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복 씨 계십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며칠 전이다. 유달리 추웠던 지난 2월 말,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남성이 이창복(84)의 집 주변을 뱅뱅 돌았다. 누군가 예고 없이 경기도 양평 산자락에 있는 집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낯선 이의 방문은 분명 이례적이다.

이창복의 아내는
43년 전 그때가 떠올라
순간 얼어버렸다

1974 5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집에 구둣발로 들이닥쳐 남편을 검은 차에 구겨 넣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 기억으로 부부는 여태껏 외식도 외출도 꺼린다. 그런데 대문밖에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이창복 씨 부동산 압류 결정 난 거 아시죠? 감정평가사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이창복의 아내 박인순(81)의 손끝이 떨렸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계속 피할 수 없었다. 박인순은 축축한 손을 바지에 훔치고 조심스레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감정평가사는 감정평가 명령서와 함께 신분증을 보이며 다시 보챘다.

“수원지방법원 부동산 강제경매 결정에 따른 겁니다. 문 좀 열어주십..”

“가시오! 문 못 엽니다. 돌아가시오.”

“잠깐만, 여보. 그러지 마요. 순리대로 합시다.”

박인순과 감정평가사 사이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창복이었다. 잠깐 사이 이창복은 모자와 안경을 걸쳐 손님맞이 차림을 갖추었다. 이창복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 안으로 그를 정중히 안내했다. 그 모습은 마치 집을 파는 사람과 집을 사는 사람 사이처럼 보였다.

“여기가 서재 겸 안방이고요. 이쪽은 응접실입니다. 사다리를 당기면 비밀 다락방도 나옵니다.”

서재 벽장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일본어로 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부부가 손수 가꾼 작은 텃밭과 한반도 모양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라도 은퇴한 교수의 집으로 짐작할 만했다소박한 세간, 그리고 수북한 책들에서 학자의 집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저는인혁당 재건위사건 피해자입니다 집은 반평생 고초를 겪은 대가로 받은 국가 배상금으로 샀고요. 부동산 강제경매 결정문에는인혁당 쓰여 있어 말씀드립니다.”

이창복 선생이 자신이 수감됐던 옛 서울 구치소를 둘러보고 있다. ⓒ 셜록

경매 결정문에
‘인혁당’ 단어는 없었다

이창복은 흥분하지 않았다. 강제경매 결정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눈앞의 젊은 감정평가사 잘못은 아니었다. 사실 부동산 외에도 압류 예정 품목은 많았다. 각종 보험과 예금, 자동차, 심지어 아내가 카메라와 컴퓨터까지 법원 명령에 따라 재산품목으로 제출했다.

“이창복 씨. 사정은 딱하지만, 예정대로면 경매가 7월~8월 사이에 진행될 겁니다. 참고하십시오.”

크대 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릇, 직접 담근 약술, 서재 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창복은 그런 박인순의 두 손을 꼭 쥐고는 눈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우리 6·25도 겪고, 가슴에 아들도 묻어 보고, 온갖 풍상을 다 거치지 않았소. 온기 없는 마룻바닥에서 8년 생활한 나한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소. “

이창복의 재산을
압류한 채권자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창복 선생이 자신이 수감됐던 옥사 복도를 걸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 셜록

서울대 철학과 학생, 간첩으로 몰리다

이창복은 피난민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1947년, 14살 이창복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 해방촌에 정착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뒤로는 전국을 다니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는 물론, 깡통 지붕 공장과 두부 공장을 전전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악덕 업자들은 어린 이창복을 늘 자기 배 불리는 데 이용했다.

어린 이창복의 눈에도 삶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해방촌 바로 옆 남산에 올라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다.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공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로 불렸던 이창복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늘 한이었다. 죽을 힘으로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명동 인근 미군기지 근처 PX와 사진 현상소에서 어깨너머로 영어를 터득하며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1958년, 25살이 이창복은 결국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당당히 입학했다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이창복은 독일어에 끌렸고, 자연스레 독일 철학에 관심이 갔다. 그중에서도 임마누엘 칸트가 청년 이창복을 매료시켰다. 칸트는 인간을수단 아닌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했다이를 실현하는 나라는 ‘목적의 나라’이고, 곧 이것이 평화로운 나라와 세계를 만드는 책무라고 했다.

칸트의 국가 철학,
청년 이창복을 사로잡다

하지만 배움과 현실은 상충했다. 이창복이 박사과정을 준비하면서 국민대와 명지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1970 , 박정희 정권의 독재는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박정희는 1972년 10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헌법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유신 체제를 만들어 헌정 질서를 파괴했다.

