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김나나 작성

필자는 영국에서 5년째 거주하고 있으며 프리미어리그 구단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힐스보로 참사는 프리미어리그 축구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영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된 사건이다. 본 취재 기획을 듣고 영국쪽 취재와 기사를 맡기로 한 뒤, 힐스보로 참사 진상조사에서 한국이 배울 수 있는 점을 찾고자 필자는 영국 리버풀 동부 웨링턴 지역에서 열리는 힐스보로 청문회로 향했다.

웨링턴지역, 힐스보로 청문회로 가는 길 안내판. ⓒ김나나

예상은 했지만, 7월 16일  휴이트 형제(형 칼 휴이트 Carl Hewitt, 동생 닉 휴이트Nicholas Hewitt)의 청문회는 심적으로 바라보기에 힘든 부분이 많았다. 사건 당시 16세, 17세였던 두 형제는 현장에서 모두 사망했다. 하루 아침에 아들 둘을 모두 잃은 어머니는 유난히 형제애가 끈끈했던 두 아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아이들은 축구광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둘이서 뒷마당에서 축구공을 차며 놀았고 좀 크면서부터는 친구들을 모아 팀을 나눠 축구를 했죠. 닉은 형을 유난히 따랐어요. 나는 아들들에게 항상 얘기했어요. 어디에 가든 꼭 둘이 붙어 있으라고. 너희는 형제니 어디가든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애들은 열혈 리버풀 팬이었고 모두 시즌권 보유자였죠. 사건이 나던 날에도 준결승전이라며 아침부터 설레서 힐스보로 구장까지 둘이 버스를 타고 갔어요. 그리고 나는 아직도 왜 축구를 보러간 내 두 아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와야 했는지 알지 못해요.”

휴이트 형제의 어머니는 사건이 난 후 그 충격으로 아들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리버풀 내 지인들 집을 전전하던 그녀는 영국 남부로 이사했고 본 청문회 2주전 사망했다. 휴이트 형제의 아버지는 이 충격으로 현재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며, 이날 휴이트 형제의 청문회는 유족 없이 법정대리인만으로 진행되었다. 휴이트 형제의 변호사는 유족의 사망과 연락 두절에도 사건을 계속 맡고 있다.

청문회에서 법정 측은 그간의 조사로 모은 당시 경기 BBC 중계화면, 구장내 CCTV화면 등을 시간대 별로 배열해 관중들 속에서 희생자와 증인의 모습을 좇아간다. 휴이트 형제가 구장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의 들뜬 얼굴, 스탠딩석 안으로 진입한 후 사방에서 들어오는 압박에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 사람들의 물결에 펜스 앞으로 밀쳐진 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30분이 지난 후 형제는 각각 필드의 반대편 위치에서 누워 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재킷으로 칼(Carl Hewitt)의 얼굴을 덮고 간다.

특히 동생(Nicholas Hewitt)의 마지막 모습을 좇는 비디오 클립은 청문회장의 많은 이들을 흐느끼게 만들었다. 첫 화면에서 동생은 귀여운 빨간색 리버풀 응원 모자를 쓰고 형과 신난 얼굴로 구장에 도착한 모습이었다. 스탠딩석에 들어선 후 군중에 밀려 형과 떨어지게 되자 크게 당황하며 불안한 눈동자로 형을 계속 찾는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형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려 애쓰지만 마음과 다르게 자꾸 사람들에 의해 밀려난다.

형은 동생에게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팔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는다. 몇 분 뒤 화면, 형제는 용케 재회하는데 성공했는지 동생은 훨씬 안도한 얼굴로 형 옆에 나란히 서있다. 엄마는 형제에게 말했다. 어디에 가든 너희는 꼭 붙어 있으라고. 하지만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형제는 3시 30분 이후 각자 필드 반대편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둘은 모두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디오 클립이 멈춘 뒤에도, 동생의 불안해하는 눈동자와 구급차로 옮겨질 때 열여섯 살 소년의 축 늘어진 두 팔이 너무 생생하게 남았다. ‘왜 나는 이런 힘든 일을 자청했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불현듯 스치는데 내 옆에 있는 메리(Mary Corrigan, 힐스보로 당시 10대 아들을 잃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탈리나(Catalina Kim, 필자의 영어이름), 나 방금 비디오 클립에서 내 아들을 세 번 보았어”

