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통금 2시간 전. 아래층에서 ‘경찰이다!’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와이셔츠 차림 남자 셋이 별안간 전창일 집으로 들이닥쳤다. 경찰이 아닌, 중앙정보부 사람들이었다.

전창일(당시 46살)은 바로 술상을 박차고 문 앞을 막아섰다. 알코올에 몸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사이 이재문은 재빨리 다락방에 몸을 숨겼다. 당시 이재문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교육책으로 지명돼 공개 수배 중이었다.

빨갱이 책들이 왜 이렇게 많아?”

전창일은 안도했다. 그들은 다행히 다락방이 아닌 서재로 향했다. 용공(容共) 서적, 이른바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책들을 찾는 데만 혈안이었다.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장 자크 루소가 쓴 책 <민약론(民約論)>은 그냥 두면서, 제목을 우리말로 바꾼 같은 책 <사회계약론>은 뽑아갔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관련 없는, 시중 서점에서도 파는 책이었다.

‘사회’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라면 막무가내로 집어갔다

전창일은 두려울 게 없었다. 죄가 없었기에 잡혀가도 책잡힐 게 없다고 봤다.

“전창일. 여기 뭐 때문에 들어왔어?”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 아니오?”

그가 끌려간 곳은 서대문형무소(당시 서울구치소)였다. 교도관은 그에게 수감 사유를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이유를 몰랐다퇴근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영장 없이 납치돼 잡혀 왔으니 당연했다.

1974년 5월 2일의 밤공기는 유달리 서늘했다. 그의 몸을 데우던 취기마저 가시자 금세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솜이 제멋대로 엉겨 있는 푸른색 이불을 덮고, 전창일은 시멘트 바닥에 누웠다.

페인트가 벗겨진 천장을 보자 차차 모든 게 실감이 났다. 밤새 울고 있을 세 딸과 아내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회사 생각도 났다. 전창일은 곧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공사 수주를 따러 출장을 갈 예정이었다.

신세가 역전된 것은 불과 3~4시간 사이였다. 건설회사 중역에서 부지불식간에 구치소 수감자가 됐다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몰라 조용히 허공만을 응시했다. 비좁은 독방의 정적을 깨는 것은 고양이만 한 쥐뿐이었다.

전창일 선생이 자신이 수감됐던 옛 서울 구치소를 둘러보고 있다. ⓒ 셜록

“이 역적놈들아, 천년 만에 잡은 정권을 순순히 내놓을 줄 아냐!”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인사법은 무참했다. 전창일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사관들은 야전침대 봉으로 그를 사정없이 팼다. 이미 봉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피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수사관은 자신이 정한 정답을 뱉을 때까지 계속 ‘족쳤고’ 전창일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맞았다.

손목과 발목을 밧줄로 묶어 그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거꾸로 매다는 이른바 통닭 구이고문부터, 두 손을 꽉 묶고 전기줄로 감은 후 기계를 돌리는 전기고문까지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다.

전창일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신께서 죄를 묻는다면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 운동에 필사적으로 투쟁하지 못한 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통일 운동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생업을 핑계로 활동 전면에 나서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다. 죄책감은 남몰래 경제적 후원을 하는 것으로 씻곤 했었다.

고뇌도 잠시,
고문은 모든 생각을 잠식했다

수사관은 무릎 꿇은 그의 허벅지 위로 구둣발로 올라가 협박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서울대 최종길 교수도 이렇게 죽였어. 너 같은 놈 죽이는 건 아무 문제 안 돼. 데모하는 대학생들 너희들이 뒤에서 지원하면서 국가 전복 꿈꾼 거 아니야? 다른 놈들이 다 불었어.”

피범벅이 된 그에게 수사관이 내보인 것은 이수병의 자필 진술서였다. 도무지 이수병의 글씨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글씨는 형편없었다. 삐뚤빼뚤 눌러쓴 듯한 모습에서 고문의 흔적이 보였다기자 출신답지 않게 문장은 흐트러져 있었고, 내용은 거짓투성이었다.

우홍선의 진술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조선 학생운동은 애국적인 거사’라고 한 북한 방송에 대해 머리를 위아래로 끄떡이며 ‘옳은 말이야’라고 말했다는, 허무맹랑한 진술을 수사관은 그대로 베껴 쓰라고 협박했다.