박정희 본인조차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 같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남북 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 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은 체제 개혁을 단행하여야 하겠다는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특별 선언 발표 일부

‘김대중 납치 사건’도 터졌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선에서 불과 94만 표 차이로 고배를 마신 뒤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후 김대중은 다리 치료 차 일본 도쿄를 왕래하며 국외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그가 걸리적거렸다. 수년간 밀착 감시하다가 1973 8 8 김대중을 일본의 호텔에서 납치했다.

“화물을 부칠 때 쓰는 넓은 테이프로 코만 남기고 모두 감쌌다. (…) ‘바다에 던져지는구나’ 생각했다. (…) 두 팔을 앞으로 묶어 50kg 정도의 물체를 달고, 발에도 같은 무게의 물체를 매달아 상하좌우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 1973년 8월 14일, 동아일보 김대중 인터뷰 일부

철학자 이창복은 분노했다. 유인물을 뿌리거나 띠를 두르고 데모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학자로서 추락하는 나라가 염려됐다그는 뜻이 같은 친구들과 사회와 국가의 정의에 대해 논의하며, 대학 내 유신 반대 목소리를 조용히 지지했다. 관련 학술 연구에도 힘썼다. 학계와 언론계 등 사회 각계 지식인들이 주도해 만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반유신 활동에 참석했다.

이창복 선생은 43년 전 서울 구치소로 끌려왔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 셜록

학자의 소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교편을 내려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인간을 도구로 써서는 된다 가르치면서, 인권을 짓밟는 작금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검은 옷의 사람들이 이창복의 삶을 앗아갔다. 해외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박정희 정권, 국민을 정치적 수단으로 쓰다

자본주의 없애고 공산주의 국가 만들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 불었어. 너도 입 열어.”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고문 기술자들은 이창복을 침대봉으로 온몸이 시커메지도록 구타했다. 비명을 못 지르게 천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도 않은 일을 기억해내라며 밤새 시멘트 바닥에 눕히고 발로 걷어찼다. 붉은 피로 바닥이 얼룩졌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여기 잡혀 왔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모두 놀랄 겁니다.”

칸트가 꿈꾸고 이창복이 배웠던목적의 나라 정반대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독재 정권 유지용으로 철저히 이용했다. 국가가 국민 이창복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창복은 살고 싶었다. 사실대로 얘기해도 고문 기술자들은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전기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젖도 안 뗀 막내 아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몸이 망가지면 출옥 후 가장 역할을 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소신을 버리고 거짓 진술서에 날인했다.

아내 박인순은 그때까지도 남편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랐다. 사라진 남편을 찾느라 3주간 잠을 이루고 있었다. 남편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신문에서였다아이들이 놀랄까 밤새 혼자 숨죽이다, 이튿날 새벽 박인순 혼자 서대문 형무소(당시 서울 구치소)로 향했다.

남편의 행방 신문에서
처음 접하다

인혁당 관계자는 면회가 금지됐지만, 박인순은 몰래 다른 면회자 뒤꽁무니를 따라붙었다. 운이 좋았다. 박인순은 종이로 가려진 창문 틈 사이로 초점 잃은 눈의 남편을 봤다.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삭히고 남편을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고인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첫 면회가 허락된 1975년 4월 9일. 박인순은 안양교도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사형이 새벽에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비보를 전해 들은 이창복은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다. 오랜 친구였던 김용원, 이수병 등 8명의 죽음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사람과 나라를 아끼는 이들이었다.

다른 수감자들에게도 8명 사형 집행 소식은 충격이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효순을 비롯해 수감자 모두가 절망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방이 시멘트로 막힌 수감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더 슬펐다. 맘껏 소리 내 울 수도 없었다.

“(노래)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그 때 김효순이 옥사 창살 너머로 김소월이 쓴 노래 <산유화>를 추모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수감자들도 하나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가사에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아 읊조렸다. 슬픔 젖은 추모곡이 한동안 안양교도소에 잔잔히 퍼졌다.

고문 트라우마대인기피증우울증

이창복은 8년간의 투옥 중에도 학자의 자질을 숨기지 못했다. 몸도 제대로 눕히기 힘든 좁은 감방에서 프랑스어와 중국어를 독학했다. 한 글자도 몰랐던 그가 출소 즈음엔 원어로 적힌 <레미제라블>과 <아큐정전>을 읽었다.

