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수하지 않을 혼인신고서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천정남(53)과 유승정(55) 부부는 손으로 정성껏 눌러 쓴 혼인신고서를 20년째 액자에 걸어뒀다.
“구청 접수용은 아니었고 그냥 우리 둘 사이에 서로 약속 같은 개념이었어요. 물론 저희가 혼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서로의 약속이었던 거고, 그래서 혼인신고서를 가져와서 작성하고 증인까지 서명해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용도였죠.”(천정남 인터뷰 2023. 6. 29.)
반면, 나낮잠(45)과 노유다(42) 부부는 구청에서 챙겨온 혼인신고서에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깨끗한 빈칸 그대로 보관 중이다.
“행정적으로 거절된 통지서를 이제 마음에 갖는 것보다 이게 수리된 상태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게 또 좋지 않을까 그런 고민들도 하고 있습니다.”(노유다 인터뷰 2023. 7. 4.)
이들은 모두 ‘성소수자’ 부부다. 정남과 승정은 어쩌면 평생을 함께할 남성과 법적 부부가 될 수 없지만, 둘만의 약속을 지킨다. 레즈비언 부부 낮잠과 유다는 마치 기념품처럼, 한 자도 적지 못한 서류 한 장을 간직했다.
동성혼은 불법일까? 아니다. 현행법상 동성혼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그런데도 성소수자들의 혼인신고가 수리되지 않는 이유는 ‘관행’ 때문이다. 동성혼이 금지된 건 아니지만, 허용하는 것도 아니라는 관행적인 처분을 하고 있다.
“전국에서 한 달에 한 번 이상 동성커플의 혼인신고가 접수된다. 이 접수도 작년 3월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수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관공서에 어려운 걸음을 하는 차별의 당사자들이 있다. 이 목소리에 이제 국회가 더 많은 논의와 숙의를 통해 응답할 때이다.”(류민희 혼인평등연대 집행위원, <가족구성권 3법 연속토론회 – 동성혼 법제화를 위한 혼인평등법(민법 개정안)의 의미와 과제> 토론문)
지난 5월 31일 혼인평등법(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 대표발의)이 최초로 발의됐다. 동성혼을 법적으로 명시하자는 ‘동성혼 법제화’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동성혼 ‘합법화’가 아니라, ‘법제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합법화라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현행법상 동성혼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금지한 적이 없으니, 합법화라는 말보다 법으로 명확히 규정하겠다는 뜻의 ‘법제화’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현행 민법 제812조에 따르면, 혼인이 성립되려면 ‘당사자 쌍방’과 성년자인 증인 2인이 서명한 혼인신고서가 필요하다. 혼인평등법은 해당 문장에 ‘이성 또는 동성’이라는 문구를 더했다.
“혼인의 성립”을 이성 또는 동성의 당사자 쌍방의 신고에 따라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부부” 및 “부모”에 동성 부부 및 부모가 포함되도록 개정함으로써 동성 커플에 대한 혼인 제도상 차별을 해소하고자 합니다(안 제767조 및 제812조 개정 등).”(민법 일부개정법률안 원문, 장혜영 의원 대표발의)
동성혼 법제화는 국제적인 대세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2023년 기준 총 34개 국가에서 동성 간 혼인을 인정하고 있다. 혼인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는 OECD 38개국 중 단 4개 국가(한국, 슬로바키아, 튀르키예, 일본)뿐이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2019년 대만이 처음으로 동성 간 혼인을 제도화했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2019년 6월 동성 간 혼인을 허용하는 민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됐다. 법안은 아직 통과되지 않았지만, 대신 일본은 전국 30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 ‘동성 파트너십 등록제도’가 존재한다. 해당 지자체들에는 일본 인구의 65%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령에 규정된 혼인 관계와 관련된 권리, 혜택, 책임, 의무, 벌칙 등은 1000여 개가 넘는다. 혼인의 법적 범위는 보건·의료, 임대차 승계, 연금, 사회보호, 사회보장, 과세, 국적·난민, 정치활동의 허용·규제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혼인의 불인정은 사망으로 혼인이 해소되는 순간 생존 배우자를 보호할 수 있는 상속권과 사회 보장상의 혜택들, 헤어짐·이혼 시 작동하는 공적 분쟁 해결 기능을 통해 취약한 지위에 있는 배우자가 누릴 수 있는 재산분할, 위자료 등에 대한 권리 등에도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류민희 혼인평등연대 집행위원, <가족구성권 3법 연속토론회 – 동성혼 법제화를 위한 혼인평등법(민법 개정안)의 의미와 과제> 토론문)
따라서 혼인 제도에 포함되지 않는 성소수자들은 안타까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23년 차 부부 정남과 승정. 10여 년 전 이들은 병원에서 혼인평등법이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정남이 큰 수술을 받게 됐을 때, 수술 동의서의 보호자 서명란에 승정의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법적인 가족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0년간 함께 지낸 배우자 승정이 자신의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현실을 확인했던 아쉽고 씁쓸한 경험이었다.(관련기사 : <접수하지 못한 혼인신고서, 23년째 액자에 걸어둔 이유>)
“저는 원가족이 경상도에 살고 있고, 수술한다는 걸 어머니께 알리기 그렇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않을까 싶어서… 당연히 저는 같이 살고 있는 제 배우자가 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병원 측에서는 무조건 법적인 가족은 아니라고 하니까 결국에는 누나가 병원이랑 전화해서 (수술 동의) 했었거든요.”(천정남 인터뷰)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혼인 관계, 사실혼 관계도 아닌 법적인 ‘남’인 정남과 승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서로에 대한 돌봄과 책임에 대해 걱정이 많아진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면회할 수가 없고, 지금의 법으로는 우리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의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요.”(천정남 인터뷰)
