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11일. 이곳에서 맞는 세 번째 아침이다. 눈앞의 풍경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질척한 회색 바닥과 녹슨 철창. 최인철은 부산 사하경찰서 유치장에 앉아 있다.
최인철은 어제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경찰은 이틀 전 구속된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보여줬다. 공무원을 사칭한 공갈 범죄 리스트라고 했다. 대부분 1991년 8월부터 11월까지 부산 사하구 을숙도 광장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경찰은 이날까지만 해도 공무원을 사칭해 3만 원을 갈취한 의혹으로 조사 중이던 최인철이 이 사건들의 유력한 용의자라고 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건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어제 일을 곱씹던 그때. 유치장 문이 열린다. 어제 공갈 범죄 리스트를 보여줬던 경찰관들이 최인철에게 나오라고 한다. 옆방에 있던 친구 장동익도 함께다.
경찰서 앞에 세워진 봉고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그저 “너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짤막한 말 한 마디뿐이다.
최인철과 장동익이 내린 곳은 부산 중부경찰서다. 경찰관들은 경찰서가 아닌 별채로 나와 있던 구내식당으로 둘을 데리고 들어간다. 한 남자가 홀로 앉아 있다.
“야!”
남자는 최인철과 장동익을 보더니 고함을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놈들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인철은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고함을 친 남자는 당시 중부경찰서 교통계 소속이던 한 모 순경이다. 그는 최인철과 장동익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의 피해자다.
한 순경은 1989년 12월 초 새벽, 부산 사하구 신평동 인근 강변도로에 세워 놓은 자신의 차량 안에서 데이트를 하다 최인철, 장동익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현금 7만 원을 빼앗겼고, 강도 범행 과정에서 양 손이 묶인 채 트렁크에 감금 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했다.
두 남자가 검거되기 2년 전의 일이다.
당시 경찰-검찰은 한 순경의 진술과 낙동강변 2인조의 자백을 근거로 특수강도‧감금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과 자백이 유죄판결이 내려지는데 가장 유의미한 증거의 역할을 했단 얘기다.
그러나 낙동강변 2인조 사건 기록에선 한 순경의 진술 곳곳에서 허점이 발견된다. 그가 경찰-검찰-법원에서 각각 진술했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부 내용을 덧붙이거나 빼는 것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진술을 뒤집기도 한다.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도 있다.
전체 기록에서 한 순경의 진술만 따로 떼어내 종합해 보면, 이 사건 자체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라는 정황이 광범위하게 드러난다.
- 트렁크에 손이 묶인 채로 갇혔는데 어떻게 탈출 할 수 있었나요.”
“손목에 힘을 주어 일부러 느슨하게 만들었다가 트렁크에 갇혔을 때 계속 손을 비틀어 풀고 트렁크 시정장치를 손으로 더듬어 찾아 힘껏 쳤습니다. 문이 열려 나오니까 범인들이 순간 바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 한 순경 진술
한 순경이 1991년 12월, 검찰에 진술한 내용이다. 낙동강변 2인조가 한 순경의 옷을 벗기고, 벗긴 티셔츠로 양 손을 묶은 뒤 트렁크에 감금했는데 갇힌 채로 잠금장치를 손으로 힘껏 쳐서 탈출했다는 취지다.
이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힘껏 쳤다’는 부분이다. 당시 생산된 자동차의 트렁크 내부에서 맨 손으로, ‘힘껏 쳐서’ 탈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순경이 1989년 12월 범행 당시 갇혔다고 주장한 차량은 현재는 단종 된 ‘대우 르망’이다. 이 차량에는 최근 생산되는 모든 차량에 설치가 의무인 ‘트렁크 비상탈출장치’가 없다.
현재 차종과 관계없이 트렁크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은 형광색 손잡이가 이 장치다.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트렁크에서 탈출할 수 있다.
비상탈출 장치는 지난 2003년 생산된 차량부터 의무 설치됐다. 2002년 9월 23일 건설교통부(현 국토부)가 “납치 사건의 경우 자동차 트렁크에 피해자를 감금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의무 설치를 추진한다”고 밝힌 뒤의 일이다. 앞서의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이 발생한 1989년엔 수입 승용차에도 이 장치가 설치되지 않았다.
