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의 꿈 품은 중학생 김기춘,
부친 뜻과 달리 경남고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2명의 대통령(김영삼, 문재인)을 배출한 고장, 거제도. 그 북단에 장목면이 있다. 김영삼의 출생지인 이곳은 김영삼과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는 김기춘의 고향이기도 하다.
김기춘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장목면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해방(6세), 분단 정부 수립(9세), 한국전쟁(11~14세)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때 거제도는 후방이었지만 격렬한 대립이 전개된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포로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7만 명이 넘는 북한군·중국군 포로가 섬을 가득 메웠다. 이들을 심문·감시하는 국군과 미군, 그에 더해 중국군 포로 심문 시 통역 지원 등을 위해 타이완에서 선발된 요원들까지 섬에 들어왔다. 그러한 섬에서 나고 자란 김기춘의 소년 시절을 검찰총장이던 1990년에 이뤄진 인터뷰를 중심으로 되짚어보자.
김기춘의 집은 그 동네에서는 괜찮게 사는 축에 들었다. 대구잡이 어장도 갖고 있었고 농사도 약간 지었다. 1952년 거제도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13세 소년 김기춘은 마산으로 유학을 떠나 마산중학교에 입학했다.
마산 시절 김기춘은 법관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계기를 마련해준 건 마산중학교 역사 교사였다. 고시에 여러 번 떨어지고 역사 교사로 눌러앉은 이 사람은 김기춘에게 자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넌 공부도 잘하고 논리적이니까 고시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법관이 될 거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법관의 꿈을 키웠지만 곧 아버지라는 벽에 부딪혔다. 김기춘의 부친은 아들이 교육자가 되기를 바랐다(김기춘의 형은 훗날 장목중학교 교장을 지낸다). 김기춘은 어쩔 수 없이 부산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결과는 합격.
그러나 김기춘의 고민은 깊어만 갔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내가 택한 길로 가자.’
법관의 꿈을 품고 다시 경남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이번에도 결과는 합격. 만약 역사 교사가 법관의 꿈을 키워주지 않았다면, 부친의 뜻대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면 김기춘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1955년 4월 1일 김기춘은 경남고에 입학했다(12회). 부산 지역 동기회 총무 이창대에 따르면, 고교 시절 김기춘은 교내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고 학보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논문 제목은 <우리 민족의 사대사상에 대한 소고>(경향신문 1991년 6월 29일 자 참조).
경남고 인맥은 김기춘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원복집 사건(1992년)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해 당선시키려 한 사람이 경남고 선배 김영삼(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이전의 경남중학교 졸업) 후보였고, 참석자 중 상당수가 경남고 출신이었으며, 김기춘 등이 이런 짓을 하고도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경남고를 매개로 한 인연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가정 교사도 하고,
물지게 지고 빙판길도 오르내리고
1958년 김기춘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김기춘이 쓴 ‘서울법대 교정은 정의와 인간애의 도량‘이라는 글을 중심으로 대학 시절을 살펴보자.
서울대 법대 졸업생 276명이 대학 시절에 대해 쓴 글을 모아 서울대 법대 동창회에서 펴낸 <진리는 나의 빛>에 실린 글이다. 김기춘 본인의 글이자, 그간 김기춘을 다룬 글들에서 활용되지 않은 자료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수험 번호 2번. 김기춘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1, 2번은 낙방하고 3번부터 합격하는 게 발표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우연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합격.
“수재 중의 수재, 이 나라의 미래와 운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다.”
김기춘은 첫 강의 시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며, 그러한 격려가 “시골에서 올라온 천진한 나에게 사명감과 자부심을 불어넣기에 필요하고도 충분”했다고 썼다.
냉정히 말하면, 그것이 나쁜 쪽으로 작용할 경우 선민의식과 특권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대학생 수가 매우 적었고 그중에서도 서울대 법대생은 소수 중의 소수였기 때문이다. 김기춘의 삶은 이것이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대학 시절 김기춘은 문교부 국비 장학금, 거제도에서 제헌 의원으로 당선됐던 서순영의 삼락회 장학금 등을 받아 등록금을 마련하고 가정 교사로 일하며 “어렵게 학교생활을 계속하고” 자취를 했다고 밝혔다.
