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네 번째 구술자는 정지혜 당시 인화학교 재학생이다. 정 씨는 1991년 경기도 출생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인화학교를 다녔고, ‘도가니 사건’당시 특수학교 설립 및 농인 특수교사 채용을 요구하며 등교 거부 운동과 천막 수업에 참여했다. 현재는 ‘카페홀더’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주-‘카페홀더’는 인화학교 출신 농인들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형태의 커피숍이다)

광주 인화학교에 2002년에 입학을 했고요. 그다음에 졸업을 2007년에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화학교에 들어갔을 때 한 반에 4명 있었어요. 여자는 저 혼자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학교 처음으로 입사한 선생님이어서 수어를 전혀 몰랐던 것 같고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인화학교 왔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수어를 잘하는 건지 어쩌는 건지 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4~15살부터는 선생님이 수어를 잘하는지 안 하는지 조금 구분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 일반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수어가 그렇게 막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인화학교 들어가서부터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수어 하는 거 보고, 제가 눈으로 학습해서 배웠습니다.

학교 수업은 제가 기억에 남는 건 수어보다는 계속 판서했던 거를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수어를 하신 분도 있었는데 거의 몰랐기 때문에 대부분 판서로 진행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말한 내용이 이해가 됐을 때는 집중해서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그냥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인화학교는 근처엔 아이들이 마땅히 놀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pixabay

제가 처음에 학교 입학했을 때 관심이 없어서 주변을 잘 살피지 못했는데, 나중에 친구가 같이 놀러 가자 그래서 한번 나가 봤는데 학교 근처에 놀 데가 없었어요. 그네, 시소 외에는 학교 근처에 놀 만한 곳이 한 곳도 없다는 걸 그때야 알게 됐어요.

그래서 충격받은 게 뭐냐면 일반 학교에서는 노는 것도 많이 보고, 또 놀이 방법, 예를 들면 아이들이 고무줄도 하고 술래잡기 하는 것도 일반 학교에서는 다 알고 있었는데, 인화학교 와서 아이들이 그런 놀이 방법들을 하나도 몰라서 좀 충격이었습니다. 단지 시소, 그네 두 가지만 가지고 애들이 놀고 있었어요.

가끔 친구들이 저한테 부탁했던 게, 제가 통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이 과자 사다 달라고 돈을 주면 학교 올 때 사서 주고 하는 게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장난감도 전혀 몰라서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과자도 사다 달라고 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제가 막 사서 애들한테 전달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어디서 사서 올 수 있는 공간도 없고, 필요하다고 자기들이 살 수도 없고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제 친구가 말해 줬는데 밤이 되면 배고파서 몰래 담 넘어가면 라면을 파는 식당이 있었어요. 거기서 500원 주고 라면 사서 몰래 끓여 먹은 적도 있어요. ‘끓여 먹어야 하는데 냄비도 없이 어떻게 끓여 먹지?’ 궁금했는데 애들이 정수기 뜨거운 물을 봉지에 넣고 다 익으면 먹었다고 친구들이 말해줘서 들은 적 있어요. 나중에 그런 모습 보면서 놀랬던 적이 있습니다. “왜 몰래 먹냐?”고 물어봤는데 “선배들이 와서 뺏어 먹을까 봐 그랬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성폭행 사건 있을 때 제가 반장이었는데요. 각 반의 반장들을 학교 뒤에 다 모이라고 해서 그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가 그 성폭행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졸업한 선배가 학교에 와서 저희 반장들을 다 이렇게 불렀어요. 그때 그 선배가 서서 ●●한테 물어봤어요. 성폭행인지 이제 폭력인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는 폭행으로 봤는데 정확하게 그 수어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요. “너 당한 적 있냐?”고 ●●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가 특별하게 말없이 고개로만 ‘끄덕끄덕’ 했고, 제가 그때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그때 알았어요. 학교 안에 그런 성폭행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농아인협회 간부였던 것 같긴한데, 학교에 왔던 졸업한 선배가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

인화학교를 졸업한 선배가 학교에 와서 한 학생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물어봤다. 이 학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셜록

성폭행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많이 심하게 놀랐어요.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요.흩어진 뒤에 궁금해서 ●●랑 제가 따로 만나서 “가해자, 너를 폭행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 사진을 저한테 보여줬어요. 사진을 이렇게 보여줘서 봤더니 전응섭 선생님이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다시 물어봤어요. “진짜 전응섭 선생님이 맞냐?” 그랬더니 “아니다. 자기가 거짓말했다. 전응섭 선생님 누명 씌운 거다.”라고 ●●가 이야기했어요. 때린 사람 이름을 말하면 이 사람이 또 때린다고 협박을 해서 너무 무서워서 대신 전응섭 선생님이라고 거짓말로 누명을 씌운 거였어요.