“르망 등 당시 생산된 차량들은 시동을 걸거나 트렁크를 열기 위해선 열쇠를 꽂아 돌려야 했습니다. 특히 트렁크는 열쇠로 돌리면 ‘락로드’라는 장치(사진)가 움직여 잠금이 풀리는 구조입니다. 내부에서 트렁크를 열려면, 락로드 장치에 손가락을 넣어 철로 된 얇은 막대기를 위 아래로 여러 번 조작해 잠금장치를 풀어야합니다. 힘껏 치거나 두드려서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공학과 교수
1980년~90년 대 생산된 차량에서 ‘트렁크 맨손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전문가 의견이다. 김 교수의 설명은 락로드 장치를 조작해 실제로 탈출한 사건과 일치한다.
2000년 5월, 당시 인천부평경찰서 방범순찰대 소속 유 모 의경이 근무 중 차량절도범에게 납치돼 트렁크에 2시간 30분 가량 감금된 사건이 발생했다.
유 의경은 탈출 과정 진술에서 “트렁크 열쇠고리 부위를 살펴보니 손가락을 넣을 만한 틈이 보였다. 뭔가 걸리는 것을 ‘잡아당기니’ 트렁크가 열렸다”고 말했다. ‘힘껏 쳤다’는 한 순경과의 주장과 다르다.
김 교수는 “당시 차량은 트렁크 자체가 워낙 협소해 성인이 들어가면 몸을 돌리는 것도 쉽지 않고 손이나 발이 힘을 주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도 강조했다.
‘트렁크 탈출 불가능 했다’ 한 순경과 전문가의 의견이 다르다. 사실 확인을 위해 한 순경의 진술을 그대로 재연했다.
지난 2017년 4월 18일, 경기도에 위치한 영화‧드라마 촬영 소품 보관 창고에서 르망 총 3대를 찾았다. 1989년에 생산된 차량 한 대, 1090년에 생산된 차량 두 대로, 촬영 업체가 개인 소유자에게서 인수한 차량들이다. 3대 모두 정상 운행이 가능했다.
촬영장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직접 트렁크 내부에 직접 들어가 본 결과, 대부분 앞서의 김 교수의 설명과 일치했다.
기자의 신장은 174cm, 몸무게는 66kg이다. 공간이 협소해 머리와 팔, 무릎을 모두 구부려야만 내부에 몸 전체를 눕힐 수 있었고, 가까스로 트렁크를 닫을 수 있었다. 끈으로 양 손을 느슨하게 묶은 채로 들어갔는데도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힘을 주기 어려웠다.
‘트렁크 비상탈출 장치’는 없었다. 트렁크 외부 잠금장치(열쇠)와 연결된 ‘락로드’ 장치뿐이었다. 묶인 손을 풀고 다시 내부에 들어갔다. 트렁크 내부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손을 더듬거리며 장치를 찾아야했다.
동작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락로드 장치를 주먹과 손바닥 등으로 가능한 힘껏 여러 번 내리쳤다. 트렁크 잠금장치는 열리지 않았다. 한 순경의 진술대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다. 르망 탈출 재연은 2017년 7월 JTBC <스포트라이트> 제작진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제작진도 탈출에 실패했다.
허점은 또 있다 수사기록을 보면, 한 순경은 카데이트를 했던 차량이자, 감금당했던 피해차량은 함께 있던 여성의 소유고, 차종은 르망이라고 진술했다. 기록엔 차량의 번호와 차종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최근 차량번호를 토대로 차종을 다시 확인한 결과, 차량은 ‘르망’이 아닌 ‘현대 스텔라’였다. 한 순경은 경찰-검찰의 피해자 진술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운전했던 차량의 종류를 다르게 설명했으며, 수사 경찰과 검사는 차량 번호와 차종까지 기록에 명시하면서도 확인 절차를 거지치 않았다는 얘기다.
