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김나나 작성

“엄마, 나는 어린 시절 엄마와의 추억이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힐스보로에서 죽은 언니를 추억하는 데만 매달려 있었어. 나는 엄마가 내가 자라는 모습들을 지켜봤는지, 그걸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요.”

힐스보로 참사로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는 다른 자녀가 성장 후 이 얘기를 했을 때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고, 아픔을 이기지 못해 가족해체를 겪기도 했다. 그만큼 끔찍한 참사에서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에 대한 회복 지원은 중요하다. 

힐스보로 유가족들은 참사 이후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영국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힐스보로 참사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까지 진실을 찾고 있는 희생자 가족뿐만 아니라 당시 경기장을 찾았던 생존자들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오랜 기간 시달려야 했다.

영국 정부의 재난구호대책은 구조(Response Act)와 회복 지원(Recovery Act)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난이 발생한 지역과 구호 대상이 위치한 지역이 다를 경우 그 담당 부처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영국법은 구조단계에서 회복 지원 단계로 넘어갈 때 책임기관 변경을 검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조를 전문으로 하는 정부부처와 회복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정부부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획 첫 번째 기사에서 언급한 메리(Marry Corrigan)의 막내 아들 대런(Darren Corrigan)의 이야기는 남겨진 희생자 가족들이 참사의 경험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힐스보로 사건으로 큰형 키스(Keith Corrigan)가 죽었을 때 대런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큰 형은 자기 침대에서 어린 대런을 가슴에 안고 음악을 들으며 잠들곤 했다. 5살 이후 형과의 이런 시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집에서는 축구를 한동안 보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는 강한 여자였다. 그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불행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가족이 될 것이라고. 가족들은 다시 죽은 키스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고, 꼬마 대런은 형처럼 리버풀 축구팬으로 자랐다.

리버풀 구장 투어에서 볼 수 있는 힐스보 참사 추모 공간 ⓒ김나나

대런이 리버풀 구단에서 일을 하며 가장 뿌듯했던 날이 있다.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데리고 방문한 형의 친구를 우연히 만났던 날이다.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와 투어를 돌던 중 한 선생님이 힐스보로 추모공간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선생님은 이 날 내가 가장 사랑하던 어린 시절 친구 중 한 명을 잃었어요. 키스 코리건이란 친구였죠.”

대런은 반가움에 소리쳤다.

“제가 키스 형 꼬마 동생이에요!”

둘은 긴 대화를 나눴다. 대런은 이 날 형이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지금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중한 어린 시절 친구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대런과의 만남을 얘기하며 메리에게 “대단한 아드님을 두셨네요(what a remarkable son you have)”라고 칭찬했다.

메리는 “걔는 진짜배기 리버풀 사람(Liverpudlian. 리버풀 출신을 뜻하는 영국표현으로 강인한 북부성향을 주로 상징함)이라 그래”라며 웃었다.

대런은 이렇게 희생자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정면에서 극복하고 있다.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슬픔을 마주 보았으며, 힐스보로 추모지를 지날 때마다 방문객들에게 그 누구보다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만난 리버풀 구단 직원들도 모두 힐스보로와 관련된 대런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의 용기에 존경을 표했다.

힐스보로 참사에서 희생자 가족에 대한 지원과 회복은 영국 정부만이 도맡지 않았다. 시민사회, 특히 리버풀 FC 구단의 활동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리버풀 구단은 대런 말고도 지난 26년간 희생자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리버풀 선수 중에도 참사에서 가족을 잃은 이가 있다. 리버풀의 심장이라 불리는 스티븐 제라드(Steven Gerrard) 선수는 힐스보로 참사에서 사촌 형을 잃었다.  제라드의 사촌 형 존(Jon-Paul Gilhooley)은 당시 10세로 가장 어린 희생자였다.

리버풀 안필드 홈구장. 홈경기 킥오프 직전 팬들은 언제나 기립해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합창한다. ⓒ김나나

나는 취재 초기에 힐스보로 가족들이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참사에도 여전히 리버풀 FC 팬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그들은 여전히 리버풀 경기를 챙겨보며 팀의 동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리버풀의 키플레이어였던 라힘 스털링(Raheem Sterling)의 맨시티 이적 소식이 알려진 지난 2015년 7월 14일, 청문회에 가는 기차 안에서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거짓말쟁이 꼬마 녀석”이라며 한동안 분노를 쏟아냈다. 그만큼 그들은 리버풀 팀을 여전히 아꼈다.