오늘 청문회는 메리 아들의 청문회도 아닌데 메리는 다른 유가족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청문회에 매일 온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1년 4개월째 청문회를 오고 있기에 청문회에 오면 아들의 죽음을 다시 상기시킬 자료들을 보게 되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척 봐도 백여 명은 더 되는 군중 안에서 자기 아들의 얼굴을 찾아낸 엄마라는 이름의 사람이었고, 다른 자식을 잃은 엄마를 위해 이 자리에 올 용기를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청문회는 이렇게 유족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사건 직후 힐스보로 유족들 사이에도 이견과 갈등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청문회를 통해 다른 사람의 아이가 죽은 마지막 과정을 함께 보고 서로를 공감하는 법을 배웠으며 본인이 가진 아픔에도 타인의 아픔마저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청문회는 이렇듯 단순히 진실을 찾는 것 이상의 사회적 기능을 했다. 사회 갈등과 아픔을 해소하는 기능 말이다. 청문회에서는 유족도 질문권을 가진다. 유족에 대한 위로의 기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힐스보로 때 남동생을 잃은 한 누나는 청문회에서 구급차에 싣기 직전 동생이 맥박이 없었다는 증인의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감사해요.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거 하나였습니다.(Thank you. That was all I wanted to hear.)”

그녀는 평안을 찾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로써 26년 만에 비로소 남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심리학적으로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종결(closure)’이 필요하다. 이 청문회는 사건조사의 기능을 넘어 유족에게 사건 당일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게 해줌으로써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도왔다. 

힐스보로 청문회가 열리는 웨링턴 법원 정경. ⓒ김나나

청문회는 유가족뿐만 아니라 당시 경기장에 있었던 생존자들에 대한 위로 기능도 했다. 한 아이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던 당시 경기장 관중 중 한 명은 이제 중년이 되어 증인석에서 진술 중 울먹였다. 그는 처음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맥박을 희미하게나마 느꼈기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구급차가 너무 늦게 도착했고, 경찰의 지시는 혼선을 주었으며 결국 아이가 자신의 품안에서 죽어갔다 증언했다.

이 증인의 증언이 끝난 후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이제 할머니가 된 희생자의 어머니는 증인에게 다가가 우리 아들이 필드에 혼자 버려져서 죽지 않았던 것은 당신 덕분이에요. 아들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당신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희생자 가족도 줄을 서 “오늘 나와 준 당신의 용기에 감사합니다”라며 이 남성을 한 번씩 안아주었다. 중년 남성은 어깨를 들썩이며 희생자 어머니에게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렇게 그는 26년을 짓누르던 죄책감을 덜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침략을 당하는 나라였고 희생자의 국가였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아픔을 나눠온 사람의 온정이 있는 사회였으며, 그것은 강대한 외부 세력으로부터 약자인 우리 사회를 뭉치게 한 역사의 원동력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그 사건 자체보다 이후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왜 한국은 상처를 안아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나. 왜 우리는 이념갈등 없이는 문제해결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나. 왜 우리는 관광업을 위해 추모리본을 치워달라는 사회가 되었나.

리버풀은 노동자의 도시이며 가난과 절망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한 이들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했고 도시는 26년이 지난 지금도 힐스보로 희생자 96인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리버풀 시내 힐스보로 추모 기념비 모습. ⓒ김나나

국내에 ‘일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세월호 얘기냐’는 일부 여론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영국 지인들은 크게 놀랐다. 서양 어느 국가에서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재난의 추모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 진실규명을 막지 않는다. 인명은 그 무엇에도 앞선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진실을 찾는 길은 시민의 지지를 받는다.