창신동 산꼭대기에서 자취할 때에는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아 물지게를 지고 겨울 낙산의 빙판길을 오르내렸다고 썼다. 김기춘은 대학 시절을 나라 전체가 어렵고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던 시기로 묘사했다.
학생들이 군화 한 켤레로 사시사철을 견디고 자취방에서 맨밥에 간장을 끼얹어 끼니를 때우기도 했지만, 강의실과 도서관의 열기는 늘 뜨거웠다고 썼다. “학생들 모두가 고생하면서 공부했지만 구김살이 없이 낭만적이었고 모두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가난을 사회 구조적 모순의 결과로 보거나” 하지 않았다고 썼다.
구김살 없이 낭만적이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본 시대?
김기춘의 대학 시절(1958~1962년)은 이승만 정권 말기, 4월혁명(1960년) 시기, 그리고 5·16쿠데타(1961년) 후 들어선 군사 정권 전반기에 해당한다. 그중에서도, 이 글의 서술 구조상 대학 생활에 대한 언급은 주로 고등 고시 응시(1960년 10월) 이전 시기, 즉 이승만 정권 말기와 많은 부분 겹치는 시기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 나라 전체가 어렵고 가난했다는 서술은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 모두 구김살 없이 낭만적이었고 모두 사물을 긍정적으로 봤던 시기라는 서술은 시대 상황과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단적으로, 그렇게 모두 구김살 없이 지내고 모두 사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다면 4월혁명이 왜 일어났겠나? 그런 시대였다면 왜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까지 걸면서(200명에 가까운 인원이 희생됐다) 이승만 정권과 맞서 싸웠겠나?
4월혁명은 1960년 3·15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를 넘어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이었다. 정권과 결탁하는 등의 방식으로 큰돈을 부당하게 챙긴 부정 축재(蓄財)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 시기에 강하게 일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1960년 말 장면 정권 국무원 사무처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부정 축재자를 엄벌해야 한다’(37.3퍼센트)는 응답이 ‘3·15 부정 선거범을 엄벌해야 한다’(33.1퍼센트)보다도 많았다. 2016~2017년 촛불 항쟁을 계기로 전면에 부상한 적폐 청산 문제에서 재벌 개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 닮은꼴이다.
이처럼 모두 구김살 없이 낭만적이었고 모두 사물을 긍정적으로 봤으며 가난을 사회 구조적 모순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는 서술은 당시 시대상 전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낭만이라는 그럴싸한 색안경을 씌워 마치 ‘격차는 있지만 갈등이나 적대는 없는 사회’였던 것처럼 묘사한 것은 김기춘의 역사관, 시국관과 무관치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법조인의 자세와 정의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훈계
김기춘 글로 돌아오면, 김기춘은 대학 시절 도서실 좌석 확보 경쟁이 ‘영토 분쟁‘ 못지않게 치열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좌석을 감히 넘볼 틈을 주지 않았다고 썼다.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교문이 잠긴 학교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가 도서실 좌석을 확보하고 아침 7시경 잠시 나와서 밥을 먹고 다시 돌아가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에 매진하는 속에서도 연인과 데이트하고 동숭동 캠퍼스 운동장에서 캐치볼 등을 했던 일을 추억했다.
1960년 8월, 3학년 김기춘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제12회 고등 고시에 대비해 정릉에 있는 절에 들어갔다. 새벽 3시경에 일어나 공부에 몰두한 김기춘은 그해 10월 시험을 쳤다. 1961년 1월 31일 국무원 사무처에서 12회 고등 고시 사법과·행정과 합격자를 발표했다.
사법과 합격자 명단에 수험 번호 153번 김기춘도 있었다. 이번에도 합격이었다. (기존에 나온 글에는 대개 김기춘이 “1960년 말에 제12회 고등 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고 돼 있는데, 합격한 해는 1961년이고 1960년은 시험을 본 해다.)
김기춘은 글 후반부에서 법조인이 취해야 할 자세와 사회 정의에 대해 말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가관이다. 김기춘은 “법률을 공부한 우리들이 …… ‘나쁜 이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정의를 관철시키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법조인들은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다룬다. 오진하여 다리를 자르는 것이 큰 고통인 것에 못지않게 잘못된 법 해석과 수사, 재판으로 억울하게 죄를 씌워 선량한 국민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참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고문 피해자를 양산하게 한 유신 헌법을 만드는 데 관여한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유신 독재 시절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수사 책임자로 ‘활약’하기까지 한 김기춘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감히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 얼토당토않게 늘어놓으며 거리낌 없이 훈계하고 있다.