르망 탈출 재연실험을 한 장소에서 1989년, 90년에 생산된 스텔라로 동일하게 트렁크 탈출 재연실험을 했다. 르망과 비교해 스텔라 트렁크 공간의 넓이는 비슷했고, 락로드 장치의 구조는 동일했다.
역시 탈출은 불가능했다.
한 순경은 2017년 4월 8일, 박준영 변호사와 만나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는 탈출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해차량은 르망이었다. 맨 손으로 트렁크 잠금장치를 힘껏 두드려 탈출했다.”
27년 전 진술과 다른 게 없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또 있다. 한 순경은 법정 증언에서 “낙동강변 2인조가 강도 범행 중 칼자루 뒷 부분으로 내가 타고 있던 차량 유리창을 한 번에 깨뜨렸다”며 “단번에 왕창 깨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2015년 9월, 광주에서 한 남성이 골프채로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사정없이 내리쳤던 사건과 비교해보면 한 순경의 진술과 많이 다르다.
화제가 됐던 당시 동영상을 보면, 남성은 벤츠 승용차 50여 곳을 사정없이 내리친다.이 과정에서 차량 유리창도 골프채로 강하게, ‘여러 차례’ 내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유리창은 움푹 파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지만 한 장도 깨지지 않는다.
물론 수입차인 벤츠와 1990년대 국산차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강화유리라는 특수성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최근 생산된 차량과 일부 차이는 있지만 1980~90년대 생산된 자동차 유리창 역시 강화유리다. 칼자루 등 좁은 면적에 충격을 받고 한 번에 깨질 수 없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 익명을 원한 한 대기업 자동차 제조업체 관계자
한 순경의 진술은 뒤죽박죽 섞이기도 한다. 같은 피해자이자, 이 강도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한 ‘함께 있던 여성’에 대한 진술이 대표적인 예다.
한 순경의 경찰-검찰-법정 진술 가운데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을 종합해보면, 실제 이 여성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 정도다.
한 순경 진술에 따르면, 강도 범행 발생 당시 운전석엔 한 순경이, 조수석엔 여성이 앉아있었다. 덩치 큰 범인(최인철로 추정)은 조수석 쪽에, 작은 범인(장동익으로 추정)은 운전석 쪽에 서서 한 순경 일행을 위협했다.
한 순경은 ‘덩치 큰 범인’이 조수석 유리창을 깬 장면을 설명하면서 “유리창이 깨진 뒤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고개를 내밀자마자 범인이 칼을 들이댔다”고 말했다. 좁은 조수석 공간에 한 순경의 머리와 여성, 범인의 팔이 함께 들어와 있었다는 얘기다.
반면 당시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성의 반응이나 상황은 진술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직후 상황에서는 여성이 앉아 있던 위치가 갑자기 달라진다.
한 순경은 1991년 11월 12일 경찰 진술에서 “덩치 큰 범인이 유리창을 깨고 조수석에 들어와 칼을 들이 댔다. 차 안에서 상의와 하의를 벗겼고, 벗긴 티셔츠로 손목을 묶었다”고 말했다. 여성은 어느새 뒷좌석으로 이동해 있다.
한 순경은 법정에서 같은 장면을 설명하면서 “덩치 큰 범인이 조수석에서 칼을 들이댄 채로 티셔츠를 칼로 찢었다”고 했다가 증언 말미에는 “덩치 큰 범인이 결박하면서 작은 범인이 칼을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고 스스로 직전 진술을 번복한다.
한 순경의 진술 안에서 여성은 물론, 범인들의 위치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장면에 대한 문제는 현장검증과 법정 진술을 비교하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 순경은 사건 현장검증에 직접 참여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최인철(덩치 큰 범인으로 추정)은 운전석 옆에서 칼을 든 채 한 순경을 위협하고 있고, 장동익(작은 범인으로 추정)은 조수석 옆에 서 있다.
여성은 조수석에 앉아 있다. 한 순경이 트렁크에 감금된 뒤에야 뒷좌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결박‧감금 전 뒷좌석에 있었다고 설명한 장면과 크게 다르다. 한 순경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의 위치가 제각각이다. 한 순경은 법정에서, 자신이 직접 재연한 장면과 다른 말을 했다.
