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 1 31 발표된 12 고등 고시 합격자는 52. 김기춘을 비롯한 사법과 합격자가 31명이고 나머지 21명은 행정과 합격자였다. 김기춘은 대학 재학 고시를 통과하는 이른바소년등과’(또는소년 급제’) 달성하며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시작으로 김기춘은 서울대 법대 동기들 가운데 선두 주자로 나서게 된다. (김기춘에 대한 몇몇 글에대학 3학년 동기 유일하게 고시 합격이라고 서술돼 있는데, 서울대 법대 바깥으로 시야를 넓히면 역시 3학년 합격한 서울대 경제학과 박찬종 대학생 합격자가 있었다.)

당시 고시 합격자는 매우 특별한 존재로 대접받았다. 훗날에 비해 합격자 수가 현저히 적었던 점도 작용했다. 이러한 위상은 합격자들에게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게 수도 있었지만, 비뚤어진 특권 의식 또는 강렬한 출세 지향 의식을 불어넣을 수도 있었다. 김기춘은 후자의 전형이다.

흥미로운 근래 김기춘과 함께법률 미꾸라지 대표하는 인사로 거론된 우병우, 진경준도소년등과 했다는 점이다. 김기춘의 후예답다고 할까.

박정희 일가와 맺은 인연의 시작 5·16장학금

고시 합격 김기춘은 해군·해병대 법무관으로 복무를 했다 복무를 하면서 대학원(서울대 법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도 다녔는데, 이때 5·16장학회(오늘날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받았다. 1963~1964년에 받은 장학금에 대해 김기춘은 회고록에대학원 석사 과정 입학 시에 성적 우수자로서 5·16장학금(후일 정수장학금) 받아 학비 걱정 없이 석사 과정을 마쳤다 썼다.

<중앙일보> 연재 기사를 묶어 1993년에 발간된 <청와대 비서실 2>에도 김기춘이 이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김기춘은 대학원 시험에서 문과 수석을 5·16장학금을 받았다며, “기금의 성격과 상관없이 …… 되는 장학금 가장 많은 액수였그래서 설립자인 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다고 밝혔다.

5·16장학금 수령은 김기춘이 박정희 일가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김기춘은 일생 동안 박정희 일가와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1991~1997년에 상청회(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모임) 회장을 지내고,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인 2013 7박정희 대통령 기념 사업회초대 이사장을 맡은 것도 그러한 인연의 깊이를 보여준다.

지난 2005년 7월 19일 신임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임명된 김기춘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임명장을 받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기춘은기금의 성격과 상관없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정수장학회는 그런 식으로 구렁이 넘어가듯 지나쳐도 무방한 사안이 아니다. 정수장학회는 5·16쿠데타 박정희 세력이 김지태에게 많은 재산을 강제로 넘기게 만든 것이다. 보수성이 강한 법원도 강제 헌납 부분은 인정했다. 법원 판결을 압축하면부당한 공권력의 강압으로 재산을 가져갔지만 돌려줄 필요는 없다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논란이 때마다순수한 장학 재단‘, ‘나와는 무관하다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물론 김기춘도 진실을 외면했다.

강압을 인정하면서도돌려줄 필요는 없다 판결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이힘으로 남의 것을 뺏는 나쁜 아닌가요?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뭐라고 답할 있을까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의 일가가 호의호식하고, 친일파의 후예 일부가 조상의 재산을 되찾겠다며 소송을 내는 한국이기에 그러하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나라를 훔치든 학살을 자행하든 어쨌건 성공하면 대대로 먹고 잘살 있다 여길 애들만 탓할 있을까?

초임 검사 시절부터 다진 강렬한 출세 지향 의식

복무 검사 김기춘은 1964 광주지검에 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1965) 결혼했다. 신부는 김기춘의 서울대 법대 동기 동창의 동생으로 이화여대를 다닌 박화자 부임지가 광주인 것도 결혼 문제와 관련 있는데, 가지 설이 엇갈린다.

그중 하나는 씨의 부친 박찬일 변호사가 김기춘을 사위로 삼고자 김기춘이 광주에 부임되도록 로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춘은광주도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이라며 로비설을 일축했다.

훗날 초원복집 사건(1992) 터지자 김기춘은 어떻게든 발뺌하려 발버둥 치는데, 그때 내민 카드 하나가 광주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초원복집 사건 김기춘은 처가가 광주라며지역적 편견 없이 국민적 화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강변했다.