리버풀 시내. 리버풀 머플러를 파는 가판대의 모습. 경기가 있는 날 외에도 성황인 상시 가판대이다. ⓒ김나나

취재를 하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지난 26년간 정부, 경찰, 언론의 은폐 속에서도 꾸준히 희생자 가족에 진정성 있게 다가갔던 기관이 리버풀 구단이었다.

리버풀 응원가 ‘당신은 결코 홀로 걷지 않으리(You will never walk alone)’처럼 리버풀 구단은 희생자 가족이 가는 길에 지난 26년간 함께했다. 

리버풀 안필드 홈구장. 홈경기 킥오프 직전 팬들은 언제나 기립해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합창한다. ⓒ김나나

리버풀 구단은 참사 이후 매년 4월 15일 홈구장인 안필드에서 추모식을 연다. 이 추모식에 구단 직원 및 구단주를 비롯해 리버풀 구단의 모기업인 미국 펜웨이 스포츠 그룹(Fenway Sports Group)의 소유주와 임원진까지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와 참석해 조의를 표한다.

2009년의 추모식은 앤디 버넘(Andy Burnham) 리버풀 지역구 국회의원이 참석해 그 자리에서 진상조사 약속을 하면서 힐스보로 참사의 진실을 찾는 데 일대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구단은 희생자 가족을 위해 정부와 언론의 은폐와 희생자에 대한 매도에 정면으로 맞섰다.

항구, 탄광, 철강 산업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영국 축구문화는 역사적으로 노동자 문화의 잘 보여준다. 노동자들에게 긴 육체노동의 하루를 마치고 싼 맥주와 함께 즐기는 축구경기 관람은 삶의 고단함과 애달픔을 해소하는 출구였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관중 없이 TV 중계로만 경기를 할 수는 없나요?”라고 할 정도로 이러한 노동자들의 문화에 무지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축구문화를 경멸했으며 축구팬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정권과 유착관계에 빠진 영국 언론은 힐스보로 사건 직후 이 사건을 훌리건 난동이라 보도하며, 노동자 문화에 대한 비난과 탄압에 앞장섰다.

특히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악명 높은 타블로이드지 ‘더 선(The Sun)’은 사건 다음날 ‘진실(the Truth)’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거짓 내용을 담은 악의적 특집기사를 냈다.

리버풀 팬들이 부상자를 구호 중인 경찰을 폭행하고 방해했으며,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강탈하고 소녀들을 겁탈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현장에선 초기 대응에 실패해 우왕좌왕하는 응급대원과 경찰들 사이에서 의료자원봉사 경험이 있는 팬들이 심폐소생술을 직접 실시해 많은 생명을 살렸고 광고판을 떼어내 부상자 이동을 도왔다.) 희생자들 대부분 평소 술과 마약에 취해 있었다며 고인의 명예를 모욕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리버풀 구단은 해당 보도 이후 ‘더 선’ 기자의 구장 및 훈련장 출입을 금지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리버풀 구단 선수들은 힐스보로 사건 보도 이후 ‘더 선’과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프리랜서 기자와도 ‘더 선’에는 기사를 주지 말 것을 조건부로 인터뷰에 응한다.  

리버풀 시내에서는 지금도 ‘더 선’을 파는 가판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더 선’을 사지 맙시다(Don’t buy the Sun)”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든 리버풀 팬을 지금도 리버풀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이는 경기 중계 화면에 자주 노출되어 ‘더 선’의 매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리버풀 구단이 마련해 준 희생자가족 위원회 사무실과 구장 VIP용 관람석 가구. ⓒ김나나

공식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공간이 생긴 위원회는 이 사무실을 통해 가족위원회 대표 연락창구를 일원화하여 외부와 소통한다. 미디어와의 인터뷰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전 세계 팬들로부터 오는 편지와 응원 선물도 이곳을 거쳐 가족들에게 전달된다.

사무실 안에서는 홍콩 팬이 보낸 손으로 접은 종이 꽃꽂이 액자부터 조각품, 해외 각 구단 머플러 등이 가득해, 지금도 계속되는 희생자 가족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따뜻한 성원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홍콩에서 리버풀 팬이 보낸 96인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접은 종이 꽃꽂이 액자. ⓒ김나나

리버풀 구단의 이런 진정성 있는 자세는 참사 이후 회복을 위한 노력이 어떠해야 하며, 그것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경쟁 구단도 아픔을 함께 했다. 아스날 FC는 1989년 리그 일정상 힐스보로 참사 직후 리버풀과 경기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리버풀 선수들은 평소 안면이 있던 팬들까지 원정경기에 응원하러 왔다 사망한 상황에서 큰 충격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리그 우승을 놓고 리버풀과 경쟁관계에 있던 아스날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손쉽게 승점 3점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다. 아스날은 힐스보로 참사 다음날 스스로 경기를 연기했다.

