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된 지 17년 만에, 딸이 탄 배가 바다에서 뒤집어졌다. 아버지의 속도 뒤집어졌다. 배보다 아버지의 가슴이 먼저 침몰했다.

뒤집어져 침몰한 배에서 딸은 숨을 거뒀다. 그날 이후 혼자가 된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이 세상에 더는 내 새끼 하나 없는데, 나는 과연 아버지인가. 저 바다에서 내 새끼 하나 구출하지 못한 내가 과연 아버지인가?“

아픔은 전속력으로 달려왔고, 치유의 길은 막막했다. 새끼 잃은 부모 마음 달래줄 약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상처는 저 스스로 깊어졌다. 아버지는 아픔의 바다에 침몰한 자기 가슴을 매일 인양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살아서 하나를 알아내야 하니까.

“딸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도 제가 아버지잖아요. 그래야 아버지잖아요!”

아버지는 울면 안 된다. 한국 사회는 이 땅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강요한다.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울지도 못 하게 하는 이 죽일 놈의 세상.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기 발로 딸이 숨진 그 바다로 다시 내려왔다. 그 바다에서 운다.

단원고 2학년 3반 고 김소연의 아버지 김진철(56) 씨가 있는 곳은 멀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로 2시간 30분을 가야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섬, 동거차도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 만나러 지난 16일 찾은 섬, 아버지보다 경찰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이 찾아왔다.

“세월호 유가족 만나러 오셨죠? 이름, 소속, 연락처 좀..아니 그냥 명함 하나 주세요.(웃음) 진도경찰서 정보과에 바로 보고를 해야 해서요.”

경찰은 실시간 보고를 위해 바로 떠났다. 우리는 어민의 배를 타고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갔다. 선착장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세월호 인양 준비를 하는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의 대형 크레인과 바지선이 금방 보였다.

“방송 한 번이면 새끼(단원고 학생들)들 다 구했지. 그게 뭐 일이나 되나? 배 밖으로만 나왔으면 우리 어민들이 다 구했지.”

어민 박철용(가명) 씨는 배를 몰면서 말했다. 박 씨는 세월호 침몰 순간에, 세월호 바로 지척에 있었다. 선장, 해경은 “배 밖으로 나오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결국 박 씨는 자기 배에 “새끼들 한 명 태우지 못 하고” 귀항했다.

2015년 9월,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세월호 인양 작업을 진행하는 대형 바지선이 보인다. 동거차도 어민이 현장 인근까지 취재팀을 데려다줬다. ⓒ셜록

방송 한 번 하지 않아, 승객을 구하지 않은 경찰은 이날 신속 정확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게 연락이 왔다. 경찰은 “현장에서 철수하라”고 박 씨에게 명령했다. 목포해경과 진도경찰서에서 각각 두 번, 총 네 통의 전화가 왔다.

“사람 하나 못 구하면서, 이런 건 귀신같이 빨리 알아차리고 명령하네.“

배를 함께 탄 또 다른 어민이 말했다. 정부는 세월호 침몰 현장 인근에 사람들 접근을 막고 있다. 어업 활동도 금지했다. 그 바다에는 세월호 침몰 지점을 알려주는 부표와 대형 크레인뿐이다.

아버지는 사고 지점에서 약 2km 떨어진 동거차도의 산꼭대기에 있다. 바다에서 아버지의 거처는 보이지 않는다. 배를 몰아 아버지의 거처가 보이는 산 아래 쪽으로 갔다. 바위 절벽 위쪽, 아버지가 점처럼 보였다.

해가 섬 너머 서쪽 바다로 떨어질 즈음에 산으로 올라갔다. 규모는 작으나 만만한 산이 아니다. 숨을 헐떡이며 30분 걸어 도착한 능선, 바다보다 푸른 천막이 보였다. 아버지의 집이다.

강한 바닷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천막을 끈으로 꽁꽁 싸맸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아버지 세 명이 산다. 단원고 2학년 3반에서 공부하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의 아버지들이다.

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 한은지 학생의 아버지 한홍덕(49), 최윤민 학생의 아버지 최성용(54).

이 세 아버지들만 이곳을 지키는 건 아니다. 4.16가족협의회 쪽은 9월 1일부터 동거차도 꼭대기에 천막을 설치했다. 세월호 인양 작업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아버지들이 조를 이뤄 돌아가면서 섬으로 들어온다. 9월 셋째 주는 김진철-한홍덕-최윤민 아버지 차례였다.

천막 출입구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가 정면으로 보인다. 천막 앞에는 망원 렌즈가 부착된 동영상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아버지들은 밤낮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자기 딸, 아들이 숨진 그 바다를 말이다.