김기춘은 1967 <습관적 범인의 처우에 관한 연구 : 보안 처분의 도입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해 부산지검으로 이동한 김기춘은 1969년에는 서울지검으로 올라왔다. 말단 검사 시절에 대해 김기춘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병아리 초임 검사 시절부터 장차 검찰총장이 검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검찰 총수가 되려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근무해야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행동했다.”

정의를 구현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분투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마땅한 시기에 강렬한 권력 의지와 출세 지향 의식을 다진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1988 검찰총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근무 중에 틈틈이 검찰총장 취임사를 초안하 모습으로 이어진다.

검사가 검찰총장을 목표로 삼는 당연한 아니냐, 뭐가 문제냐고 누군가는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검찰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렇게 편하게 넘어갈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간 검찰은 대다수 국민이 기대하는 검찰다운 모습을 보이고 지켜왔나? ‘검찰 공화국이라는 현실을 보면 답은 자명하다. 그렇게 데에는 검찰을 정치적 도구로 여긴 정치권력의 잘못된 태도가 크게 작용했지만, 검찰이 정치권력만 탓할 있는 처지는 결코 아니다.

검찰 공화국 구축한 6월항쟁(1987) 이후 시기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독립성을 지키는 대신 정치권력, 자본 권력과 영합한 검사들이 잘나간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밑바탕에 출세 지상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많은 부분 검찰이 자초한 오욕의 역사에서 주역 명인 김기춘이 초임 검사 시절부터 출세 지향 의식을 다진 것을 가벼이 여길 없는 것도 때문이다.

노년에도 거침없는닭살 애정

김기춘의 검사 생활 초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얘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가지만 짚어보자. 번째는 김기춘의닭살 애정 관련된 사항이다.

초원복집 사건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정치적 꼼수로 처가가 광주라는 사실을 써먹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김기춘은 부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면모에 관한 인상적 일화가 2007년에 발간된 <말랑 말랑 여의도 보고서> 나온다.

책에 따르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유럽을 방문할 함께 김기춘 의원은 부인에게 국제 전화로아이 러브 머치라고 스스럼없이 애정 표현을 했다. 그에 더해닭살스러워하는 후배 의원들에게 그렇게 전화를 해보라고 채근까지했다.

김기춘 의원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유럽에 시기는 2006 9월이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2015 4 목숨을 끊기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폭로한 내용(“2006 9 김기춘 실장이 VIP(박근혜) 모시고 벨기에와 독일에 10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 포함된 바로 방문이다.

60 후반의 남편이 40 넘게 함께해온 아내에게 스스럼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것 자체는 누구도 뭐라고 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렇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가정 바깥에서 해온 활동을 함께 펼쳐놓고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소 띠고 가족 얘기하며 김근태 고문한 짐승들

잠시 1985 남영동으로 가보자. 그해 9 4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 5 15호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 5층은 1987 1 박종철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바로 그곳이다(김근태와 방은 달랐다).

김근태는 23일간 대공분실에 갇혀 있으면서 이근안 등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물고문, 전기 고문 온갖 고문이 김근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짓이겼다. 고문을 가한 자들은 김근태를 집단 폭행한 다음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어라라고 강요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근태는 훗날 이렇게 썼다.

“빠개질 듯이 아픈 머리가 큰 수박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나는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외마디를 계속 질러댔다. 멱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헉헉 꺼이꺼이 하면서 어두운 비명을 토해냈다. 거기에는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것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드디어는 축 늘어졌다.”

김근태는 미리 계획된 고문이었고 고문을 가한 자들은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미소까지 띠고 고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장의사 일이 없어서 한가했는데 이제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이 난다 이근안의 말도 이를 보여준다.

가해자들은 김근태를 고문하면서시집간 딸이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치렀는지 모르겠다 등의 얘기도 주고받았다. 미소 띠고 고문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자들. 정말 소름 끼치는 모습 아닌가?

