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진도 팽목항에서 오전 9시 50분에 출발한다. 집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저 바다 어느 아름다운 섬에, 가슴 시린 아버지가 있다.

하늘은 흐렸고,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검푸른 바다는 바람에 일렁였다. 16일 진도의 하늘과 바다는 그러했다.

배는 2시간 30분 동안 바다 위를 달렸다. 아버지는 먼 곳에 있었다. 진도군 동거차도,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산 꼭대기가 아버지의 거처다. 카메라 장비가 든 가방을 들고 헐떡이며 산을 오르는 길. 아버지가 마중 나왔다.

“그 가방 이리 줘요.”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해도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딸도 죽었는데, 제가 뭘 가졌겠어요? 이제 가진 게 힘 밖에 없어요. 내가 힘 쓸 테니까, 그 짐 저 주세요.” 

아버지는 기어코 내 가방을 짊어졌다. 이런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걸음을 높은 곳으로 옮겼다.

자식을 잃어 이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아버지. 세월호 참사로 새끼를 잃은 아버지들이 지금 섬에 있다. 청와대 앞, 광화문광장, 국회의사당, 길거리.. 수많은 곳을 거친 아버지들은 이제 섬으로 내려왔다.

2015년 9월,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들이 동거차도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세월호 인양을 위한 작업 모습을 지켜봤다. ⓒ박상규

동거차도 중앙의 산꼭대기, 더는 전진할 수 없는 곳에 아버지들이 진지를 구축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바다로 떨어지는 벼랑이다.

세상의 끝은 저 멀리 있는 특별한 곳이 아니다. 딸, 아들이 죽었을 때 아버지의 세상과 삶은 이미 무너졌다. 세상은 사방으로 뚫려 있지만, 외면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 속에선 어딜 가도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퇴로가 없는 섬의 꼭대기로 올라왔다. 눈을 뜨면 딸과 아들이 눈을 감은 그 바다가 보이고, 눈을 감으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식 얼굴이 보인다. 진퇴양난. 세상의 끝, 그곳이 아버지의 집이다.

어쩔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이니, 똑바로 응시할 수밖에. 그리하여 아버지는 오늘도 자식이 숨진 그 바다를 바라본다.

한 아버지는 바다를 보며 영국의 힐스보로 참사를 알고 있다고 했다. 수학여행 떠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영국에선 축구경기를 보러 힐스보로 구장으로 간 사람 96명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96명 중 절반은 10대 아이들이었다.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에 침몰했고, 힐스보로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절대 다수는 안산에 살았고,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 대부분은 리버풀에 살았다. 안산과 리버풀은 노동자의 도시다.

힐스보로 참사에 책임이 있는 경찰은 진실을 조작했고, 한국의 해양경찰은 배에 갇힌 사람 중 단 한 명도 구출하지 않았다.

한 번 침몰한 배는 저 스스로 떠오르지 않듯이, 감춰진 진실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가까스로 인양된다.

영국의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은 20년 넘게 싸워 진실의 큰 조각을 확인했고, 그들은 참사 이후 26년이 지난 지금도 싸우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죠. 끝까지 가야죠.”

아버지는 아들이 숨을 거둔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 뒤로 해가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는 태양은 바다와 하늘을 붉게 적셨다.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힐스보로 유가족처럼 26년을 싸우면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지난 500 여일처럼 26년을 싸우면 자식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 힐스보로 참사에서 세월호의 미래를 살피는 이 기획의 한국 쪽 이야기는, 동거차도 벼랑 위에 선 아버지들의 사연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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