그것에 이어 김기춘은 “우리 사회에는 정의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범람하고 있다”며 이런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는 역할도 법대생들의 몫이라고 썼다. 이 또한 김기춘이 입에 담아도 좋은 얘기는 아니다.
서울대 법대 동창회는
왜 그 시점에
김기춘의 이상한 글을 실었을까
두 가지만 더 짚어보자. 첫 번째는 서울대 법대 동창회에서 김기춘에게 글을 청탁해 책에 실은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유신 독재가 탄생해 몰락할 때까지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법 기술자가 김기춘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일까?
시점을 생각하면 더욱 문제다. 이 책 발간일은 1994년 1월 1일. 1993년에 주요 작업이 진행됐다는 말이다. 1992년 12월 초원복집 사건이 터진 직후 시기다. 이 사건 전에 원고를 청탁했더라도 철회하는 게 순리인데, 서울대 법대 동창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김기춘의 글을 떡하니 실었다. 법과 정의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훈계까지 늘어놓았는데도 그대로 실었다. 초원복집 사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일까?
이 시점에 김기춘의 글을 게재할 계획을 세웠다면 대학 시절을 돌아보며 삶을 참회하는 글을 청탁했어야 하지 않을까? ‘후배들이여, 나처럼 법 기술자로 부역하고 지역감정 조장까지 하면서 살지는 않길 바란다. 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다오.’ 이런 내용의 참회문을 동문(同門) 김기춘에게 주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왜 안 되나?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내용은 김기춘의 얼토당토않은 훈계가 아니라 참회다. 그런 청탁엔 결코 응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면 김기춘을 필자 예정 명단에서 빼면 되는 것 아닌가?
승부 조작 범죄에 가담한 프로 스포츠 관계자 중 일부는 속죄의 의미로 승부 조작의 위험성을 알리는 공개 강연을 한다. 최상층 지도자들의 산실로 통하는 서울대 법대 동문들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 윤리 기준은 세웠어야 하는 것 아닐까? 유신 독재 부역, 조작 간첩 제조 사건, 초원복집 사건 같은 것은 ‘가벼운 실수’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면. 행적이 어떻든 간에 김기춘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지낸 자랑스러운 동문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면.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덧붙이면, 필자는 법을 흉기로 전락시켜 독재에 부역하고 인권을 짓밟은 법 기술자들의 행적을 전국의 법대에서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김기춘은 좋은 반면교사 사례가 될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도적질을 한 자들의 역사를 법을 다루게 될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영혼 없는 법 기술자들이 계속 횡행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직업 군인(특히 장교)이 될 사람들에게는 한국전쟁 전후에 그리고 베트남과 광주에서 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군 선배인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등이 총칼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역사를 명확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경찰 간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경찰이 인권을 짓밟은 주요 사건들에 대해 숙지하게 해야 한다.
조직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야 하는 마당에 그런 걸 가르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누군가는 항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실과 마주하려 하지 않고 없었던 일인 것처럼 부인한다면,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그런 주장을 ‘자학 사관’이라고 매도하는 일본 극우의 태도와 다를 게 무엇인가?
4월혁명과 5·16쿠데타에 대해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신기하게도 김기춘이 이 글에서 4월혁명과 5·16쿠데타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기춘의 대학 시절 한국 사회는 격동했다. 1년 1개월 동안 정권이 세 번 바뀐(이승만 정권→허정 과도 정권→장면 정권→군사 정권) 시기였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이 4월혁명과 5·16쿠데타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이 글만 놓고 보면 4월혁명, 5·16쿠데타가 일어나긴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격동하는 시대에 대해 충분히 얘기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4월혁명, 5·16쿠데타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건 분명 부자연스럽다. 그게 이상한 일임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기춘 동기생 이순우의 ‘법대 시절 회상‘을 보면 4월혁명과 5·16쿠데타 얘기가 첫 장에 바로 나온다. 김기춘의 선후배들이 쓴 글을 봐도 시대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여럿이다. 남재희의 경우 글 제목 자체가 ‘이강석(필자 : 이기붕 아들이자 이승만 양아들) 부정 입학과 동맹 휴학‘이다. 안상수는 한일협정 반대 운동 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인제는 전태일 열사 분신(1970년) 당시 사회법학회 회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각자 글에 썼다.