날조의 방식은 마치 만능 방정식 같았다. 모나미 펜 한 다스를 통째로 써가며 쓴 각자의 생애 기록은 입맛대로 재조립돼 모두가 간첩이 되어 있었다. 우연한 만남은 없었다. 커피숍에서 친구들끼리 수다를 떤 것조차 국가 전복을 위한 지하당 수립 획책으로 바뀌었다.

뻔한 조작을 강요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조서면서, 수사관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쓴 것으로 하라고 했다. 전창일은 그때까지 중부경찰서 문턱 한 번 밟아보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또 있다. 인혁당 재건위 대한 명칭은 공소장과 대법원 판결문 어디에도,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가 아니라 ‘인혁당 재건단체’라는 모호한 말로 조직을 규정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졸지에 인혁당 서울지도부 위원이 된 전창일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윽박질러서 있지도 않은 조직의 서울 지도부를 6인으로 설정해 놓고, 다시 고문실에 끌려갔을 때는 5인, 그 다음에 끌려갔을 때는 4인으로 고쳐 쓰라고 했다. 박중기, 김달수가 그 무렵 구속 중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뺀 것이었다.

“왜 자꾸 사람 수를 줄이는 겁니까?”

“네 입장에서도 희생자를 줄이는 게 좋지 않겠어?”

전창일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8년 8개월을 투옥했다. ⓒ 셜록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전창일의 목을 점점 옥죄어 왔다. 억울함을 토로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독방 생활은 이를 가중시켰다.

재판 내내 인혁당 사건 수감자 간의 소통은 철저히 금지됐다다른 수감자들이 원성을 낼 정도였다. ‘인혁당 사람들이 뒤로 통방(通房) 못하고 곱징역을 살게 됐다고 불평했다. 화장실 쪽 작은 창문 사이로 이웃 감방의 수감자끼리 대화하는 낙이 없어졌으니 그럴 법도 했다.

비밀 쪽지로 서로의 안부만 겨우 확인했다. “찐~빵~”을 외치며 장사를 하는 수감자에게 영치금을 떼어 주는 조건으로 몰래 옆 옥사에 있는 친구들과 짧은 글을 주고받았다. 반가운 건 사실이었지만 이내 외로움이 밀려왔다.

철창 너머로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창일은 누구보다 () 계시는 어머니가 보고싶었다서울 대학에 입학하겠다며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챙겨 주시던 어머니가 그리워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이윽고 대법원 판결일
1975년 4월 8일이 다가왔다

전창일은 피고인이었지만 판결이 어떻게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함과 불안함에 끼니도 거른 채 마냥 허공만 보고 있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틀 전 옥사 청소 담당 수감자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벽돌만 한 작은 구멍에 얼굴을 들이대더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듯 전하고 자리를 떴다. 당시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급히 지시가 떨어져 사형장을 청소했다는 것이었다.

“육군대령이 구치소에 와서 보안과장을 만나는 걸 봤소. 그러더니 과장이 나에게 오전에 사형장을 청소하라더군요. 청소를 마치니 육군대령과 보안과장이 직접 사형장을 둘러보고 갔소.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소.”

전창일 선생이 자신이 수감됐던 옛 서울 구치소를 둘러보고 있다. ⓒ 셜록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지만 전창일은 무심해지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와 관련된 대화는 중앙정보부 6국 ‘윤 계장’과도 나눴었다. 윤 계장은 사형 집행 며칠 전 전창일을 따로 불러내 ‘사형수 명단에 빠졌으니 안심하라’고 언질을 줬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형 선고는 사법부의 일이었지만, 중앙정보부와 서울 구치소는 이미 판결 결과를 아는 눈치였다.

역시 다음날, 낌새가 이상했다. 기상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간수들은 깨우려고 들지 않았다. 일어난 사람에게는 도로 누우라고 호령했다. 그는 불안했다. 오로지 감방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허락된 세면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곧장 서도원의 방으로 내달렸다. 교도관이 호루라기를 부르며 제지했지만 힘으로 뿌리쳤다. 서도원은 사형 선고를 받은 8 명이었다.

“서도원! 서도원! 어디 있소! 서도원! 어디 갔소!”

“오늘 새벽에 떠났습니다..”

“무슨 말이요? 떠나다니?”

