까지 학교가 폐교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어요. 인화학교가 영원히 갈 줄 알았어요. 근데 교육청에서는 이미 폐교 절차를 다 밟고 있었죠.

‘도가니’ 영화를 보고 난 뒤, 인화학교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전부 말 없이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 것이다. ⓒpixabay

처음에 한 1년간, <PD수첩>이 방영될 때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했는데 그 뒤로는 법정 투쟁하고 장기화됐잖아요. 그때는 간간이 했어요. 김용목 목사님이 전화 와서 회의에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하시면 참석하고, 그다음에 집회 있다고 하면 가고 그랬죠.

근데 <PD수첩>이 방영됐어도 가장 크게 폭발적으로 사회적 공론화가 된 계기는 ‘도가니’ 영화였어요. 전 국민이 공분하고 그러면서 도가니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처음에 출발할 때는 사회복지법인(시설)은 무너지기 어렵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무리 부정한 사회복지법인이라도 한 번도 무너져본 적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정말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국민들의 여론 등이 합쳐져서 큰 역사를 만든 거잖아요.

<PD수첩>이 방영될 때는 ‘뭔가 이뤘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뿌듯했어요. 세상에 알려졌다는 생각들이 있었고, 영화로 나올 때는 흥분되더라고요. 영화 시사회 때 갔거든요. 인화학교 관련 시민단체들이 시사회 먼저 하잖아요. <PD수첩>도 뿌듯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린 게 성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집으로 가더라고요. 마음이 무거웠어요. 실제로 우리가 조사했던 것이 시각화되니까 마음이 너무 무겁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는 화목하게 인사하다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전부 말없이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 무거움이,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 거죠.

그래서 자책감도 들었어요. ‘왜 아이들의 고통을 우리가 몰라줬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을 보는 게 괴롭더라고요. 다 그랬을 거예요. 실은 그것 때문에 싸움을 오랫동안 한 것도 있지만, 영화 보니까 말문을 열 수가 없었어요. 매우 미안하더라고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천막 농성, 거리 시위, 법정 투쟁을 하던 그 당시에 협조해 주신 학부모님 두 분이 계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피해 아동 부모는 아니고 당시 학부모 대표 청아 엄마하고 영훈이 엄마라고 계셨어요.

근데 그 당시에 학생들 조사하고 이럴 때 돈도 많이 들었어요. 실은 당시에 돈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돈도 없고, 어떤 단체에서 후원하는 것도 없고요. 그런데 조사하러 돌아다니면 청각장애 애들을 모두 밥을 사 먹여야 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어요. 그분들이 많이 내셨죠. 농성할 때도 계속 지키고 있었고, 개인 돈 들여서 그 사람들 밥해 드리고, 자기 집에서 다 모여서 학생들 조사하면 옆에서 밥 시켜주시고 했어요. 저도 교사였으니까 대접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셨어요. 고생하셨어요. 지금도 그 생각만 나요. 진짜로 참 고생하셨다고 손 맞잡아 주고 싶어요.

그때 가장 듣기 힘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진짜 몰랐어요?” 그 말이 상당히 힘들었어요. 진짜 몰랐으니까요. ‘왜 내가 모를 수가 있을까?’ 이런 자책감이나 ‘왜 내가 몰랐을까, 저 아이들은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이런 것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일이 사회 발전의 한 축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고통은 고통이죠. 애들이 그 당시에 겪었던 일로 인해 평생의 트라우마 없이 살았으면 좋겠고요. 애초에 안 겪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들죠.

인화학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폭력 사건이 모든 걸 다 덮어버렸던 것 같아요. 성폭행 사건이 강렬하게 남아요. 애들이 어디 수학여행 가서 성폭행당하고 그것도 너무 충격적이고요. 피해 학생들을 직접 가르쳤어요.

사람들이 물어보는 거예요. “진짜 몰랐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교사로서 능력도 없고 자격도 안 갖춰 놓고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도가니’ 영화를 보니까 아이들의 그 고통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이들의 고통을 진짜 몰랐던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할 말이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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