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김나나 작성

1989년 4월 15일, 힐스보로에서 열린 FA컵 준결승전은 96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당하는 참사로 막을 내렸다. 희생자 중 절반은 10대였다. 

사건은 BBC를 통해 30여분간 전국에 생중계 됐다. 아이가 필드에서 심폐소생술을 받는 모습을 TV로 확인하고 오열한 가족도 있다.

신원확인을 위해 경찰이 희생자 집을 방문 중이라는 소문이 리버풀 시내에 퍼졌다. 한 희생자의 어머니는 문 앞에 서 있는 경찰을 보고 혼절했다.

충격에 빠진 리버풀에선 경찰들의 이상한 행동이 목격됐다. 경찰은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수사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경찰서에 불려간 가족들은 아이가 평소 술이나 마약을 했는지, 학교에서 문제에 휘말린 적은 없는지 등 사고와 관련 없는 질문을 받은 뒤 귀가했다.

경찰의 질문에서 구장의 안전 문제는 빠졌다. 희생자가 술을 마셨는지, 마약을 한 적이 있는지, 티켓을 가졌는지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대개의 희생자 가족들은 경찰이 무엇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경찰은 이 조사를 바탕으로 증거를 짜 맞추고 통계를 조작했다. 경찰은 “티켓도 없이 밀고 들어온 술 취한 홀리건의 난동으로 인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벌어진 참사”로 발표했다.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이를 믿은 영국 시민은 “죽은 홀리건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리버풀 시민들은 뒤늦게 경찰의 초기 수사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경찰은 사실 사건 당일 힐스보로 구장에서 이미 본인들의 귀책을 인지했다. 자신들의 귀책이 진상조사 대상이 될 것을 직감으로 알았을까? 그들은 금세 뭉쳤다. 빠르게 움직였다.

희생자 가족들이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틈을 타 경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했다. 불리한 증거는 없앴다.

2009년 영국 의회가 문서 공개를 명령한 뒤에도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의 힐스보로 관련 내부 회의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해당 문서는 사건 직후 조직적으로 파기된 것으로 추측된다.

은폐와 조작에 나선 경찰의 뒤에는 정부가 있었다. 당시 보수당 당수이자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북부 노동계층을 혐오했다.

대처 집권 초기인 1981년 리버풀에서 노동자 폭동이 있었다. 이때 대처는 경찰의 도움으로 노동자들을 제압했다. 이후 대처는 북부 노동자 문제 관련, 경찰과 긴밀하게 움직였다.

처음 힐스보로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받았을 때 대처는 희생자 가족보다는 경찰 조직을 걱정했다. 북부 노동자 문제를 다시 불거질까봐 우려했다. 대처 정부는 진상조사를 천명했지만 의지는 없었다. 힐스보로 참사는 대처 집권 내내 묻혔고, 진실을 밝히는 일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갔다.

리버풀 시민은 지금도 대처의 진정성 없던 태도와 거짓말에 분노한다. 2012년,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가 사과했지만 리버풀 시민은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마가렛 대처“라고 지적했다.

대처의 죽음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반응 ⓒDaily Mirror
대처의 죽음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반응 ⓒDaily Mirror

2013년 대처가 사망한 직후 열린 선덜랜드 전에서 리버풀 FC 팬들은 “대처는 거짓말을 하고도 상관 안 했지, 우리도 너가 죽든 말든 상관 않는다. (You didn’t care when you lied. We don’t care that you died)” “딩동,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 96인에게 정의를!(Ding dong, the Witch is dead. Justice for the 96.)” 등이 적힌 현수막을 흔들었다.

힐스보로 참사 약 1개월 뒤, 유가족은 첫 공식 모임을 가졌다. 정부의 진상조사 명령이 있었기에 유가족은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었다.

유가족 중 한 명인 트레버 힉스(Trevor Hicks, 힐스보로 사건으로 10대 두 딸을 잃음)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런던에서 사업체 6개를 운영했다.

그는 사건 당일 딸을 데리고 직접 경기장에 갔다. 그는 현장에서 본 경찰의 통제 실패가 단순 실수를 넘은 것이라 판단했고 거대한 은폐 시도를 예상했다. 정부의 진상조사 명령이 있었지만, 트레버는 유가족들에게 선언했다.

“가족 여러분, 우린 아주 긴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옳았고 26년이 지난 지금도 힐스보로 가족의 진실을 향한 싸움은 진행 중이다. 그는 싸움을 위해서 희생자 가족을 조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위원회를 탄생시켰다.

믿었던 진상조사는 한 달 만에 “관중 과잉 수용과 경찰 통제 실패”가 참사 원인이라며 서둘로 마무리된다. 정부, 영국축구협회,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책임은 언급되지 않았다. 영국 검찰은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포기했다.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위원회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요구했다. 영국의 청문회 제도는 한국과 달리 사법부에서도 이루어지며 주로 논란이 되는 사망사건과 관련해 실시된다. 청문회는 피고인을 특정하지는 않지만 진상 규명 및 사망사건의 원인을 밝히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망사건의 원인이 살인인지 과실치사인지 사고사인지에 따라 추후 기소가 결정돼 형사재판에 넘겨지면 피고인의 죄목이 달라진다. 청문회 실시는 관련자 처벌의 첫 단추인 셈이다.