“모두들 통일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잘 사시라 하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전창일은 창살을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불길함은 적중했다
서도원이 죽었다

당시 대법원은 피고인은 물론 변호사조차 출석시키지 않은 준비된 판결문을 10 동안 읽은 상고를 기각했다. 집행도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형 확정 18시간이 지난 1975년 4월 9일 새벽 4시 55분, 서도원이 사형수 8명 중 가장 먼저 교수대 마루청에 발을 올렸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각, 8명의 젊은 목숨이 새벽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전창일은 주먹을 움켜쥐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유신 체제를 만든 박정희 때문이라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 위원회>

· 전격적인 사형집행 경위 관련  –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순시에서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가 되고, 내란음모죄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발언 (1975년 2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은 “큰 사건의 판결이 났으니 법무부장관이 빨리 보고하자 조기 집행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언급 (2005.9.22, 이용택 면담 결과)

– 교도관 김용표 “사형 전날 퇴근도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언급 (2005.10.18 김용표 면담 결과)

평범한 아내, 민주화 열사가 되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전창일 가족은 2층 양옥집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경제적 고통만큼 정신적 고통도 심했다. 어디를 가도 감시감독과 대중의 손가락질이 따라다녔다.

무엇보다 보안 경찰의 감시는 생업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보안 경찰은 매일같이 전창일의 아내 임인영이 운영하던 양장점에 찾아와  빨갱이 집에 와서 굳이 옷을 맞추냐며 손님들에게 엄포를 놓아 찾는 이의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럼에도 임인영은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는 게 급했다. 임인영은 처지가 같은 부인들과 함께 구명운동을 시작했다다행히 외국 선교사들이 먼저 손을 잡아줬다.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조지 오글 목사는 해외 기자들까지 불러들여 국제사회에 인혁당 조작 사실에 대해 알렸다. 유엔 인권위원회에 낸 진정서는 7개 언어로 번역돼 외신에 실렸고, 영국 BBC는 특집 다큐멘터리 방송(Anno Domini BBC)을 만들어 방영했다.

임인영 선생의 사진 ⓒ 셜록

실질적인 구명 효과는 미비했다. 가족과 변호인 접견 제한은 풀리지 않았다전창일은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 일주일 전에야 변호사를 접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나마 운이 좋은 축이었다. 황현승, 나경일은 대법원 재판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변호인 접견을 하지 못했다.

엄정독거(嚴正獨居)
완전격리(完全隔離)

상부에서는 인혁당과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깜깜이 재판이 가장 문제였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가족들과 외신들의 재판 방청을 막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리가 협소하니 가족 중 한 사람만 방청을 허락합니다. 외신 기자들의 경우 재판 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으니 출입을 제한합니다.”

임인영은 중앙정보부에 직접 따지고 싶었다. 어떻게 고문했고, 어떻게 가짜 진술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부터 임인영은 잡혀갈 각오로 집회와 기도회에 나가 기회가 나면 마이크를 잡았다. 인혁당은 고문으로 조작됐다! 공개 재판하라!’ 외치며 진실의 메신저가 되길 자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청량리경찰서 소속 경찰이 찾아왔다. 임인영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중앙정보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피고인 가족 10명이 붙잡혀 있었다

내 남편 취조하고 고문한 수사관 데려오시오! 시중에서 파는 책 증거로 가져가고, 사람 바글거리는 다방에서 국가변란 모의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입을 함부로 놀려? 저년 고문실로 데려가.”

“그럽시다! 우리 남편이 받았다는 고문, 나도 받아 봅시다.

임인영은 굽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증거를 내놓으라고 주장했다. 취조관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공판기록을 꺼냈다. 다행히 임인영이 참석한 재판의 기록을 보여줬다. 임인영은 떨리는 손으로 ‘전창일’ 남편 이름 석 자를 찾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남편의 답변이
달라져 있었다

국가 변란을 모의했습니까?’ 물음에국가 변란 모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하지 않았습니다답한 말이, 했습니다 바뀌어 있었다. 그 뒤 백방으로 뛰며 조작임을 알렸지만, 날조된 공판 조서는 결국 수정되지 않았다. 대법원은 가짜 공판 조서에 의거해 형을 확정했다.