진짜 가해자는 좀 헷갈리는데 ●●를 폭행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요. 정확하게 누구누구라고 다 이름을 기억하기는 조금 어려워요. 확실한 거는 폭행은 확실하게 맞고요. 나머지는 다 이렇게 폭행을 가했던 사람 중에 여자 선배가 때렸던 건 알아요. 그 사람만 제가 알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고요.

누구한테 알릴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때 모였을 때가 2005년이었어요. 학교 선배인 학부모 회장님 딸이 있었어요. 그 언니가 집에 가서 놀고 싶다고 해서 기숙사에서 ●●가 언니 집으로 가서 놀고 밤에 치킨 시켜주고 먹고 하는 중에 ●●가 자기 폭행당했던 내용을 자연스럽게 거기 엄마한테 이야기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엄마도 그 얘기를 듣고 저한테 물어봤어요. “●●가 진짜 폭행당한 거 맞냐?”라고 말해서 제가 엄마한테 말했고 엄마도 좀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모여서 이야기가 되면서 공론화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건 터지고 난 다음에 다들 난리 났어요. 선생님들은 잘 모르겠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난리 났어요. “이게 진짜냐?” 서로 물어보고 기숙사 학생들, 통학하는 학생들도 다들 놀라서 좀 난리 났던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저희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 그거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통학하는 아이들은 특별하게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들은 아니었어요. 인화원에 사는 선배들이 확실하다고 해서 강력하게 더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등교 거부에 동참한 첫 번째 이유가 ‘농인 선생님 구해달라’, 그다음에 ‘특수학교 세워달라’고 시위를 했습니다. 시 교육청 앞 천막 수업에 저도 같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들 빼고 중·고등학생들,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 않긴 해요. 중1부터 고3까지 대부분 참석했어요. 중고등학생들 전체 숫자가 30~40명 정도 됐어요.

수업은 전응섭 선생님이 가르쳐 줬고 농인 선생님 몇 분이 같이 좀 가르쳐줬습니다. 인화학교 다녔을 때는 수어를 못하는 선생님들이어서 판서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됐는데 오히려 천막 안에서는 농인 선생님들이 와서 가르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들이 확실히 아주 달랐고 더 집중도 잘 됐습니다.

같은 해 5월에 학교장한테 달걀하고 밀가루를 던졌는데 그때도 참여했어요. 이 과정들에 참여했던 이유는 농인들을 무시한다는 느낌에 너무 화가 나서, 모두가 다 같이 마음이 맞아서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저는 사람 몸에다가 달걀을 던지고 밀가루를 던지는 건 상대를 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 옆에다가 던졌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 사람 해할 만한 자격은 없었으니까. 그냥 주변을 더럽게 하려고 던지기도 했습니다. 달걀이 더 해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달걀보다 밀가루를 더 던졌어요.

제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거는 ‘특수학교 세워달라.’, 그다음에 ‘농인 특수교사 채용해 달라.’ 이 두 개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사회인이 되다 보니 학창시절에 제가 많이 배우지 못하는 거에 대해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 농인 학교 같은 경우 학교 안에 농인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부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부 이해하는 것도 훨씬 더 나았고요. 그래서 여기서도 농인 선생님들이 천막에서 잠깐 교육을 했지만, 훨씬 더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농인 학생들 처지에서는 농인 선생님이 가르치는 걸 보면 ‘나도 저렇게 농인 선생님이 될 수 있구나. 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인화학교와 관련해서 한 거는 특별하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 뒤로 특별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가서 뭔가를 도와주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2009년에 소설 나오고 2011년에 영화 나오고 할 때 책은 보지 못하고 영화를 봤어요. 다 같이 봤어요. 그때 인화학교 다녔던 친구들, ‘카페홀더’에 같이 살았던 친구들 몇 명하고 같이 영화관에 갔어요. ●●나 은혜 이 친구들하고도 영화를 같이 봤어요.

영화를 보고 서로 기분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했어요. 옛날 기억들이 난다고 친구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그냥 아주 이상했습니다.

학교가 없어진 소식을 듣고 안 봐도 되니까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인화학교가 폐쇄되고 ‘우석’ 법인은 해체가 되고 학교 자리에다가 장애인 수련시설을 만드는 것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인권기념관도 만든다는 걸 알고 있어서요. 그 사건을 기억하고 농인들의 자존감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그곳에 뭔가를 세우고 기억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워주는 거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에서 특수학교도 만들고 농인 선생님들도 좀 채용하고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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