김기춘이 4월혁명도, 5·16쿠데타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글을 전개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그와 관련해 고려할 만한 몇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김기춘은 2009년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거듭 미화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영웅으로 찬양했다. ‘부정 선거 등 오명을 남겼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으나 김기춘은 이승만에 대해 ‘영웅적인 생애를 산 사람‘ ‘나라를 건국‘ ‘국부로 받들어 존경해야 한다‘고 썼다.
조선일보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1995년) 전시회를 통해 포문을 열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뉴라이트 세력이 목청 높여 강변한 것과 똑같은 얘기다. 그러한 김기춘 눈에 4월혁명이 곱게 보였을까? 그렇다고 해서, 5·16쿠데타만 언급하고 4월혁명은 지우는 식으로 쓴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아예 언급하지 않는 방식은 이런 상황에서 짜낼 수 있는 궁여지책 중 하나다.
4월혁명 시기 김기춘의 행적과 연결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서울대 문리대의 4·19 선언문) 이승만 정권의 폭정을 끝장내자며 10대 학생들은 물론 각계각층 시민들과 김기춘 주변의 대학생 상당수까지 거리에 나서고 피를 흘리던 그때 ‘나는 고시 수험서만 들여다봤다’고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때문에 4월혁명 부분을 생략하기로 마음먹을 경우 5·16쿠데타도 언급하지 않는 쪽을 택하기 마련이다.
‘제2의 학살’과 ‘세월호 죽이기’
그 거리는 얼마나 될까
4월혁명, 5·16쿠데타와 관련해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극우 반공 세력은 온갖 무리수를 써서 이승만을 치켜세우면서도 대개 4월혁명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하지만, 4월혁명에서 5·16쿠데타에 이르는 시기는 혼란기로 단호하게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시위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럴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다양한 요구가 아래로부터 터져 나왔다. 부정 선거범과 부정 축재자 등을 엄단하라는 목소리, 김구 암살 등 이승만 집권기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와 운동, 통일 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 독재 붕괴 후 제기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요구들이었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탄핵을 거치면서 적폐 청산 요구가 분출한 오늘날과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런 것인데도 극우 반공 세력은 혼란기라는 낙인을 찍고 매도한다. 극우 반공 세력의 눈에는 해방 공간의 활력도, ‘제2의 해방’으로 불리는 4월혁명 이후 터져 나온 정당한 목소리들도, 광주항쟁(1980년)도, 6월항쟁(1987년)도, 2016~2017년 촛불 항쟁도 기본적으로 혼란(더 나아가 난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조선 말기 부패한 지배층이 동학농민군을 비적 무리로 폄훼한 것이나, 일제의 눈으로 보면 3·1운동(1919년)은 난동이고 안중근, 윤봉길 의거 등은 테러에 불과한 것과 닮은꼴이다. 현혹돼서는 안 되는 위험한 시각이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제기된 과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민간인 학살 관련 사항이다.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민간인 학살로 수십만 명이 희생됐지만, 유가족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당하며 숨죽이고 지내야 했다. 빨갱이로 몰릴까 무서워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4월혁명을 계기로 상황이 바뀌었다. 각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방치된 시신을 수습해 합동 분묘를 만들기도 하면서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5·16쿠데타 후 철퇴를 맞았다. 쿠데타 세력은 유족회 관계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잡아 가두고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피학살자 합동 분묘를 파헤쳐 유골 상자를 부순 것은 물론 위령비를 정으로 쪼아 파괴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제2의 학살로 불리는 만행이다.
이런 만행은 흘러간 옛일일 뿐일까? 5·16쿠데타 세력이 자행한 제2의 학살과, 김기춘이 그 중핵에 있던 시절부터 박근혜 정권이 지속적으로 편 ‘세월호 죽이기’ 공작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5·16쿠데타를 한껏 찬양하고 제2의 학살은 ‘질서 회복’(실제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지배 체제 강화)을 위해 필요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세월호 죽이기’ 공작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세월호 죽이기’ 공작과 김기춘 문제는 연재 후반부에 다시 짚어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