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김나나 작성

2015년 6월 25일, 필자는 1989년 4월 15일 힐스보로 참사가 일어난 장소를 향했다. 힐스보로 구장은 영국 북부 사우스 요크셔 지방에 위치한 셰필드 시를 연고로 하는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홈구장이다.

셰필드는 영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자 철강산업의 기원지로 맨체스터와 함께 영국 대표 산업도시 중 하나이다.

힐스보로는 이 셰필드 도시의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 1989년 4월 15일, 리버풀 FC과 노팅햄 포레스트 FC는 그 해 FA 컵 준결승에서 만났고, 양팀에 중립적인 장소로 이곳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힐스보로 구장이 선정되었다.

셰필드 웬즈데이 FC 홈구장, 힐스보로스타디움 프론트 ⓒ김나나
힐스보로 참사시 리버풀 팬들이 입장한 West Stand 쪽 입구 모습 ⓒ김나나

오래된 영국 구장들이 그러하듯 힐스보로 구장은 시내 교통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다.

사건 당일 낯선 구장에 와야 했던 양 팀의 팬들은 구장을 찾아 입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사건 당시 리버풀 팬들이 배정받았던 서쪽 스탠드 쪽으로 입장을 하기 위해서는 좁은 도로를 끼고 돌아가야 했다.

이 길은 협소하고 나무 따위에 가려져 있어 필자 또한 구장에 도착해서도 구단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참사가 일어난 스탠드를 찾아갈 수 있었다.

들어가는 길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관중들은 입장에 정체를 겪었고, 앞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계속 들어갔다. 무엇보다 이는 구급차 출입에 혼란이 생긴 원인이 됐다.

힐스보로 서쪽 스탠드로 가는 길에는 힐스보로 참사 추모지가 마련되어 있다. 청문회에서 한 증인은 말했다.

“우린 축구를 보러 갔을 뿐이에요. 그 전까지 축구장은 즐거운 곳이었어요. 축구장에 가서 여기저기 늘어선 시체를 보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죠.”

힐스보로는 축구팬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힐스보모 추모지에 타 클럽 팬들이 애도의 표시로 놓고간 머플러 ⓒ김나나

지금도 다른 클럽 축구팬들은 힐스보로를 방문할 때마다 자기 클럽의 머플러를 놓고 가는 방식으로 희생자 96인을 추모한다. 추모지에는 96인을 잊지 말자는 문구들이 써진 세계 각지 클럽의 머플러가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러하듯, 여러 차례 참사를 막을 수 있던 기회가 있었지만 서로의 욕심과 안일함, 오판으로 그 기회를 모두 놓쳤다. 힐스보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힐스보로 구장은 건축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셰필드 웬즈데이 FC는 스태디움을 개축, 수선을 하지 않으면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예산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참사의 첫 빌미가 됐다.

힐스보로 서쪽 스탠드의 테라스석과 스탠딩석과 입구의 구조 (힐스보로는 당시 영국의 많은 구장들이 그렇듯 좌석과 스탠딩석의 혼합되어 있었다. 힐스보로 참사 이전부터 스탠딩석 자체의 안정성 문제를 이미 영국 내 전문가들이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구단들은 좁은 공간에 더 많은 관중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장사였던 스탠딩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김나나

힐스보로 서쪽 스탠드의 스탠딩석은 사진의 빨간색 박스로 표시된 터널을 통과해 입장하는 구조였다.

전문가들은 이 터널 때문에 입장이 정체돼 안전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높으며, 또한 팬들이 스탠딩석에 인원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는 채 터널을 통과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형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터널 사용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힐스보로 청문회에서 생존자 스테파니(Stephanie Connig, 44, 힐스보로 참사 당시 친오빠 커플과 함께 관람을 갔다가 오빠 리차드와 오빠의 여자친구 트레이시는 사망하고 홀로 생존했다)는 당시 터널을 통과한 뒤 스탠딩석에 들어서자마자 예상 못한 엄청난 인원에 놀랐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스탠딩석의 상황을 모른 채 계속해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들과 앞에 이미 가득 차 있던 군중 사이에 눌려 두 발이 공중에 뜬 채로 입장해 숨을 쉬기조차 힘든 정도의 압박을 당했다.

(증인들은 대학생이던 오빠 리차드(Richard Jones)가 당시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고 증언했다. 스테파니는 그때 18살에 불과했으며 체구가 작았다. 많은 생존자들이 당시의 어마어마한 인파와 압박을 생각하면 체구가 작은 사람이나 여성은 사실상 살 가망성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렇지만 스테파니는 살아남았다)

힐스보로 참사 전 이런 안전성 문제에 대한 적절한 실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스포츠 구장 안전에 대한 법률(Safety of Sports Grounds Act 1975)’은 스포츠 구장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안전성을 규정하는 ‘그린 가이드(Green Guide)’를 제시하고 있었다.