이에 더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일당도 자기 가족은 사랑했을 터이고, 이근안이 2010 인터뷰에서 자신이 고문이 아니라일종의 예술이었다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털어놓은 것이 자식 걱정이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영화 <남영동 1985>

고문을 비롯한 심각한 국가 폭력에 관여한 자들이 가족에 대해 표출하는 애정을 그러한 폭력과는 무관한, 순수한 인간애라는 식으로 용인하는 곤란하다. 둘은 함께 놓고 봐야 한다. 일부 정치꾼이 둘을 분리한 다음 자신이 무고한 이들에게 자행한 폭력은 감추고 가족에 대한 애정은 부각하는 식으로 이미지 정치를 전개하는 능수능란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김기춘의닭살 애정
순간에도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김기춘은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오해를 막기 위해 먼저 말하면, 김기춘은 김근태 고문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김기춘이 아니라 김기춘의 닮은꼴 후배 정형근이다. 김근태 고문 사건을 거론한 심각한 국가 폭력을 자행한 자들이 표출한 가족 사랑의 실체와 당시 고문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일선에서 고문한 이근안 같은 자들이지만, 고문 문제에 책임이 있는 이런 자들만이 아니다. 고문을 허가하고 부추긴 국가 권력이었다. 윗선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손으로 직접 고문 기구를 만지지 않았다고 해서 고문을 비롯한 국가 폭력의 책임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고문 피해자를 숱하게 만들어낸 유신 체제의 근간인 유신 헌법을 제작하는 관여한 김기춘이 져야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에 더해, 그것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지지 않으면 되는 책임도 있다. 1975 11 중앙정보부가 터트린 이른바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사건에서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에서 고국으로 유학 교포 학생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은 조작 간첩 제조 사건으로 교포 학생 사회는 쑥대밭이 됐다.

수많은 교포 학생들이 불법 구금과 고문을 당하며 간첩으로 몰렸다. 사형 선고를 받고 길게는 10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하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피해자들 일부는 재심을 신청했지만,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죄 판결이 나오면, 김기춘의 후예들이 주축을 이룬 검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상고하기 일쑤였다. 안타까운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 재심 신청조차 망설이는 경우도 있었고,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수십 년은 되돌릴 도리가 없다는 점이다.

사건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90 김기춘은 25 5·16민족상(안보 부문) 받는데, 수상자로 선정된 근거 하나가 바로 1975년의 사건에서활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김기춘이 국제 전화로 부인에게 스스럼없이 애정 표현을 하던 순간에도 사건 피해자들은 한편으로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영화 <자백>에서 사건에 대해 묻는 질문에 김기춘은 이렇게 답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김기춘다운 발뺌이었다.

보안 처분 광범위하게 도입주장한 김기춘의 논문

짚어볼 번째 사항은 김기춘의 석사 논문 주제가 보안 처분 도입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 역시 그동안 김기춘을 다룬 이런저런 글들에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사안 하나인데,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문에서 김기춘은 독일, 일본,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습관적 범인’(누범) 어떻게 다루는지 검토했다. 김기춘은오늘날 범죄의 누범화 경향은 세계 공통의 사회 문제 됐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행형(行刑) 혁명 이미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그런데도 한국은세계의 조류에 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무기로써 ()범죄 전장에서 패배 일로를 걷고 으며현재의 형사 정책으로서는 사회 방위의 () 거두기 어려울 이라고 우려했다.

전쟁에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한것처럼 새로운 수단으로 보안 처분 등이 필요하다고 김기춘은 강조했다. ‘부정기형(필자 : 형기를 확정하지 않고 선고하는 자유형) 제도와 보안 처분 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사회 방위와 범인 교화의 목적 달성하고명랑한 사회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안 처분 도입과 관련해 김기춘은책임 있는 자에게는 형벌을, 위험성 있는 자에게는 보안 처분을 가하여야 한다는 이원주의에 입각하여 ()범죄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이 요망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규정하고 있는 보안 처분 가운데정신 장애자의 치료 요양 시설, 음주자·중독자 등을 위한 요양 금단 시설, 부랑자의 노동소 수용, 경향(傾向)범에 대한 보안 구금 제도 등을 시급히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소는강제 노동소 뜻한다. 김기춘은 보안 구금 또는 예방 구금의 경우중대한 범행을 계속 공공 또는 다른 사람에게위험을 주리라고 인정 형벌과 함께 일정한 기간선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보안 처분에 있어서는 특히 인권 문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며 보안 처분 종류의 선택과 집행을 위한집행 재판소설치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길을 끄는 하나는 정치범, 사상범에 관한 부분이다. 김기춘은정사(政事) 범인 또는 확신 범인이 외형상 누범 혹은 상습범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지만정사 범인을 상습 범인과 동일 유형에 넣는 것은하늘에 거역하는 부정의 생각되고 있다 지적했다.

이기적 동기가 없고 사회 개조의 이상 실현을 위해서는 신명을 바칠 용의가 있는정사 범인을 보안 처분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정의이며 필요한 조치라고 김기춘은 결론을 내렸다.

