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사건 생존 피해자 이창복 씨는 얼마 뒤면 길거리에 나앉을지 모른다. 지난해 5월 이 씨가 법원에 ‘국가정보원의 강제경매집행을 멈춰달라’며 청구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국정원이 법원의 조정안을 거절하면서 이 씨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 씨는 올해 87세. 그는 여전히 가해자에게 고통을 받고 있다. 가해자이자, 국정원의 전신 중앙정보부는 이 씨를 간첩 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모자라 고문했다. 현재는 이 씨에게 국가배상을 토해내라며 ‘빚고문’을 하고 있다.

이창복 씨는 인혁당 사건에 휘말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국가폭력 피해자다.

이창복 ⓒ셜록

이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대인기피증 등으로 고생하다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2009년 8월 10억9000여만 원을 가지급 받았다. 30여년 만에 이뤄진 지연된 정의였다. 그 후 이 씨는 빚과 변호사 비용을 뺀 금액 중 상당수를 사회에 기부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집을 샀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원은 태도를 바꿨다. 2013년 7월, 국정원은 인혁당 생존 피해 가족 77명에게 ‘받은 돈 일부를 반환하라’며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국정원이 내세운 근거는 대법원 판결이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인혁당 생존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배상금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며 34년치 이자를 삭제했다. 대법원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때부터 이자 계산을 하면 이자가 너무 많아 줄 수 없다‘는 식의 근거를 들었다.

“불법 행위시와 변론 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 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 2011년 1월 대법원

대법원 결정은 과거 판례와 크게 달랐다. 종전까지 법원은 불법행위 성립일부터 손해배상채무 지연금을 계산해왔다. 이런 판결은 수십 년간 이어졌고, 사례도 많다. 하지만 판례가 바뀌면서 인혁당 생존 피해자들은 받았던 돈을 돌려줘야 할처지가 됐다.

법원은 그 후로도 국정원 편에 섰다. 국정원이 피해 가족 별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법원은 그때도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배상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붙는 지연이자율은 연 20%였다. 연 5%의 지연이자가 과하다는 이유로 34년 치 이자가 없어졌는데, 사라진 금액을 반환할 때에는 연 20%의 이자가 붙었다.

국정원은 법원의 결정에 따르라며 피해자들을 채무자 취급했다. 77명의 피해자에게 지급받은 491억여 원 중 대법원이 인정한 배상금 280억 원을 제외한 금액, 그 이상을 달라고 요구했다. 2011년 1월 대법원 판결 이후부터 갚지 않은 기간에 대해 이자를 포함해 돌려달라고 했다.

연 20% 지연이자는 빚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이 씨의 경우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씨가 반환해야 할 돈은 그가 받은 배상금을 훨씬 웃돈다. 이 씨는 배상금으로 10억9000만 원을 받았는데, 현재 그가 국정원에 돌려줘야 하는 돈은 13억7000만 원 수준이다.

더 나아가 국정원은 돈을 갚지 않는다며 인혁당 피해자의 재산을 압류하고 강제경매에 돌입했다. 이는 피해자들에게 큰 압박이었다. 국정원의 초강수 대응에 빚까지 내서 돈을 줄려준 이도 있다.

창복, 추국향, 전영순, 나은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국가폭력으로 삶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도 억울한데, 받은 돈을 반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을 받아내겠다는 국정원의 의지는 대단했다. 실제로 경매절차가 진행됐다. <셜록>의 ’고리대금업자 국정원‘ 보도 이후 경매를 진행하는 지방법원이 <셜록> 기사와 피해자들의 탄원서를 보고 경매 일자를 계속 미뤘다고 알려졌지만, 이런 분위기는오래가지 않았다. 경매 일자는 결국 잡혔고, 유찰될 때마다 최저 매각가격이 갱신됐다.

‘언제 경매일이 잡힐까’ 노심초사하던 중, 지난해 5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 나경일 씨의 딸 나은주 씨의 집이 채권자 국정원에 의해 경매로 팔렸다. 인혁당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고 나경일 씨의 딸 나은주 씨가 배상금을 돌려주지 않자 국정원은 나 씨 집에 대해 경매를 진행해고, 결국 지난해 5월 헐값에 팔렸다.