나 또한 이 취재를 하며 그런 경험을 했다. 무슨 일로 리버풀에 왔냐는 택시기사분들의 물음에 취재내용을 설명드리자 많은 분들이 한사코 돈을 받지 않았다. 힐스보로 사건이 발생한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영국에서는 유가족들에게 식당에서 돈을 받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진실을 찾는데 힘을 보태는 마음으로 한 끼를 대접했다 여겨달라 한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힐스보로 가족을 만나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워주어 고맙다고 한다.

리버풀 구장 내 힐스보로 추모지에 사람들이 지금도 조화를 하는 모습. ⓒ김나나

힐스보로 유가족과 리버풀 시민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을 응원하고 기도할 것이라는 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힐스보로 청문회가 열린 웨링턴법원을 방문한 첫날,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며 손편지를 쥐어주고 간 모녀가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도나(Donna Miller,46) 와 산드라 (Sandra Stringer,67) – 힐스보로 희생자 96인 중 1인인 폴(Paul)의 누나와 어머니 – 동의를 얻어 편지전문을 아래와 같이 공개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슬픔과 조의를 표합니다. 이곳에서 한국분에게 당신들 얘기를 들었고 세월호 유가족들도 진실을 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나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나는 1989년 힐스보로 사건에서 남동생 폴을 잃었어요. 이 청문회는 남동생의 죽음이후 26년 반만의 두 번째 청문회입니다. 우린 포기한 적이 없죠.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직도 진실을 찾기 위해 싸우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언론과 함께 지속적으로 캠페인을 벌이세요.

저희의 마음은 언제나 여러분의 슬픔과 함께 할 것입니다.

  • 폴 누나 도나 폴 어머니 산드라 드림
희생자 폴 누나 도나(Donna Miller, 46, 우측) 폴 어머니 산드라 (Sandra Stringer,67). ⓒ김나나

폴은 힐스보로 사건 당시 19세 소년이었다. 사우스요크셔 경찰은 힐스보로 사건 직후 공식발표에서 피해자들은 티켓도 없이 밀고 들어온 술 취한 관중들이었고 이들의 난동으로 스탠딩석이 통제 불가능했기에 참사가 났다고 거짓발표하였다.

폴은 리버풀 클럽의 시즌권 보유자였으며 재킷 안쪽 주머니에 티켓을 지닌 채 발견되었다. 시신에서는 알코올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 청문회당일 CCTV를 통한 폴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한 비디오 판독 결과 폴은 실제로 다른 좌석으로 가고자 했으나 경찰의 지시에 따라 스탠딩석으로 간 것으로 보여 논란이 되었다.

경찰은 스탠딩석이 이미 포화인 상태에서 굳이 더 많은 사람들을 스탠딩석으로 보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그런 지시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였다. 또한 폴의 시신이 해당 사건이 일어난 스탠딩석이 아닌 경기장 외부 게이트 C 구역 밖에서 발견된 이유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셰필드 힐스보로 구장 내 추모공간 내 위치한 폴에 대한 누나의 추모글 ⓒ김나나

“폴은 경찰이 가라면 갔을 아이에요.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였죠. 우리 아이는 어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요.” – 산드라, 폴의 어머니

힐스보로 사건은 1989년 4월 15일 FA컵 준결승전에서 발생한 참사로 96명의 리버풀 팬이 압사하고 766명이 다치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된 사건이다. 사건 직후 현장 구호작전 실패가 대부분 희생자의 사망 원인으로 지적됨에 따라 영국재난구호대책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가져왔다.

사건 직후 정부, 경찰, 언론의 연결고리로 인한 은폐시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희생자 가족은 독립조사위원회 구성을 주장하였다. 2010년 독립조사위원회의 최종보고서는 적절한 구호조치가 취해졌다면 96명의 희생자중 41명이 살수 있었음을 밝혀내 현 영국 보수당 총수인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의 사과와 사건 재조사를 이끌어 낸 바 있다.

2015년 7월 현재, 최종보고서에 의해 두번째 청문회가 진행중이며 이 청문회 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의 형사처벌이 이어질 예정이다.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긴다는 걸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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