1990년 열린 첫 청문회에서 영국 사법부는 잘못된 의학적 추정을 바탕으로 경찰과 응급기관의 초기 대응 실패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1991년 발표된 청문회 최종 결론은 ‘사고사’였다. 관련자들의 고의나 과실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고 형사재판 없이 사건은 종료됐다.

최소한 과실치사를 예상한 희생자 가족은 물론 리버풀 시민은 청문회 결론에 분노했다. 정의를 원했던 시민들은 유가족들을 돕는 한편 관련자 처벌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영국은 우리나라의 검찰 기소에 해당하는 ‘크라운 프로시큐션 서비스(Crown Prosecution Service)’ 외에 별도로 ’프라이빗 프로시큐션 서비스(Private Prosecution Service)’라는 사적 기소 제도가 있다.

검찰 측이 불기소 결정한 사건에 대해 개인이 일정한 공탁금을 걸고 기소를 신청하여 형사재판을 열 수 있는 제도이다.

1997년 리버풀 시민들은 ‘힐스보로 진실을 위한 콘서트(Hillsbourough Justice Concert)’를 통해 희생자 가족에게 이 공탁금을 마련해 주었다.  

‘힐스보로 진실을 위한 콘서트(Hillsbourough Justice Concert)’ 당시 콘서트 팸플릿.

2000년,  힐스보로 유가족은 사우스 요크서 경찰서장 데이비드 더킨필드(David Duckenfield)를 비롯한 두 책임자를 형사기소 했다. 하지만 배심원 의견은 5:4로 나눠지며 평결에 도달하지 못했고, 재판장은 “더 이상의 재판은 피고인들에게 가혹하다”면서 재판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뒤에도 리버풀은 힐스보로 희생자들을 잊지 않았다.

안필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힐스보로 참사 20주년 추모행사에서 지역 국회의원인 앤디 버넘(Andy Burham)은 추모사를 읽었다.

여기저기서 “96인에게 정의를!(Justice for the 96!)”이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현장에 모인 인 2만8000명 리버풀 시민 모두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버넘 의원은 결국 추모사를 중단해야 했다. 그는 의회에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진상조사를 다시 열겠다고 리버풀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버넘 의원은 시민과 한 약속을 지켰다. 버넘 의원은 의회로 돌아가 사건과 관련한 정부 문서 공개 청구 의안을 제출했다.

영국 정부는 의안을 받아들여 ‘정부 문서 30년 비공개 원칙’을 깨고 힐스보로 사건에 한해 예외적으로 문서 공개 명령을 내렸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유가족이 참사 원인을 밝혀줄 정보에 접근권을 갖게 된 순간이다.

유가족 위원회는 객관적 수사를 이행할 수 있는 독립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009년 힐스보로 독립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독립조사위원회는 2백만 건의 문서 접근권을 가졌고 약 2년간 어떠한 정부, 이익단체에서도 철저히 독립된 조사를 시행했다.

2012년 독립조사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힐스보로 사건에서의 정부, 영국 축구협회, 셰필드 웬즈데이 FC,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 언론의 귀책 및 첫 청문회의 의학적 오류 등을 증명해냈다.

특히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의 조직적 은폐와 증언·증거의 인멸 및 조작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 영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독립조사위원회는 정부의 초기대응이 적절했다면 희생자 96명 중 41명은 살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영국 총리를 비롯한 관련 기관의 공개 사과를 이끌어냈고, 정부는 첫 청문회의 오류를 인정하고 두 번째 청문회를 명한다.

2015년 8월 현재 기준, 영국에서는 2014년 3월 31일부터 두 번째 힐스보로 청문회가 시작돼 새로운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다. 올해 말로 예상되는 본 청문회 최종 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이어질 예정이다.

길고 긴 이 싸움 끝에 힐스보로 유가족이 진실을 찾는데 영향을 준 결정은 두 가지다. 정부의 관련 문서 공개결정과 독립조사위원회 출범이 그것이다. 그만큼 정보의 투명성과 조사의 독립성의 확보는 진실규명에 절대적이다. 

세월호 참사는 선진국이 아닌 한국에서 벌어진 인재가 아니다. 참사는 선진국에서도 빈번히 일어난다.

정의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수도 없는 좌절에도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았던 힘은 어디서 비롯됐느냐는 질문에 힐스보로 유가족 대표 마가렛 아스피날(Margaret Aspinall)은 이렇게 말해다.

“진실 없이는 슬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죠. (Because without the truth, we can’t even grieve)”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해당 기사를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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