프랑스어 중국어 독학해
8년 뒤 원서 읽어

1982년 삼일절 특별 사면으로 나온 이창복은 바로 번역 일을 했다. 그만큼 실력이 있었다. 역자에 이창복의 이름을 올릴 수는 없었지만, 번역료로 아내 손목에 시계를 사서 걸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다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창복은 대형 학원에 강사를 지원했고 바로 합격했다. 하지만 신원 증명서에긴급조치 위반이라 적힌 보고 학원은 바로 퇴짜를 놨다. 차선으로 선택한 것은 독서실이다. 이창복은 세 자녀를 가르치며 독서실 학생들도 챙겼다.

학생들은 이창복 교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이창복은 외국어 학원을 차렸다. 그 뒤 여러 학생이 손꼽히는 유명 고등학교와 대학에 줄줄이 입학했다. 잘 나갔다. 다만 이창복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고문 트라우마로 인한
‘대인 기피증’이었다

“선생님, 저희 애가 영어가 좀 약해서 상담을..”

“죄..죄..죄송..합니다. 제가.. 오..오늘은..바빠서..다음에..”

학생들을 상대할 때는 괜찮았지만, 학부모와 마주하면 자꾸 고문기술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트라우마는 남녀 구분 없이 발동됐다. 얼굴이 벌게지고, 손에 땀이 흥건해져 학부모와 상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실 이창복은 교도소에 있는 내내 신경안정제를 달고 살았다. 불면증에 우울증도 있었다. 아침이면 종종 극단적인 생각이 일어 이창복을 괴롭히곤 했다.

이창복 선생은 43년 전 서울 구치소로 끌려왔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 셜록

과거 청산약속 국정원, 8 만에 채권자로 돌변

오랜 암흑기가 지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 이창복의 삶에 처음으로 빛이 들었다. 근 30년 만의 일이다. 김대중 정부는 2000 10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만들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공식 인정했다. 고문 후유증과 경제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조사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발족해 인혁당 사건의 은폐되고 왜곡됐던 사실들을 2005년 12월 바로 잡았다. 인혁당 사건의 가해자인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정원이 직접 자성의 목소리를 것이다보고서 끝부분에 “국가 차원의 적절한 배상과 보상이 국정원과 다른 국가기관의 책임 하에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붙였다.

<국정원 과거사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 조사 목적 국정원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모범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함.

– 2005년 12월 7일, 국정원

그 후 모든 것이 일사처리로 진행됐다.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의 가족들이 재심을 신청해 2007년 1월 무죄를 선고받고, 반년 뒤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국가가 과거사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무기수 유기수 가족 77명도 용기를 냈다. 2008년부터 잇따라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2009년 8월 배상금의 65%를 가지급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 법원이 태도를 바꿨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절반이 지난 2011 1, 대법원이 지연손해금 발생일을 바꾸면서 무기수 유기수 피해 가족들이 겪은 30 년치의 이자를 삭제하는 판결을 내렸다.

근거는 황당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통화가치와 물가가 많이 변해 과거의 이자를 줄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는 곧 30 년치 고통을 부인하는 판결이었다.

이창복 ⓒ 셜록

박근혜가 취임하자
상황은 최악에 치달았다

과오를 인정하며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약속한 국정원이 8 만에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국정원은 2013년 7월, 인혁당 사건 피해 가족 77명에게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삭제한 30여 년치 이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연체 이자금까지 붙여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창복은 항소와 상고까지 했지만, 법원은 세 번 모두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연간 20% 연체 이자율은 4 9,000여만 원이었던 반환금액을 배인 9 7,000여만 원까지 금세 불려 놓았다말년을 보낼 양평의 집마저 국정원에 뺏길 처지가 됐다.

정권에 따라 법의 잣대가 바뀌나요? 5년마다 저희에 대한 입장은 왜 매번 달라져야 하나요?”

철학자의 길은 무산됐지만, 철학적 배움을 계속 실천한 그다. 2009년, 10억 9,000여만 원의 배상금을 가지급 받은 이창복은 그간의 빚과 변호사 비용을 뺀 금액 중 상당수를 사회에 기부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를 위한 재단 ‘4∙9통일평화재단 4∙19혁명 정신을 계승하는사월혁명회단체 등에 냈다.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직접 찾아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을 찾아가 돈 봉투를 내밀었다. 여생을 보낼 집 하나를 제외하고는 평생 돈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칸트의 도덕적 행동에는 조건이 붙지 않아요. 그 자체로 바람직한 일이면 이유를 막론하고 합니다. 저는 늘 그럴 뿐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철학자의 말로가, 그를 망친 가해자 국정원의 손에 또다시 위태롭게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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