여성은 같은 피해자이자, 범인들의 혐의를 증언해줄 유일한 목격자다. 그러나 한 순경의 여성에 대한 설명은 그리 길지 않다. 그의 경찰-검찰-법정 진술을 종합하면 이렇다.
“사건 당일 술집에서 처음 여성을 만났고, 그녀의 차량을 타고 데이트를 했다. 감금된 트렁크에서 탈출한 뒤 도망치는 범인들을 추격하다 돌아와 보니, 여성은 차량을 두고 자취를 감췄다. 사건 발생 이후 여성을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한 순경은 당시 ‘현직 경찰’이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당한 강도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의 진술을 보면, 한 순경은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1991년 11월 12일 한 순경은 경찰 진술에서 “강도를 당한 사실이 있는데, 당시에는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취한 행동은 1990년 1월 낙동강변 사건 발생 이후 ‘신평 파출소 아는 경찰관’과 ‘사하 경찰서’에 쪽지나 참고자료 형태로 강도 사건을 전달한 게 전부였다. 쪽지와 참고자료 등은 수사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당시 낙동강변 사건을 담당하고 수사본부가 차려졌던 곳은 ‘부산 북부 경찰서’다.
그리고 그는 법정에서 신고 여부에 대해 다시 이렇게 말한다.
“다른 큰 피해사항이 없어 나름대로 관할 파출소에 갔다가 현장에도 가봤다. 신고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본인의 피해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수사할 정도가 되겠느냐고 생각했다.”
강도 사건에 대한 한 순경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 그는 괴한들에게 7만 원을 빼앗겼고 같이 있던 여성 소유 차량의 유리창이 파손 됐으며, 트렁크에 감금까지 당했다. 그런데도 그는 수사 필요성에 의문을 가졌다.
다시 말하지만, 한 순경은 당시 현직 경찰이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사실만 말하자, 경찰이 믿어주지 않더라도 ‘검사님’은 알아주실 거다. 검사님만 만나면 다 잘 해결될 거다.” – 최인철
1991년 11월 11일, 최인철은 한 순경을 만난 직후에도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에 검거된 이후 수사관들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일이었다. 한 순경도 그날 처음 본 사람이다. 의심을 받더라도 곧 풀려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경찰은 한 순경과의 ‘면담’을 마치고 최인철만 차에 태운다. 바깥 풍경이 다르다. 검거 됐던 사하 경찰서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가 내린 곳은 당시 하단 1동 파출소 앞에 위치한 작은 식당.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경찰이 말한다.
“시인할 건 시인하고 얼른 잘못했다고 해라.”
최인철은 고개를 젖는다.
이번엔 차에 타지 않는다. 하단 1동 파출소로 들어간다. 1층을 사무실을 지나쳐 2층, 3층으로 오른다. 옥탑방 같은 가건물이다. 시큼한 쇠 냄새가 퍼져있다.
“옷 벗어”
최인철은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덩치 큰 경찰관이 뒤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앞에 선 다른 경찰은 그를 밀어 넘어뜨린다. 손목엔 수갑이 채워지고 쪼그린 채로 무릎을 감싸 쥐게 한다. 쇠파이프가 최인철의 무릎과 팔 사이에 들어온다.
세상이 뒤집어 진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무릎과 팔 사이에 낀 쇠파이프가 걸리면서 최인철의 머리가 아래쪽으로 떨어진다. 눈앞엔 경찰관들의 구둣발이, 불과 몇 초전까지 딛고 서있던 바닥이 보인다.
주전자에서 쏟아지는 노란색 물이 최인철의 코 속으로 들어온다. 겨자 냄새다. 코 속이 따갑다. 숨도 쉬지 못한다. 견딜 수가 없다.
“낙동강에서 하나 더 했지? 낙동강에서 여자 죽인 적 있지? 장동익이랑 같이.”
그 순간 최인철은 직감했다. 이곳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최인철과 장동익은 살인자가 된다.
(문상현 일요신문 기자가 작성했습니다.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