힐스보로 구장은 이 규정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1978년 셰필드 웬즈데이 FC와 안전점검을 실시한 외부계약사 사이의 유착으로 정확한 실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 정부는 이를 잡아내지 못한 채 경기장 사용을 허가했다.

결국 셰필드 웬즈데이 FC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안전보다는 비용절감이었다. 검사 이전부터도 이미 엔지니어가 터널을 폐기하고 스탠딩석을 리모델링해 안전을 확보하라고 여러 차례 조언했지만 예산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 결정은 힐스보로 유가족이 나중에 셰필드 웬즈데이 FC에 민사소송을 건 근거가 됐다.

또한 영국 축구협회는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며 이 과정에서 안전성 문제를 지적한 직원을 의사결정에서 제외시킨다.

힐스보로 구장에서는 이미 1981년 울버햄튼 원더러스 FC과 토튼햄 핫스퍼 FC의 FA컵 준결승에서 다수의 팬들이 부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힐스보로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그 구역에서였다.

그 후 1987년까지 큰 경기에 사용되지 않다가 1988년 다시 FA컵 준결승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88년의 경기에서도 ‘후반전을 마저 보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 관전을 포기하고 탈출해야 했었다’며 공간 부족으로 인한 압박을 호소한 팬들이 있었다.

안전 문제에 대한 우려를 크게 드러내며 FA컵 준결승 장소로 다시 사용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청원이 영국 축구협회에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축구협회는 이 청원을 받아들여 안전성을 재검토하거나 사용을 중단하는 대신 다시 한번 1989년 FA컵 준결승전 장소로 힐스보로 구장을 선택한다. 이 결정에 안전성을 문제를 지적한 축구협회 직원은 최종 의사결정에서 제외됐다.

시간이 흘러 2012년 독립조사위원회의 조사로 이런 내용의 문서가 공개되자 영국 축구협회는 그 책임을 인정해 공식 사과를 했다.

또한 사건 당일 경기장 경비를 맡았던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는 편의를 위해 안전 수칙을 지켜지지 않았으며 다른 관련기관과 공조하는 데 실패했다. 

사건이 발생한 West Stand 로 들어가는 입구. 사건당시 안전수칙을 어기고 개방했던 ‘Gate C’의 모습 ⓒ김나나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는 구장 측이 인원 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명씩 회전식 출입구로 입장시켜야 하는 원칙을 어기고 편의를 위해 임의로 ‘C 게이트’를 개방해 다수의 인원을 한꺼번에 입장시켰다. 이때 통제를 맡은 경찰조차도 들어간 인원수를 확인하지 않았다.

구장 내 통제실에서는 스탠딩석 중앙의 3,4구역에서 팬들이 압사당하고 있는 정황이 CCTV를 통해 그대로 20여 분간 전송되고 있었음에도 누구도 모니터링하며 보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CCTV가 없어도 통제실은 3,4구역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에 있었다.

문제는 경기 전부터 시작됐다.

힐스보로 참사 약한 달 전에 열렸던 FA컵 준결승전 안전대비 회의에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는 규정을 어기고 사우스 요크셔 응급의료 기관과 소방당국을 참여시키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이는 경기 당일 사우스 요크셔 경찰서–응급의료 기관–소방당국 삼자간 공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세 기관은 회의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않은 탓에, 사고 발생 당시 구급차 진입로를 확보하고 사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응급조치도구 및 기기가 구장 밖 차량에 방치되었으며, 의료지식이 있는 응급의료 기관이나 소방당국 관계자가 아닌 경찰이 자의적으로 사망을 선고하고 부적절한 응급조치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사망자가 늘어난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경찰이 내린 자의적인 사망선고는 사망 원인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청문회에서 첨예한 문제로 부딪히고 있다.

사우스 요크셔 경찰은 애초에 관중들을 어느 좌석으로 보낼 것인지 결정할 권한이 없었으며 (이는 셰필드 웬즈데이 FC 스태프의 권한이었다), 참사 직후 응급조치에 대해서도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아니었다.

이는 응급의료 기관과 소방당국의 업무여야 했지만, 경찰이 대신 판단을 하게 됐다. 힐스보로 참사에서 경찰이 범한 가장 큰 과실로 여겨진다. 일부 유가족들은 이것이 가족이 죽은 직접적 원인으로 생각하며, 그렇게 볼 만한 근거도 있다.

