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는 전 재산인 집을 지난 5월 경매로 잃었다. 아버지가 투옥된 사이 야간고등학교 다니며 형제들과 함께 모은 돈으로 마련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힘써 준 신부님들과 친척들이 건넨 돈으로 산 집이었다.

이제 그 집은 나은주의 것이 아니다. 헐값에 주인이 바뀌었다.

국정원이 제기한 부당이득반환 소송에서 패소한 결과, 고 나경일의 딸 나은주의 집이 지난 5월 경매로 팔렸다. ⓒ주용성

나은주 아버지 고 나경일은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조작으로 9명이 사형당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박정희 정권은 아버지 나경일을 두 번이나 간첩으로 몰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인혁당 재건위’에 몸담았다며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나경일은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했고, 10년 가까이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다.

억울함은 한참 뒤에 풀렸다. 2008년 1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9년 8월 국가는 나경일 가족에게 국가배상금 일부를 먼저 줬다. 2016년 1월 전략당 사건에 대해서도 국가배상 판결이 나왔다.

희소식은 거기까지였다. 대법원이 가지급 받은 국가배상금을 토해내라고 판결을 내리면서 악몽이 다시 시작됐다.

나은주를 포함한 네 형제에게 돈을 요구하는 채권자는 국가정보원이다. 국정원은 2013년 7월 네 형제에게 2009년 8월 가지급 받은 국가배상금 일부를 돌려 달라고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했다. 국정원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대법원판결 때문이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갑자기 이자 계산법을 바꿔 인혁당 피해 가족들이 겪은 30여년 치의 이자를 삭제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아버지를 고문했던 국정원은 받은 돈을 토해내라고 재촉했다.

고 나경일의 첫째 자녀 나은주(왼쪽)와 둘째 나문석(오른쪽). 사진의 배경이 된 집은 이제 더이상 나은주의 집이 아니다. ⓒ주용성

네 형제는 그때부터 채무자가 됐다. 모든 걸 압류당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집마저 지난 5월 경매로 뺏겼다.

나은주는 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로 연명하듯 살아가고 있지만, 빚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연 20%에 달하는 연체이자율은 빚 덩치를 빠르게 불리는 중이다.

국가배상으로 네 형제가 각각 받은 돈은 4억5000여만 원. 돌려줘야 할 돈은 이를 훌쩍 넘어섰다. 2019년 11월 기준 각 형제의 채무액은 7억4000여만 원이다. 나은주의 집이 경매로 팔리면서 채무액은 이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빚더미에 앉아있는 건 마찬가지다.

지난 10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고 나경일의 첫째 나은주를 대구 모처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대구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둘째 나문석도 함께 만났다.

대화 시작과 동시에 나은주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떠한 질문에도 체념한 듯 너털웃음을 짓는 나문석과 달리, 나은주는 지난 2년간 있었던 일을 기자에게 풀어 놓았다. 나은주는 “우리 고통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울먹였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매주 서울로 집회 참석하러 가겠어요? 한 번은 조카 결혼식도 가지 않고 서울 서초동에서 열리는 검찰개혁 집회에 나갔어요. 검찰개혁, 사법개혁이 이뤄져야 조카도 앞으로 잘 살 거 아니에요? 뭐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아서 힘들지만, 집회에 나갑니다.”

고 나경일의 첫째 자녀 나은주(오른쪽)와 둘째 나문석(왼쪽). 사진의 배경이 된 집은 이제 더이상 나은주의 집이 아니다. ⓒ주용성

<셜록>이 ‘고리대금업자 국정원’ 기획을 통해 억울함을 알리기 시작한 2017년 6월까지만 해도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대법원의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 국가 폭력 피해자가 되려 빚더미에 앉았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고리대금업자 국정원

그 후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지면서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커졌다. 거기까지였다. 바뀌는 건 없었다. 누구도 인혁당 문제에 관심 갖지 않았다.

“저희 집이 경매에 나왔다고 하니까, 이웃들마저 눈독 들이는 거예요.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니까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대법원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국정원이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지, 그걸 아는 게 소원이에요. 그것만 안 다면, 지금 눈 감아도 괜찮아요.” – 고 나경일의 딸 나은주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19년 2월 20일, 국가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인권위는 “인혁당 피해자들이 부당이득금 반환 문제로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조속히 해소하고, 국민 보호책임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도록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의견을 냈다.

그로부터 8개월이 흘렀지만, 현재까지 청와대로부터 반응은 없다.

“청와대에서 명절마다 인혁당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요. 그런 것 필요 없으니까, 정부에서 저희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곧 길바닥에 나앉을 텐데, 이 억울한 사정을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왜 해결할 수 없는지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고 나경일의 딸 나은주

고 나경일의 부인 임분이는 치매가 걸린 후 남편 나경일의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렸다. ⓒ주용성

아버지 나경일은 사망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다. 2009년 초여름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을 때, 고문 트라우마로 1인 병동을 자주 고문실로 착각했다.

나경일의 정신은 1974년 중앙정보부 6국 지하 고문실 어딘가로 돌아갔다. 아들 나문석을 고문 기술자로 착각해 “꺼지라”고 소리쳤다. 돈은 아무 소용 없었다. 국가배상금을 암 치료하는데 썼지만, 나경일은 2010년 7월 12일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하신 말이 생각나요. ‘천국 같은 집에서 지옥 같이 살고 있다’. 필요한 곳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정파적인 문제에만 목숨 매는 정치권을 보면 열불이 나요. 저희 억울함을 들어주는 곳은 금태섭 의원실 밖에 없었어요. 배상금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우리 가족 인생을 망쳐놓은 국정원이 이제 집까지 빼앗았습니다.” – 고 나경일의 딸 나은주

집을 경매로 뺏길 위기에 놓인 인혁당 피해자들은 더 있다. 이창복과 고 전재권의 딸 전영순, 그리고 고 정만진의 부인 추국향이 경매로 넘어간 집을 지키고자 부동산 강제 경매 집행에 대해 이의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만약 재판에서 패소하면 세 가족도 나경일 가족처럼 경매로 집을 잃을 수 있다. 대부분 11월 선고가 이뤄질 예정이지만, 채권자 대한민국은 채권 포기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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