낮잠과 유다는 SNS상에서 ‘역겹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퀴어 페미니즘 출판사 ‘움직씨’를 향한 혐오 발언이었다. 부부는 모욕을 느꼈다. 경찰서로 향했으나, 경찰의 대처는 실망스러웠다.(관련기사 : <레즈비언 부부는 ‘역겹다’는 말… 그 혐오가 역겹다>)
“경찰들은 ‘들을 수 있는 얘기이지 않냐. 객관적인 얘기이지 않냐’는 식으로 반응하더라고요. ‘사회적으로 퀴어라고 하면,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조금 안 좋게 보이잖아요’라고, 대답한다든가….”(노유다 인터뷰)
낮잠과 유다는 퀴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조금 안 좋게 보이는 사람들인가. 성소수자를 위한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들 부부는 혼인평등법 발의 소식에 혐오 표현이 줄어들 거라는 기대를 걸었다. 혼인평등법은 단지 혼인을 고려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낮잠과 유다의 바람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고 사회적 배제를 시정하는 사회적 인정의 측면이 동성혼 인정 국가의 청소년 성소수자 자살률의 감소를 말해준다. 또한, 법안의 숙의를 위해 입법부 안에서 나누는 대화뿐만 아니라 전 사회가 거치는 대화의 과정이 뿌리 깊은 비가시화, 낙인, 고정관념을 제거하여, 포용이 주는 긍정적 변화가 영속적이고 유지될 수 있게 만든다. 동성혼 인정 국가에서 성소수자 평등에 대한 인식률이 높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류민희 혼인평등연대 집행위원, <가족구성권 3법 연속토론회 – 동성혼 법제화를 위한 혼인평등법(민법 개정안)의 의미와 과제> 토론문)
때때로 제도의 변화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불씨가 되곤 한다. 2019년 동성혼 법제화를 이룬 대만의 경우, 동성혼 법제화 이후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행정원 성평등 위원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2년 60.9%의 대만 시민이 동성혼 권리를 지지했다. 2020년 52.5%에 비해 8.4%p 높게 나타난 것. 동성혼이 법제화되기 1년 전인 2018년에는 대만 시민의 37.4%만이 동성 커플의 결혼할 권리를 지지한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해당 조사 결과는 <혼인평등이 어떻게 대만 사회를 바꿔왔는가>(대만평등캠페인, 2022년, ‘가족구성권 3법 연속토론회’ 중 이호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 토론문 재인용)에 담겼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정치권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동성혼 법제화에 뒤따르는 단골 핑계다. 정치권의 우려(?)와 달리,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그동안 긍정적으로 변화했다.
지난 5월 25일 갤럽코리아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3년 현재 대한민국 시민의 40%가 동성혼 법제화에 찬성했다. 10년 전인 2013년과 비교해 찬성 비율이 15%p나 상승했다. 또한 지난 2021년 조사에 비해 40대와 50대의 찬성 의견이 10%p 이상 반등했다.
“동성혼이 던지는 화두도 사실은 혼인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 이상으로,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려는 평등의 의미가 크다. (…)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모든 국민’에게 보장된다는 혼인과 가족구성의 기회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다는 동기일 수 있다. 배제된 소수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평등한 존재로 법 앞에서 인정받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실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김지혜, <동성혼과 평등권 심사기준 – 미국 연방대법원 ‘결혼보호법(DOMA)’ 위헌 판결을 중심으로>, 헌법실무연구 14권, 2014)
“사실은 누군가가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또 사랑을 반대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고, 반대 논리가 되게 치졸하죠. 혐오를 조장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희생시키고 삭제해가면서 하는 것들이 굉장히 저열하다고 생각하고, 혼인평등법이 꼭 하루빨리 제정돼서 잘 됐으면 좋겠어요.”(김남영 진보당 인권위원장, 2023. 7. 1. 퀴어퍼레이드 현장 인터뷰)
혼인평등법 시행을 기다리는 성소수자들에게 물었다. 혼인신고가 가능한 그날이 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지난달 1일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한 시민은 잠시 고민하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맥주 마시고,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죠!”(익명, 2023. 7. 1. 퀴어퍼레이드 현장 인터뷰)
정남과 한 인터뷰에서도 물었다. 혼인신고가 가능한 그날이 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그는 당연한(?) 대답을 내놨다. 차분히 대답을 시작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수록 얼굴이 상기됐다.
“구청에 혼인신고 하러 가야겠죠. 아마 기념일이 하나 또 생기겠죠.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된 날.”
낮잠과 유다는 비워둔 혼인신고서를 빼곡히 채울 것이다. 빨리 구청에 뛰어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낮잠이 좋아하는 오징어볶음에 막걸릿잔을 부딪치며 기쁨을 나누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