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분이 제게는 ‘부당해고’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사건을 기사화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희롱 가해자가 뻔뻔함 때문이다. 사건 직후 내게 사과했던 기사는 한 달 사이 돌변했다. 그는 서울 마포구청 담당자에게 “억울하다” “회사 사장이 사직을 강요한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어떻게 처리되고 있나‘ 궁금해 구청에 전화했을 때 담당자가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회사 쪽에서 그 기사에게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서 나가라고 했다네요. 버스기사 분이 억울하다고 나갈 수 없다고 호소하셨어요.”

내가 겪은 성희롱 피해 사실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지난 3월 1일, 마을버스 마포13번 기사가 승객이 없는 틈을 타 내게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음란 사진을 내밀었다. 10대 여성 몸으로 보이는 사진이었다. 얇은 천으로 알몸이 덮여 있었고, 누군가 천을 걷어 올리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건 발생 20분 후 나는 문제의 사진을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찍었다. 동영상에는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 가해 기사와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사건 직후에는 분명 사과했었는데… 오해라고 했었는데…’

약 한 달이 지나자 기사는 태도를 바꿨고, 상황은 급변했다. 기사는 평소처럼 운전을 했다. 버스회사 사장은 “해고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자인 나 하나 괴로운 것만 빼면, 바뀐 게 없었다.

참아온 분노는 그 때 터졌다. 지난 4월 4일, 나는 마포13번에 올라 성희롱 가해 버스기사에게 지금까지의 상황과 문제점을 길게 지적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이웃 주민들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버스에는 홍익대학교 학생과 동네 주민이 타고 있었다. 승객들의 시선은 내게 집중됐다. 기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 그 때 휴대전화로 음란물 제게 보여 주셨죠? 분명 성희롱을 하신 겁니다. 그 때 잘못했다고 인정하고선, 구청에서는 억울하다고 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분명히 마을버스 운전기사 일을 그만 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의 성희롱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려 했지만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발목을 잡았다. 사실을 얘기해도 형사처벌 받을 수 있는 규정이 우리 법에는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성범죄 피해자의 입을 막는 악법으로 지적받아 왔다.

길이 없는 건 아니다. 공익을 위한다는 점이 확실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기사 형태로 이 피해사실을 알리면 위법성의 조각 사유에 해당될 수 있다.

형법 제310조(위법성의 조각)를 보면 “제307조 제1항의 행위(사실적시 명예훼손)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 문제를 기사로 쓰는 이유다.

성희롱 가해 기사가 보여준 음란물 사진 ⓒ이명선

‘경찰과 구청이 손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았을까?’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난 몇 주 동안 싸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가해자에게 경고했지만, 끝은 허망했다.

경찰은 내가 겪은 성희롱 피해는, 나 홀로 당했기에 ‘공연성’이 없어서 ‘공연음란’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가해자가 통신망을 이용하지 않고 휴대전화 화면으로 음란문을 보여줬기 때문에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도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마을버스 관할 기관인 마포구청도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밝혔다. 구청이 한 일은 마포13번 버스 운임회사인 연희교통에 전화를 걸어 “버스 이용객이 불편을 겪었다는 민원이 있으니, 직원들에게 재발 방지를 위해 교육을 하라”고 지시한 것 뿐이다.

구청이 일부러 사건을 외면하거나 축소한 건 아니다. ‘지도교육’ 이상의 조치를 취할 법적 근거가 없을 뿐이다.

마포구청 교통지도과의 한 관계자는 “명백하게 대중교통 이용객이 불편을 겪었거나 다쳤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지도교육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성희롱의 경우 형사처벌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응할 규정이 없어요. 성희롱의 경우에는 형사처벌이 확정되면 자동적으로 버스기사 자격이 없어지는 건데,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어서요. 일단은 피해자께서 괴로워 하시니까, 운임 회사에 다른 노선이 있으면 노선 변경이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우리 법에는 대중교통 운행을 책임지기에는 부적합한 사람에겐 운전대를 맡기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위험한 범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처벌 종료 2년이 지나야 대중교통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24조 (여객자동차 운송사업의 운전업무 종사자격)에서 정한 죄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집행유예 기간인 사람도 자격이 안 된다.

내가 겪은 사건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가해자를 처벌할 법적 규정은 없고, 형사처벌이 안 됐기에 구청은 행정조치를 못 했다.

ⓒ이명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해자를 해고하겠다”는 버스 운임회사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사건 직후 연희교통 사장은 “가해 기사에게 사직서를 받았으니 새로운 사람을 구할 때까지 참아달라”면서 ”한 달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피해자만 불편함을 겪는 게 슬펐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도 오래 못 갔다. 버스 운임회사 사장도 가해 기사가 적극적으로 항변하자 태도를 바꿨다. 마포구청에서 회사 측에 “노선 변경이라도 해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마포13번을 탈 때마다 가해 기사와 마주쳤다. 운임회사 사장은 “참으라”고만 했다.

“사장님. 한 달이 지나도 그 기사가 운행하는 데 어떻게 된 거죠?”

“저로서 어쩔 수 없어요. 새로운 사람이 안 구해지니까 내쫓을 수도 없고.”

“그럼 제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요? 상식적으로 말아 안 되잖아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 겁니까? 확실하게 피해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사건이 벌어진 지 7주가 지났다. 가해 기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버스 안에서는 휴대전화 화면만 보려 노력한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스를 타는 이유는 ‘피해자가 피할 이유는 없다’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가해자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스에 오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다른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일부 지인들의 반응이다. “네가 친하게 대해서 여지를 만든 것 아니냐”, “어쩐지 살갑게 대하더라”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은 나에게도 화가났다. 피해를 겪고 두려움을 느낀 기억, 피해 사실을 어떻게든 증명하려 했던 노력… 여기에 주변으로부터 “피해 여지를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나의 모습이 애처롭다.

마포13번은 오늘도 운행중이다. 같은 피해가 반복되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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