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영국 리버풀역에서 오전 9시 57분에 출발한다. 질(Jill)은 오늘도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는 버치우드(Birchwood)역 워링턴(Warrington) 법정. 그동안 몇 번 이 길에 섰을까. 26년을 달려왔지만, 갈 길이 남았다.

질의 인생은 1989년 4월 15일부터 달라졌다. 그날 셰필드 힐스보로 구장에서 FA컵 준결승전 축구 경기가 열렸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타가 맞붙었다. 고향팀 리버풀 팬인 질은 힐스보로 구장 서쪽 관람석에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 경기장 통제를 맡은 경찰은 사람을 계속 입장시켰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살려줘! 숨을 못 쉬겠어!”
“그만 밀라고!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
“움직일 수가 없어! 죽을 것 같아!”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철책을 넘어 운동장으로 넘어갔다.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한 경찰은 살기 위해 철책을 넘는 사람을 다시 관람석으로 떠밀었다. 일부는 2층 관람석으로 아슬아슬하게 피신했다. 경기는 시작 휘슬이 울린 지 6분 만에 중단됐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힐스보로 구장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압사사고를 우려한 사람들은 관람석 윗층으로 아슬아슬하게 대피하기도 했다. ⓒ유튜브 화면 캡쳐

때는 늦었다. 압사사고,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고로 96명이 사망했고, 766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 절반은 10대였다. 이 광경은 영국 전역에 TV로 생중계됐다. 영국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살아남은 질은 현장에서 모든 걸 지켜봤다. 그녀의 나이 18살이었다.

보수당의 대처 행정부는 곧바로 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은퇴한 대법원 판사 테일러가 위원장을 맡았다. 위원회에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경기장 경비와 안전을 책임진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의 방해와 조작이 시작됐다. 언론에 이상한 말도 흘렸다.

“훌리건 탓에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일부 관중이 술에 취한 채 경기장에 들어와 난동을 부렸습니다!”

영국에도 ‘기레기’가 있었다. 일부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참사로 사망한 사람은 ‘난동자’가 됐고, 살아남은 사람은 손가락질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참지 않았다. 생존자 질도 마찬가지다.

1989년 4월 15일 발생한 힐스보로 참사 현장에 있었던 질(Jill). 그녀는 26년 지난 지금도 참사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싸운다. ⓒ박상규

“한동안 미디어에서 생존자인 저와 같은 사람을 욕하기도 했어요. ‘같이 난동을 부렸으면서 너는 운 좋게 살아 남았구나’라는 식으로요.”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은 집요했다. 질은 그때의 경찰을 지금도 기억한다.

“경찰이 생존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때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난동을 부렸잖아!’라는 식으로 다그쳤어요. 그들은 진실을 찾으러 온 게 아니었어요.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만 얻으려 했어요. 하지만 저는 현장에 있었고, 모든 걸 봤습니다.”

경찰은 무엇이 두려웠을까. 경찰은 참사 당일 평소 사용하지 않는 출입구를 열어 인원수 파악 없이 사람들을 입장시켰다. 출입구에서 관람석까지는 좁은 터널로 연결돼 있다. 관람석에서 이미 압사사고가 발생하고 있는데, 경찰은 사람들을 계속 밀어 넣었다.

힐스보로 구장 측도 문제였다. 참사 발생 이전에 안전 사고를 우려하는 경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했다. 구장 측은 터널 리모델링 공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부했다. 예산 부족 등의 이유를 들었다.

테일러 위원장의 진상조위원회는 8개월 뒤인 1990년 1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사위원회는 “경찰은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답변을 회피하는 등 조사에 협조적이지 않았다”며 이렇게 결론 내렸다.

‘참사의 책임은 경찰에게 있다. 이들은 통제와 응급 대처에 실패했다.’

