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으니까 사직서 놓고 나가요

3년 세월을 정리하는 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허망함에 헛웃음과 함께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보도 본부장실 문을 두드리기까지 수없이 주춤거린 순간들이 애석했습니다. 기자 준비 3년, 기자였던 3년이 그렇게 1분의 사직서로 막을 내렸습니다.

욕은 못해도, 당차게 퇴사 이유만큼은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 퇴사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후배의 만류가 옳았습니다. 수첩에 적었던 소회의 글은 애초에 말이 될 운명이 아니었나 봅니다. 가능성 하나만 보고 붙여준 참 고마운 회사였는데, 나올 때 알았습니다. 저는 여기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공채 1기’ 개국 공신

한때는 이 말이 자부심이었습니다. 명함을 내밀 때면 내 이름 석자보다 회사 소개를 먼저 했을 정도로 회사에 애정을 다했습니다. 함께 한 식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역 방송, 신문사 등에서 이직해 온 선배들은 마이크 잡는 법부터 잠입 취재하는 법까지 자신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유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귀태 (鬼胎), 즉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세간의 비난에 “기우였다”고 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대는 종편 개국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꺼졌습니다. 기존 언론 문화를 탈피하겠다던 회사는 진전이 아닌 퇴보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념 편향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 것은 물론, 시청률만 높일 수 있다면 ‘카더라’ 보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짜릿한 발언을 토해내는 막말 패널들의 출연을 반겼습니다.

막내 기자인 저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이름만 빌려주는 허울뿐인 기자였습니다. 어느 날은 확인조차 불가능한 북한 주민들의 마약 중독 사실에 대해, 어느 날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은 김연아의 남자친구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기사라는 감투를 씌운 채 말입니다.

사실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거나, 단독 보도이거나, 시청률을 올려줄 아이템이면 그만이었습니다.

‘과연 기자란 어떤 존재일까’ 원점에서 언론인의 역할을 생각해봤습니다. 감춰진 진실을 끝까지 추적해 밝히고, 자본과 권력을 감시하며,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대리인이 바로 기자입니다.그렇게 배웠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단 한번도
기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감춰진 진실을 보도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를 끝까지 추적 못했고, 오히려 자본과 권력에 가까이 섰습니다. 무엇보다 약자 편에 서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군 가혹행위 피해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고작 기사 몇 개 내보내고 돌아섰습니다.

나는 왜 종편을 떠났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처 말 못 한 종편에서의 기억들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사직서를 들고 보도 본부장을 찾아가 말하려고 했던, 진짜 제 퇴사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작 글 하나로 작금의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과, 정론직필을 위해 내부에서 싸우는 기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많은 기자들이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내부 고발의 이유로 제도권에서 영영 퇴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밝혀야 합니다

이 글은 진실 탐사 그룹 <셜록>에 함께하는 제 다짐의 글이기도 합니다. 기사만 툭 던지고 말았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탐사∙심층 보도 중심으로 한 언론의 필요성을 말하려 합니다. 셜록을 후원하는 친구 ‘왓슨’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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