영국 축구협회는 일정대로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면 아스날이 몰수패를 당하거나 페널티를 받게 될 것이라며 경고했지만, 아스날 경영진은 “상관없다(We don’t mind)”라고 일축해 리버풀 구단과 팬들에 큰 감동을 주었다.  

이런 아스날의 태도는 다른 구단들의 동참을 불러와 결국 영국 축구협회는 그 주 경기를 모두 취소하고 남은 리그 경기 스케줄을 전면 재조정했다. 이후 영국 축구협회는 지금까지 힐스보로 참사의 아픔을 배려해 4월 15일에는 리버풀 팀의 어떤 경기도 잡지 않는다.

리버풀과 아스날의 연기된 그 경기는 리그 우승컵을 결정짓는 시즌 마지막 경기로 치러졌다. 경기가 벌어진 5월 26일, 아스날은 리버풀 홈인 안필드 경기장에서 리버풀을 2:0으로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야유는 없었다.

리버풀 팬들은 아스날 우승가를 같이 부르며 아스날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이날의 경험은 이후 26년간 ‘철의 동맹’이라 불리는 두 팀 간의 강력한 유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2014년 힐스보로 25주년에는 영국 축구협회의 결정으로 영국 내 모든 경기에서 킥오프가 7분씩 연기되었다.

힐스보로 참사 당시 경기가 전반 6분까지만 진행된 뒤 사고로 중단된 것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6분까지 선수들이 입장하고, 1분간 묵념한 뒤 7분에 경기를 시작한 전국적인 추모였다.

이날 골을 기록한 아스날의 올리비에 지루(Olivier Giroud) 선수는 본인의 골을 힐스보로로 희생된 리버풀 팬에 바쳤다.

지금까지 5회간의 연재에서 본 것처럼 영국 힐스보로 사건은 26년간 진실을 찾는 유가족의 행보를 지지해준 시민들, 리버풀 지역 주민의 정의 구현에 앞장 선 지역 국회의원, 독립적 객관적인 조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독립조사위원회 패널 멤버들, 진정성 있는 태도로 유가족을 지지한 리버풀 구단과 포기하지 않았던 유가족의 힘이 모여 영국 사회의 이성적 반성을 이끌어냈다.

이들이 바란 것은 관련자 처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많은 유가족은 비록 자기 아이들은 짧은 삶을 살고 갔지만, 그 희생 이후 영국 축구구장 내 안정규정이 재검토 됐으며, 보다 안전한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힐스보로 유가족이 26년간 걸어왔던 길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이다.

“사람보다는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는 선례가 있었다. (There was a preference for blaming processes rather than people)”  – 영국 가디언 

영국 ‘가디언’지는 지난해 세월호 사건 이후 관련자 처벌을 중심으로 사건을 잘못 접근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꼬집는 사설을 냈다.

과거 각국에서는 참사 사건을 다룰 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사건 발생 원인 및 구조 과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영국 TV에서는 심지어 선원들이 적절한 구호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면 그들도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찾아낼 때까지, 이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져 시민들이 정부와의 사회적 약속을 신뢰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

힐스보로 유가족의 진실규명 요구는 관련자 처벌보다 사회 시스템의 개선이라는 더 큰 목표를 추구했기에 시민의 지지를 받았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규명하는 것 또한 앞으로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참사와 인재(人災)를 막기 위한 한걸음이 될 것이다.

세월호 가족은 긴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와 무관하지 않은 싸움이기에 그들이 가는 길에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힐스보로 사건에서 리버풀 구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성성’이다. 힐스보로 유가족이 청문회 첫날  첫 번째 요구는 ‘희생자 1번’ ‘희생자 2번’ 등으로 불리던 죽은 가족들을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그 후 청문회에서는 각 희생자마다 생전의 모습과 지인들의 추모글, 학교생활, 가졌던 장래희망 등 희생자가 살았던 삶을 먼저 추모한 뒤 사건의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간다.

유가족이 찾고 있는 것은 진실과 정의이지만 이는 진실된 위로와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세월호 희생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진정성 있는 회복 정책을 펼쳐주기를 희망한다.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긴다는 걸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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