경찰의 방해, 그리고 법적 책임자가 불명확한 사고사라는 결론. 유가족은 이에 만족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다. 응급구조 절차와 사망원인, 명확한 사고 책임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새로운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끼 잃은 부모’는 물러서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전태일의 엄마 이소선, 이한열의 엄마 배은심,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이 그러했으며, 지금의 세월호 유가족이 그러하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힐스보로 구장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참사로 96명이 사망했다. ⓒ유튜브 화면 캡처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들은 조직을 구성해 싸웠다. 여러 변호사가 이들을 도왔다. 영국 국민들도 이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1997년 노동당 정부 때 진상조사위가 새로 출범했다. 그래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가족은 멈추지 않았다.

참사 발생 20년 만인 2009년 독립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독립조사위는 45만 건의 문서를 분석하는 등 치밀하게 재조사를 했다. 참사 발생 23년 만인 2012년 9월, 새로운 진실을 담은 보고서가 발표됐다. 캐머런 영국 총리가 직접 의회에서 대국민사과를 발표했다.

“경찰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164개의 진술을 조작했습니다. 경찰 지도력 부재 등 부정적인 언급 116개를 삭제했습니다.”

그는 한 국가의 총리로서 사죄하고 힐스보로 유가족들에게 존경의 말을 헌사했다.

“23년이 지난 후에도 이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 정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일은 희생자 가족의 일일 뿐만 아니라 리버풀과 영국 전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96명의 희생자 가족이 23년간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옳습니다. 힐스보로 희생자 가족들과 정의를 향한 그들의 오랜 여정을 지지해 준 그 공동체의 놀라운 힘과 위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어떤 것도 죽은 이들을 되살릴 수 없겠지만, 그 어떤 것도 가족들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23년간의 싸움, 세 번의 진상조사위 출범, 마침내 밝혀진 진실의 큰 조각, 희생자 가족에게 사죄하며 경의를 표하는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놀랍지 않은가.

힐스보로 참사는 세월호 참사와 비슷하다. 

많은 10대 희생자, 생중계된 참사 현장, 사고의 원인과 구조에 책임 있는 사람들의 발뺌, 희생자 가족에 대한 비난, 수많은 ‘기레기’의 탄생..

다른 점도 많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이 지났지만 진실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아직 출범도 못했다. 참사가 발생한 그날 그 순간에 대통령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국민은 아직 모른다. 고작(?) 1년 지났는데 사회 곳곳에서 “이제 그만 좀 합시다”는 말이 나온다.

1989년 힐스보로 참사로 가족을 잃은 메리(왼쪽)와 들로레스. 메리 가슴에 힐스보로 참사로 사망한 96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배지가 붙어 있다. ⓒ박상규

생존자 질은 워링턴 법정으로 가는 기차를 혼자 타지 않았다. 희생자 가족 메리(Mary), 들로리스(Delores)와 동행했다. 아니, 반대로 진실을 향한 희생자 가족들의 여정에 그녀가 동참한 것이다.

18살이었던 그녀는 이제 44살, 세 아이의 엄마다. 아직도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싸운다. 이유를 물었더니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진실을 위해서요.”

20년 넘게 싸워 진실을 밝힌 힐스보로 유가족. 304명의 가족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은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할까. 세월호 유가족이 탑승한 진실을 향한 기차는 언제 어디에서 멈출까?

수십 년을 싸워 마침내 진실을 밝혀낸 사람들. 이들에게 길을 묻기 위해 영국 리버풀로 날아왔다. 영국에서 5년째 거주하는 김나나 씨는 런던, 리버풀, 워링턴, 셰필드, 북아일랜드를 오가며 희생자 가족 등 여러 관계자들을 만났다. 독립조사위에 참여했던 인사도 인터뷰했다.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겠다.

1989년 4월 15일 발생한 힐스보로 참사로 96명이 사망했다. ⓒ리버풀 구단 홈페이지

그런데, 질과 힐스보로 희생자가 가족이 왜 워링턴 법정에 갔느냐고? 놀랍게도 힐스보로 유가족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영국 정부도 이를 돕고 있다. 희생자들의 사망원인을 규명하는 힐스보로 청문회(Inquest)가 새로 진행되고 있다. 정말 집요한 사회와 유가족, 이들이 한국의 우리에게 묻는다. 

“세월호 유가족이 탑승한 진실을 향한 기차에 동승할 용기가 있나요?”

(박상규 기자가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긴다는 걸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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