보안 처분 악용의 위험성 여실히 입증한 사회안전법·보호법

사회를 지키기 위한새로운 무기라며 김기춘이 광범위한 도입을 주장한 보안 처분은 한국 현대사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였을까? 명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보안 처분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없고 악용 위험성이 조치다. 그러한 문제점은 사회안전법, 사회보호법 등을 통해 고스란히 입증됐다.

사회안전법은 유신 독재 시절 긴급 조치 9(1975 5) 선포 후인 1975 7 제정됐다. 골자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수감 생활을 사람들에게 출옥 재판 절차 없이 보안 처분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형기를 마친 사람을 재판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다시 처벌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보안 처분 하나인 보안 감호 처분을 통해 정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영구적으로 가둘 있었다. 보안 처분은 2 단위로 하도록 있었는데, 횟수 제한이 없었다. 이른바 재범 위험성을 공정하게 심사하는 절차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에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보안 처분을 거듭 내릴 있었다. 검사가 2년마다 보안 감호 처분 갱신을 청구해 계속 가둬둘 있었다.

서준식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묶은 책 <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서준식 사례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1971 대선 직전 보안사에서 터트린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서승과 함께 수감된 서준식은 17 후인 1988 석방됐다. 잡혀갈 23 대학생이었던 서준식이 40세가 돼서야 풀려난 보안 감호 처분 때문이었다. 7 형기를 마친 서준식에게 당국은 보안 감호 처분을 계속 내렸다. 때문에 서준식은 10년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서준식이 당국에 찍힌 강제 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신 독재 정권은떡봉이라고 불린 깡패들을 앞세워 폭행과 고문을 자행하며 전향을 강요했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여럿이었고, 버티던 서준식도 자살을 시도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서준식은사람의 생각은 누구도 규제할 없다 신념을 지키며 강제 전향을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1988 비전향 장기수로는 처음으로 풀려났다. 이듬해(1989), 사회안전법은 폐지된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0 12월에 제정된 사회보호법은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만든 악법 하나다. 보호 감호(보안 처분의 일종) 등을 통해 사회 복귀를 촉진하는 법이라고 내걸었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죄형 법정주의를 넘어선 처벌을 가하는 악법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다.

법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대표적인 집단이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순화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인권 유린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호 감호 처분까지 받아야 했다. 재판 절차 없이 당국이 1~5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리면, 보호 감호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보호 감호소는격리된 절해고도로도 불리며 인권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사회안전법과 마찬가지로 인권 유린 악법이라는 비판을 오랫동안 받은 사회보호법은 2005 폐지된다. 검찰은 폐지에 강하게 반대했다.

보안 처분 최초로 규정한 김기춘이 관여한 유신 헌법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보안 처분은 오랫동안(특히 독재 정권 시기에)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제도로 악용됐다. 김기춘이 논문에서 언급한인권 문제에 대한 배려같은 찾아볼 없었다. “정사 범인을 보안 처분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정의라는 김기춘의 지적과 달리 정치범, 사상범은 보안 처분의 주요 표적이었다. 김기춘 논문의 표현을 빌리면하늘에 거역하는 부정의 자행된 셈이다.

그런데 보안 처분에 관한 법을 만들려면 그에 관한 근거가 헌법에 있어야 했다. 보안 처분에 관한 근거를 처음으로 포함한 헌법이 다름 아닌 유신 헌법이다. 말단 검사 김기춘이 택한 학위 논문 주제가 보안 처분 도입 문제이고, 김기춘이 관여한 유신 헌법이 보안 처분에 대해 규정한 최초의 헌법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덧붙이면, 김기춘이 석사 논문에서 시급히 도입해야 보안 처분의 하나로 거론한부랑자의 노동소 수용관련 조치도 유신 독재 시기에 이뤄진다. 이건 법령이 아닌 훈령의 형태로 이뤄지는데, 긴급 조치 9호가 선포되고 사회안전법을 비롯한 4 전시 입법이 이뤄진 1975년에 나온 내무부 훈령 410(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처리 지침) 바로 그것이다.

국가가 경찰법 차원에서 부랑인 문제에 적극 개입한 최초의 공식 문서”(김명연 교수) 훈령은부랑인부랑인에 준하는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상정해 자의적인 단속과 수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훈령을 근거로 유신 독재 시기와 전두환 정권 전개된 단속과 강제 구금 중심의부랑인대책은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500 넘게 사망하는 끔찍한 실상이 1987년에 알려지며 세상에 충격을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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