고 임인영 선생에게 딸 전재연이 쓴 편지 ⓒ 셜록

임인영의 고초는 그 후 더 심해졌다. 의상실로 생계를 이어 나가던 중, 박정희 유신말기 최대의 공안 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임인영이 인혁당 사형수들의 옷을 거두어 남민전 깃발을 만드는 걸 도왔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긴 취조 끝에 혐의가 풀리긴 했지만, 당시 받은 고문은 임인영을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불을 끄면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평생 우울증과 싸우다가 2003년 11월 29일 간경화 치료 중 운명했다.

투옥 생활을 마치고 나온 전창일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위해 계속 싸웠다. 전국민주화운동연합(전민련)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족) 활동에 참여하다가 또다시 수차례 법정투쟁과 옥고를 치렀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는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고문에 이름 올리기도 했다. 전창일은 북에 있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현재까지도 몸을 사리지 않고 통일 전선에서 뛰고 있다.

전창일 선생이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가족사진을 들어 보여주고 있다. ⓒ 셜록 

은행 빚이 국정원 고리대금보다 나았다

아버지 어머니의 불행은 딸 셋의 불행이기도 했다. 교우들과 손을 잡고 교정을 거닐어야 할 세 딸은 부모님의 고행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점차 의기소침해졌다. 공부는 당연히 뒷전이 됐다. 어머니 임인영을 도와 먹지를 깔고 호소문을 베껴 썼고, 집안일을 셋이 분담해야 했다2009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세 딸을 포함한 전창일 일가 모두에게 국가의 폭력 행위에 대한 대가로 배상금을 지급했다.

끝났다고 생각한 악몽은
2013년 7월 다시 시작됐다

국정원이 2013년 7월 인혁당 무기수 유기수 피해 가족 77명에게 제기한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전창일의 삼녀 전재연은 인터뷰 내내 상기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우리가 전두환처럼 국고를 훔치기라도 했나요?”

전재연은 그 뒤 어머니 임인영의 뒤를 이어 호소문과 탄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 자매 중에서 전재연이 어머니의 이목구비를 가장 많이 닮기도 했다.

전재연은 손해배상 소송 대법원의 판결을 납득할 수 없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인혁당 피해자 77명에게 지급한 배상금의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며 34년 치 이자를 삭제하는 판결을 내면서 제시한 근거는 허술했다.

쉽게 말해 너무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 그때부터 이자 계산을 하면 이자가 너무 많아 없다는 논리였다. 불법 행위 날로부터 ‘장기간 세월이 흘러,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변동이 생겼다고 하면서 ‘장기간과 상당한의 기준은 없었다. 장기간의 세월동안 오히려 고통이 가중됐다는 걸 고려하지 않았다.

“불법 행위 시와 변론 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 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 행위 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 2011년 1월 27일 대법원

“인혁당이 과거사 손해배상의 스타트였어요. 지금은 당연시된 형사보상 청구도 우리는 안 했어요. 민사소송인 손해배상 청구부터 했죠. 어떻게 보면 더 받을 수 있는 데 안 받은 거죠.”

되려 가지급 받았던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토해내야 했다. 전재연은 2009년 8월 가지급 받은 배상금 6억 1,900여만 원에서 변호사 비용과 4·9통일평화재단 기부금을 뺀 5억 원가량의 돈으로 주택을 샀지만, 현재는 다달이 빚을 막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사금융 쪽에서나 통용될 법한 연 20%에 달하는 연체 이자율이 감당이 안 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것이다.

2011년 1월 기준 국정원에 반환해야 할 금액은 2억 8,000여만 원지만, 2014년 10월 실제로 국정원에 돌려준 돈은 4억 2,600여만 원이었다. 1 4,000여만 원의 돈이 연체 이자액이었다.

국정원의 이율보다
은행 이율이 쌌다

어떤 은행도 연 20% 이자율을 적용하지 않았다. 20% 연이율은 반환금을 눈덩이처럼 불렸고, 전재연은 급한 대로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갚았다.

전재연의 언니 둘도 마찬가지였다. 전경애, 전경란, 전재연의 통장에서는 국정원의 반환금을 갚으라 빚진 대출 이자금이 매달 빠져나가고 있다.

“낸 돈 다시 돌려줄 필요 없이 당시 수사관이나 법조인들 8년 8개월 형 살게 하고 똑같이 고통 주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깟 배상금 다 뱉어놓을 테니까요.”

아버지 전창일과 어머니 임인영의 고통 값은 은행 이자가 되어 셋의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전창일 ⓒ 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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