“바다 보면 윤민이 생각나니까.. 안 오려고 했죠. 고통도 이런 고통이 없어요. 딸이 돌아오지 못한 그 바다를.. 종일 보는 게..”

아버지 최성용 씨는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끝을 흐렸다. 날이 저물면서 스스로 깊어진 바다는 검게 보였다. 저 멀리 거대한 크레인과 바지선이 불을 밝혔다. 검은 바다, 빛나는 불빛. 그곳에서 딸이 숨졌다.

“들어와요. 밥 먹어야지.“

셰프가 저녁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 한홍덕 씨는 이 천막에서 셰프로 통한다. 그가 식사를 도맡아 준비한다. 좁은 천막,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매운탕, 김치로 상이 차려졌다. 생선과 김치 모두 동거차도 어민이 직접 챙겨줬다. 바다에서 자식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어민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아버지의 집은 초라했다. 휴대용 버너, 식기도구, 라면, 인스턴트 즉석 요리 식품, 생수통, 모기약 등이 좁은 천막의 넓은 자리를 차지했다. 화장실, 수도 시설이 있을 리 없다. 세 명이 누우면 천막은 꽉 찬다.

설거지는 휴지로 하고, 마실 물은 산 아래 마을에서 생수통에 담아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오느내려야 한다. 한 차례 오르내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린다.

몇 걸음 옮기면 낭떠러지 절벽, 고개를 들면 자식이 사망한 깊은 바다. 참사로 자식 잃은 부모는 한국에서 이렇게 산다.

“어차피 더 갈 데도 없어요.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싸운다고 오해하고. 일도 못 하겠더라고요. 세월호 관련 일 있으면 일주일에 2~3번 결근해야 하고, 그러면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마음 아프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직장도 그만뒀죠.”

셰프 한홍덕 씨는 흰 쌀밥을 씹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한숨은 깊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잃고, 직장도 잃었다. 모든 걸 잃은 아버지들의 밥 씹는 소리가 천막 안에 낮게 깔렸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막 밖에서 풀벌레가 요란하게 울었다.

“요즘 입맛이 없어서..”

윤민이 아버지 최성용 씨가 셰프에게 미안한지 한마디 하면서 숟가락을 금방 내려놨다. 자식 떠난 바다를 보면서 입맛 돋는 부모 없을 터. 밥이 많이 남았다. 한홍덕 씨는 ‘니들이 안 먹으면 누가 밥 먹니?’ 식으로 나와 사진기자를 바라봤다. 우리는 평소보다 두 배 많은 밥을 먹었다.

최성용 씨는 카메라 앞에 앉아 검은 바다와 크레인의 불빛을 바라봤다. 자식이 죽은 현장을 종일 바라보기, 이렇게 가혹한 형벌이 또 있을까?

“힘들죠. 집에 있다고 마음 편한 것도 아니에요. 집 거실에 딸 사진이 있거든요. 그거 보면 또 눈물이 나와요. 아내도 울고. 그렇다고 그걸 치울 수 없잖아요. 우리 딸인데..”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세월호 인양 작업을 준비하는 대형 바지선 모습. ⓒ셜록

마음이 소금밭인 아버지들이 모두 천막 밖으로 나왔다. 떨리는 눈으로 잔잔한 저녁 바다를 말없이 바라봤다. 산 모기가 사정없이 아버지들의 몸으로 달려 들었다.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잘 알고 있었다.

“기사 봤습니다. 영국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들은 진실을 위해 26년 동안 싸우고 있다면서요. 우리도 진실 밝히려면 그 정도 세월이 걸릴 거예요. 26년.. 우리도 그렇게 싸워야죠.“

소연이 아버지 김진철 씨는 56세, 은지 아버지 한홍덕 씨는 49세, 윤민이 아버지 최성용 씨는 54세다. 아버지들이 살아온 세월에 ’26’을 더해봤다. 숨이 턱 막혔다.

“우리 꼬부랑 할아버지되면 진실이 밝혀지겠죠. 죽기 전까지는 밝혀야죠. 진실을 보고 죽어야죠.“

아버지들은 다시 말 없이 검은 바다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면, 환갑을 넘기고 칠순, 팔순에 이르면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진실을 확인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사방이 어두워졌을 때 산에서 내려왔다. 아버지들은 산 꼭대기, 몇 걸음만 걸으면 추락하는 절벽 위에 남았다. 다음 날 아침 배를 타고 진도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추모 공간은 이제 낡고 초라해졌다. 등대 쪽 노란색 추모 현수막 여러 개가 바람에 뜯겨 자기 마음대로 펄럭였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걸어왔다.

“지저분하게 이게 뭐야. 이제 다 철거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둘 지.. 지겹지도 않나.”

다시 숨이 막혔다.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해당 기사를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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