실제로 희생자 중 한 명인 스티븐(Stephen O’neil, 당시 17세)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 이송을 기다리고 있을 때 현장에 있던 존 하퍼(John Harper) 경관의 명령으로 구급차에서 내려졌다.

이 명령을 수행한 사람들은 하퍼 경관이 “이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내려라”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명령 이후 스티븐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증인이 아직 맥박이 살아 있었다고 밝혀 유가족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에 휩싸였다.

하퍼 경관은 청문회에서 시종일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구체적 증언을 거부하다 무엇을 근거로 당시 사망을 선고하였느냐는 변호인의 끈질긴 질문에 흥분해 답했다.

“이봐요, 척 봐도 죽어 있었어요. 시체가 있으니 시체라고 한 걸 무슨 근거를 대라고 합니까?”

스티븐의 가족은 스티븐이 하퍼 경관의 명령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하고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후에 독립조사위원회가 공개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사우스 요크셔 경찰은 관중을 ‘보호’보다는 ‘통제’ 대상으로 여겼다.

경찰은 스탠딩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부상자가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대신 해당 장소에 경찰견을 풀었다. 숨 쉴 수 없어 살기 위해 펜스를 넘는 관중을 향해 경찰은 경찰봉을 휘둘렀다.

경기가 중단된 뒤 그라운드에 나와 고통을 호소하는 팬들 앞에 말을 타고 들어와 지켜보며 다시 관중석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상대 팀 팬과의 충돌을 막는다며 구급차로 가는 환자를 막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는 승객의 안전보다는 승객의 이동으로 인한 혼선을 우려한 명령이었다.

이는 정부가 사건을 보는 시각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세월호 사건 당시 국민보호라는 국가의 존재의의를 구현하는 데 실패한 정부는, 지금까지도 국민을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참사는 복합적 요인으로 발생하고 사전에 이를 막을 수 있는 기관과 주체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존재한다. 때문에 사회는 이를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영국축구협회 직원처럼 한국에도 안전을 이유로 집단의 의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던 의인이있었다. 1999년 씨랜드 화재사건의 이장덕 계장이다.

화성군청 이장덕 계장은 안전규정 불충족을 이유로 씨랜드 수련원의 허가를 반려하다가 결국 타 부서로 전보발령 되었고, 후임자가 수련원에 허가를 내주고 만다. 이는 19명의 유치원생이 사망한 참사로 이어졌다.

부정부패 속에서도 사회에는 언제나 소임을 다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자가 분명히 있다. 대부분참사는 이러한 사람들의 참사를 막으려던 노력이 묵살되면서 발생되다.

우리 사회는 제2의 이장덕 계장을 보호해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다음 세월호’도 출항허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다시 한번 본 연재가 우리 사회에 ‘우리는 왜 아직도 세월호를 얘기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기를 희망함을 밝힌다.

힐스보로 참사는 우리에게 이런 끔찍한 인재가 선진국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며, 진상 규명의 길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며, 잘못을 부정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힐스보로 사건이 나기까지, 그리고 사건 당일 내용에 책임이 있던 주체들은 사건 후 은폐를 위한 동지가 된다.

셰필드 구단과 경찰만이 아니었다. 영국 언론은 참사의 현장에서도 사상자들에 도움을 주기보단 자극적인 취재거리에 열을 올렸다. 어떤 기자는 더 나은 사진을 위해 시신이 누워진 구도를 변경하기도 했다. 기사거리를 위해 희생자의 소지품을 뒤졌다.

정부 또한 관련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시 보수당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는 해당사건을 보고받고서는 진상조사가 경찰에 대한 대중의 비난을 불러올까 걱정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힐스보로 유가족들은 이에 저항해 26년간 싸워왔고 영국 사회는 그 길을 지지해왔다.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논의는 영국 재난보호법(UK Contingency Act 2004) 도입에 일부 기여했고 이 법을 기반으로 영국 정부는 대형참사 발생시 초기대응과 회복기능을 수행하는 전면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또한 힐스보로 참사 진상조사는 스탠딩석의 안전성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불러왔고, 이는 의회에 반영되어 1992년에 ‘축구관중에 관한 법률(Football Spectator Act)’이 실시돼 이후 영국프리미어리그 전 구장에 스탠딩석이 금지되었다.

힐스보로 유가족은 그들의 특별한 소명(召命)을 피력한다. 우리 아이들의 삶은 비록 짧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죽음을 계기로 영국사회가 더 안전한 사회로 개선되었다고. 그것이 희생자 96인이 남긴 유산이라 말한다.

(2015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했던 기획입니다. 해당 기사를 2021년 <셜록> 홈페이지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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