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역에서 내려 강창덕 선생님을 뵈러 가는 택시 안. 택시기사는 걸쭉한 사투리로 지난 대선을 회상하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대선에서 승기(勝機)를 잡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끌끌 혀를 찼다.
“북한에 돈 다 퍼주면 나라 말아먹는다 안 캅니까? 그나마 보수가 믿을 만하지요.”
서울에서 KTX를 타면 2시간도 안 돼 도착하는 대구. 하지만 민심은 수도권과 판이했다. 19대 대선에서 대구는 홍준표 후보(45.4%)에게 문재인 대통령(21.8%)의 두 배가 넘는 표를 줬다.
대구가 ‘보수 1번지’로
불리는 이유다
후텁지근한 불볕더위를 뚫고 도착한 곳은 강 선생님이 일러주신 사무실이었다. 강 선생님은 대구의 근대 문화가 잘 보존된 ‘진골목’ 근처에 민주화운동 원로들을 위한 사무실을 만들었다. 2009년 8월에 받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 배상금으로 마련한 곳이다.
강 선생님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앞장섰다. 지은 지 30년은 됐을 법한 낡은 건물 안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누런 변기가 훤히 보이는, 문이 언제 뜯겼는지 모를 화장실이 있었다. 복도는 한낮에도 어스름했다. 강 선생님은 복도 초입에 ‘민주화운동원로회‘ 붓글씨가 적힌 문을 열었다.
“이 기자. 여기 오면 추모부터 해야 해요. 추모하고 인터뷰합시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애국 열사들의 초상화가 꿉꿉한 냄새를 바로 잊게 했다. 교과서에서나 본 열사들의 얼굴을 마주하니 낯설면서도 알 수 없는 감격이 밀려왔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쓴 구한말 인물부터, 1970년대 청년 노동운동가까지 총 7명의 초상화가 한반도기 위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강 선생님은 가쁜 숨이 진정되자마자 지팡이를 내려놓고 7명의 영전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90년 세월의 질곡이 담긴 두 손으로 향에 불을 붙이고 정성스레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찬찬히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초상화 속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읊조렸다.
“전봉준 녹두장군님. 허위 의병대장님. 김구 임시정부 주석님. 김창숙 독립운동가님. 여운형 근민당 당수님. 조봉암 진보당 당수님. 전태일 노동 열사님. 명복을..빕니다..”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정당을 만들었다고 사형된 조봉암,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역설하다 우익 테러단체에 의해 암살당한 여운형 등 소위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은 인사들이 대다수였다.
강 선생님은 ‘보수의 심장’ 대구에서
매일 같이 그들의 영을 기렸다
마치 그 공간이 대구 안의 또 다른 분지(盆地) 같이 느껴졌다. 아흔의 노인이 항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을 해오다 목숨을 잃은 열사들을 홀로 여태껏 추모했다는 점이 왠지 쓸쓸하게 다가와서 나는 몰래 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조선의 모스크바‘였던 대구
놀랍게도 대구의 옛 별명은 ‘조선의 모스크바‘다. ‘대구에서는 보수당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근래 우스갯소리와 달리, 대구는 본래 항쟁의 도시로 불렸다. 항일투쟁, 노동운동, 좌익운동의 근거지였다.
1907년 일본의 차관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뜻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 1946년 미군정의 폭압에 대항한 10월 항쟁, 1960년 이승만 독재에 맞서 고교생들이 시위를 벌인 2·28 대구민주운동 모두 대구에서 일어났다.
강창덕 선생은 자신이 수감됐던 당시 서울 형무소 내부를 돌아보며 연신 깊은 숨을 내뱉었다. ⓒ 셜록
박정희는 진보적인 대구가 싫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당근과 채찍을 써서라도 대구를 제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당근으로 쓴 별책은 고위 관료직에 대구 등 영남 인사를 대거 기용하는 것이었다. 영남 지역에 충성파를 늘리면서 자연스레 지역감정의 싹을 틔웠다.
채찍은 좌파 세력 숙청이었다. 대대적인 공안 사건에 영남 혁신계 인사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씨를 말리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에 벌어졌다.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 외교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대해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혁당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저항 세력 입막음용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당시 관련자 중에는 압도적으로 영남 출신이 많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역시 박정희의 유신 체제 유지용으로 활용됐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반대 대학생들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 제멋대로 명명하고 관련자들을 사형하겠다고 엄포를 넣으면서 그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영남 인사들의 피바다를 불러왔다.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 전부가 영남 출신이었다. 형을 집행 받은 25명을 모두 따져보면 그중 80%인 20명이 영남 출신이었다.
대구에 살던 강창덕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구에서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지하신문 <참소리> 창간을 준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 뽑히듯 끌려갔다.
인혁당 사형수 8명 모두
대구 등 영남 출신
강창덕 선생은 자신이 수감됐던 당시 서울 형무소 내부를 돌아보며 연신 깊은 숨을 내뱉었다. ⓒ 셜록
투옥할 때도 차별은 이어졌다. 이들은 진짜 간첩보다 더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강창덕은 8년 8개월의 수감 동안 무려 7년 8개월을 독방에서 생활했다. 이따금 다른 수감자들을 만나도 ‘빨갱이’라며 손가락질받았다. 0.75평 남짓 독방에서 그가 온종일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독서뿐이었다.