그렇다고 빚이 다 탕감된 것도 아니다. 국가배상으로 나은주의 네 형제가 각각 받은 돈은 4억5000여만 원. 연 20% 지연이자 때문에 각 형제의 채무액은 금세 8억 원이 됐다. 지난해 5월 집이 경매로 팔리면서 채무액은 이보다 줄었지만, 네 형제의 ‘빚 고생’은 여전하다. 국정원은 아직도 채권자다.

이창복 ⓒ셜록

이창복과 추국향, 전영순이 부동산 강제경매 집행에 대해 이의 소송을 제기한 것은 나은주 씨의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무렵이다. 세 사람은 소송 그 자체보다 소송 과정에서 조정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 부당이득금 규모가 받은 배상금을 훌쩍 넘긴 탓에 채권자 국정원과 조정이 필요했다. 그렇게해서라도 채무액을 줄이고 싶었다.

세 명 담당 재판부는 모두 달랐다. 재판 진행 속도 역시 달랐다. 상대적으로 빨리 진행되던 추 씨의 재판에서 고무적인 결정이 나왔다. 인혁당 피해자 고 정만진 씨의 아내 추국향 씨가 지난 10월 31일 서울중앙지법(재판장 정완)으로부터 화해권고결정을 받았다. 

“이 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위하여 당사자의 이익, 그 밖의 모든 사정을 참작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부당이득금 사건의 판결에 따른 채무는 존재하지 아니함을 확인한다. 피고 국정원은 강제집행신청 사건이 있는 경우 이를 취하하고, 강제집행에 관한 권리를 포기한다.” -2019년 10월 서울중앙지법

국정원은 재판부의 ‘화해권고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정원은 추 씨의 집을 경매해서라도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추 씨의 소송은 화해권고결정 이전으로 돌아갔다.

국정원은 이 씨 재판부가 내린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따르지도 않았다.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이란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성립되지 않을 때 법원이 직권으로 조정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결정 역시 당사자가 2주 안에 불복 의사를 밝히면 없던 일이 된다. 국정원이 그렇게 했다.

앞서 이 씨 사건을 맡은 서울고등법원(판사 손철우)은 “이창복이 배상액 일부를 먼저 갚으면, 경매를 취하하자”고 지난 6월 국정원에 조정안을 내놓았다. “지연이자는 면제하고 이창복이 부당이득금 원금 4억9000만 원 중 2500만 원을 먼저 갚으면 경매를 취하하자”고 했다.

“원고 이창복이 피고 국정원 소속 공무원들의 중대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돌이키기 어려운 큰 피해를 입었고, 이창복이 평생 겪은 고통과 아픔이 국가배상제도만으로 온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터이다. (중략) 원고 이창복이 2020년 7월 31일까지 2500만 원을 내면, 피고 국정원은 강제경매신청을 취하한다. 원고는 2023년 6월까지 나머지 4억700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 2020년 6월 25일 서울고법 제 9민사부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

이 씨는 조정 과정에서 재판부에 ‘이자를 뺀 원금이라면 갚겠다’ 뜻을 전달했고, 재판부는 이 씨의 뜻을 국정원 측에 전달했다. “지연이자를 빼고 돈을 상환하기 시작하면 경매절차를 취하하라’ 권고했지만, 국정원은 끝내 이 안도 거절했다. 국정원이 조정안을 거부하면서 이런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이미 배상액을 변제한 채무자들이 많고, 법원이 부당이득금을 받아도 좋다고 판결을 내린 이상 이창복만 예외로 둘 수 없다.”

조정이 무산되면서 이창복의 집이 경매로 넘어갈 확률은 커졌다. 청구이의 소송 1심에서 패소했기 때문에, 2심에서 반전이 일어날 확률은 크지 않다. 상고한다고 해도 대법원이 이창복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희박하다. 추국향과 전영순 씨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에 돌려줘야 할 부당이득금 규모는 집을 팔아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나은주 씨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여전히 수억 원의 빚을 안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로 살아가지만, 연 20%에 달하는 연체이자율은 피해자의 목을 매일 옥죄고 있다.

이창복 ⓒ셜록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19년 2월 20일, 국가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당시 인권위는 인혁당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다.

“인혁당 피해자들이 부당이득금 반환 문제로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조속히 해소하고, 국민 보호책임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도록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흘렀다. 청와대로부터 별 반응이 없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