강창덕 선생이 감옥에서 받지 못한 가족 사진들. 사진 뒷면에는 여전히 ‘검열’ ‘반려’ 등의 도장이 찍혀있다. ⓒ 셜록
심지어 가족사진 반입조차도 금지됐었다. 세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가족사진은 늘 반려됐다. 사진 뒤편에 ‘검열’이나 ‘출소 시까지 반려’라는 도장을 찍어 아내에게 돌려보냈다. 강창덕이 마음껏 가족 사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8년 8개월의 형을 다 마친 후였다.
강창덕은 늘 박정희를 증오했다.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그를 죽였지만, 정작 그가 피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분통함이 배가됐다. 젊음도, 가족도, 사회 정의도, 모두 앗아간 박정희에게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했다는 한(恨) 때문이다.
전주 교도소에서 홀로 씁쓸함을 감내하던 강창덕은 짧은 시를 만들어 찢어진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 놈은 잡았는데, 내가 못 잡아 한이로다
남이 잡은 그 놈이니, 시첸들 뒤져보랴
언제나 그날 오면 부관참시는 내가 하리
– 강창덕 자작시 (1979년 10월 26일)
강창덕 ⓒ 셜록
34년 고통은 계산되지 않았다
끝났던 고통이 또다시 시작된 것은 2011년 1월 손해배상 소송 대법원 판결 이후다. 강창덕은 2009년 8월, 손해배상 1심에서 인용된 금액의 3분의 2인 15억 2,200여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이 2011년 1월, 갑자기 지연손해금 발생일을 바꾸면서 강창덕이 받아야 할 34년 치 고통의 대가가 다 날아가 버렸다.
대법원, 34년 치
지연 이자를 삭제하다
설상가상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자 국정원은 2013년 7월 강창덕에게 부당이득반환 청구소송을 냈다. 삭제된 34년 치 이자금을 반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2009년 1월 대법원 판결부터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연체 이자금까지 달라며 소를 제기한 것이다.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구금, 가혹 행위, 고문을 통해 사건을 조작한 중앙정보부의 후신(後身)인 국정원이 한순간에 채권자로 돌변한 것이다.
강창덕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30여 년간 가족 모두가 ‘빨갱이’로 낙인찍혀 소외 당하고, 못 배우고, 못 먹은 설움의 대가가 다시 가해자에게 뺏긴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8년 8개월의 형을 끝낸 이후에도 강창덕 가족의 삶은 늘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있는 듯 암울했다.
“도대체 제가 뭘 부당하게 받았다는 말입니까? 지를 고문실에 다시 끌고 가는 거나 다름없지요. 이거 완전히 경제 고문 아닙니까?”
날아간 이자 이율은 연 5%,
돌려줘야 할 이자 이율은 연 20%
연 5%의 지연이자가 과하다는 이유로 34년 치 이자가 없어졌는데, 사라진 금액을 반환할 때에는 연 20%의 이자가 붙었다. 사금융 계에서나 통용될 연 20%에 달하는 이율은 반환금 몸집을 빠르게 불려 나갔다.
결국 강창덕의 빚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에 37만 7,700원씩 늘어났다. 2013년 10월 기준 8억3,300만 원이었던 반환금은 2017년 6월 기준 13억 원을 넘겼고, 내년 10월에는 받은 돈보다 돌려줘야 할 돈이 더 많아진다.
“배상금 받아가 30여 년 간 빚진 돈 다 갚고,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 만들고, 민주화 운동 단체에 기부했는데 다시 내놓으라 카네요. 이게 나라면 우째 그럴 수 있습니까?”
강창덕이 받아야 할 34년 치 이자를 지워버린 대법원의 근거는 이러했다.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라 그때부터 이자 계산을 하면 이자가 너무 많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은행이 10년 저금한 사람에게는 10년 치 이자를 주면서, 30년 저금한 사람에게는 이자가 많다며 1년 치 이자를 주는 꼴이나 다름없다.
모호한 이유를 대기도 했다. 30여 년 사이 변한 통화가치와 물가, 국민소득수준도 이자 삭제의 이유가 된다고 말하면서, 그 구체적인 기준과 수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왜 이자 계산의 시작점이 사실심 변론 종결일이 되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장기간‘ ‘상당한‘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로 판결을 내렸다.
“불법 행위시와 변론 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 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 2011년 1월 27일 대법원
종전의 판례는
불법 행위 성립일부터
손해배상채무 지연금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판결은 수십 년간 확고하게 반복됐고, 예도 수없이 많다. 2007년 인혁당 사형수 8명의 유가족 46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중앙지법은 사형 집행일인 1975년 4월 9일부터 연 5%의 이자 지급을 명하며 다음과 같은 판결을 냈고, 피고인 대한민국은 항소를 포기했다.
“국가가 우 씨 등 8인을 적화 통일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바라는 이들로 몰아 소중한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희생자 및 가족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줬다. 30년간 사회적 냉대, 신분상 불이익과 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은 유족들에 대해 국가는 금전으로나마 위로할 의무가 있다. 이 사건은 과거 유신정권이 정통성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시기에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특수한 불법 행위로서 국가가 구차하게 배상청구권의 시효가 지났다며 책임을 면하려 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 2007년 8월 21일 서울중앙지법
“정권 바뀔 때마다 법도 바뀝니까? 잃어버린 제 34년의 세월은 어디서 보상받습니까?”
강창덕의 반환금은 내일도 37만 7,700원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