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투명 플라스틱 창은 얇으나 그 누구도 열 수 없었다. 저쪽 세상을 갈망한 이쪽의 사람이 창을 부숴도 소용 없다. 곧바로 쇠창살이 나온다.
아버지와 딸은 약해 보여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성벽같은 투명 창을 통해 서로를 바라봤다.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 없고, 목소리가 들려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 교도소 면회실은 만남의 장소이자 고통의 산실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 딸이 엄마와 함께 부산에서 광주교도소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시간. 교도소의 아버지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10분.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도 힘들고, 뭔 말을 끝내기도 어려운 시간.
“그 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딸에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억울하다고 어린 아이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냥 ‘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라’고 안부인사 정도 하면 10분이 다 가버립니다.”
그렇게 아내와 딸을 보내고 ‘감방’으로 향할 때면 발바닥은 유리를 밟는 것처럼 아팠다. 다시 버스 타고 3~4시간을 달려 부산 집으로 향하는 아내 정숙기 가슴에는 모래 바람이 불었다.
“남편이 무기수니까,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 막막함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죠.”
사하경찰서 형사들의 물고문 때문에 친구 장동익과 함께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에서 한 여성을 강간살인했다고 허위자백해 무기수가 된 최인철. 경찰에 체포됐을 때 그는 29세였다. 당시 그에겐 아내 정숙기(당시 28세)와 일곱 살 아들 최규현(가명), 세 살 딸 최미현(가명)이 있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된 남자의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하기는 어렵다. 고통은 그만의 몫이 아니다. 가짜 살인범을 남편과 아버지로 둔 여성들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남자가 눈에 보이는 감옥에 갇혀 싸울 때, 여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편견과 싸워야만 했다.
밖에 있어도 세상은 감옥 같았다. 정숙기는 남편 최인철이 구속된 1991년 겨울을 잊을 수 없다. 부산지방검찰청에서 자신을 참고인 자격으로 불렀다. 혹시라도 남편을 볼 수 있을까, 네 살 딸 최미현을 등에 업고 검찰청으로 갔다.
검사는 정숙기에게 낙동강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1990년 1월 4일 새벽에 남편 최인철이 어디에 있었는지, 혹시 옷에 피를 묻힌 채 집에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등을 물었다. 정숙기는 “그때 우리 가족 모두는 대구 친정집에 있었으니, 남편이 옷에 피를 묻히고 집에 들어올 일도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검사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오전이 가고 오후가 다가오는데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점심 무렵, 검사실 직원이 짜장면을 배달시켜 정숙기에게 내밀었다.
“죄 없는 남편이 강간살인범으로 몰려 구속됐는데, 검찰청에서 짜장면이 넘어가겠습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딸 미현이가 배고프다면서 그 짜장면을 먹더라고요.”
정숙기는 아버지를 구속한 검사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먹던 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맛있게 먹는 어린 딸을 막지도 못하고 황망하게 바라보던 그때 자신의 기분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라도 딸을 바라보던 시절은 그나마 나았다. 최인철의 1심 재판이 한창이던 1992년 6월 19일, 정숙기는 남편처럼 구속됐다.
그녀의 남동생이 “매형(최인철)은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대구에 있었다”는 취지로 법정에서 증언했는데, 이게 위증으로 몰렸다. 정숙기는 위증을 교사했다는 혐의로 동생과 함께 구속됐다.
“남편은 죄 없이 구속이 됐고, 남편의 알리바이 입증을 위해 노력한 저와 동생은 위증과 위증교사죄로 구속되고… 그때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부부는 부산구치소 남자사동, 여자사동에 각각 수감됐다. 최규현, 최미현 남매는 고아 아닌 고아신세가 됐다. 최미현은 큰삼촌 집에서 살았다. 엄마 정숙기는 6개월 뒤에 풀려났다. 엄마와 두 남매는 다시 만나 부산 명지동 집에서 살았다.
이제부터 두 아이와 함께 삶을 꾸려야 하는 건 온전히 엄마의 몫이 됐다. 가짜 살인범의 아내, 정말 기막힌 신세였다
“내 남편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누명 쓰고 교도소에 갔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아십니까? 이웃들은 믿어 주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죄 없이 설마 무기수가 됐겠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 도망갈 수도, 갈 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야했다. 소금밭 같은 가슴을 다독이며 지옥 같은 세상을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정숙기는 악착같이 일했다. 대파가 유명한 명지동에서 일당을 받으며 농사일을 했고, 명지항에 물고기 실은 배가 도착하면 항구에서 바닷일을 했다. 공장에서도 일했다. 쉬는 날에는 종종 아이들과 함께 남편 최인철 면회를 갔다.
“아이들이 교도소 면회실 투명 창 너머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참 걱정이었어요. ‘아버지는 죄가 없다’ ‘언젠가는 나올 거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히 흘렀다. 저쪽의 아버지는 늙어 가고, 이쪽의 자식들은 계속 자랐다. 두 자식을 키우느라 닥치는 대로 일하는 정숙기의 몸은 조금씩 망가졌다.
네 살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딸이 자라는 동안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다. 면회실 투명 유리창만 더듬었다. 부녀 관계는 맞지만, 별다른 관계를 맺어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와 딸은 조금씩 할 말을 잃었다.
“교도소에 있는 제가 뭘 해준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할 말도 없지요. ‘공부 열심히 해라’ ‘엄마 말 잘 들어라’ 이런 말뿐이었죠. 딸은 ‘네’라고 대답만 하고. 고교생이 된 후부터 딸은 면회를 잘 안 왔어요. 공부도 해야했고, 자기 삶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죠.”
많이 방황했지만 최인철은 교도소에서 모범수가 됐다. 가족들과 교도소 내 ‘만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18년 만에 찾아왔다. 네 살이던 딸은 22살 어른이 되어 최인철 앞에 나타났다.
“딸을 한 번 안아줬는데.. 좀 어색하더라고요.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났지만, 경험이나 기억을 나눠가진 게 없으니 대화도 자꾸 끊기고.. 세상에 나가더라도 친밀한 관계를 복원하는 게 참 힘들겠구나 싶었죠.”
최인철은 감형을 받아 2013년 6월에 출소했다. 네 가족은 21년여 만에 한 지붕 아래 모였다. 네 살, 일곱 살이던 남매는 어른이 됐다. 남편이 오기까지 혼자 남매를 키운 아내 정숙기의 몸은 심각하게 망가졌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크게 이야기해야 들릴 정도로 그녀의 두 귀는 나빠졌다. 허리 디스크가 생겼고, 무릎은 계단 한 층을 오르거나 50m를 걷는 게 버거울 정도다. 최근엔 백내장 수술도 했다. 나이는 55세지만, 정숙기의 몸은 60~70대처럼 약해졌다.
아버지를 구속한 검사 앞에서 짜장면을 먹던 최미현은 서른 살이 됐다. 그녀는 아버지가 건너고 엄마가 견딘 지난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짜장면이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요. 아버지는.. 뭐랄까요.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부터 아버지는 없었잖아요. 그래서 슬픔이나 상처 같은 것도 없어요. 기억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인 거 같아요.”
최미현에겐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고, 그 덕(?)에 고통에서 비껴 나기도 했다. 오빠 최규현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이 종종 부럽다.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때문에 겪은 슬픔, 이 세상에 버려진 고아가 된 듯한 공포를 오빠는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이 기억 못해 사라진 슬픔과 상처. 부모 처지에서는 그게 참 다행이면서도 서글픈 일이다. 기억하고 싶어도, 딸과 함께한 경험이 거의 없는 아버지 최인철에겐 더욱 그렇다.
최미현은 지난 19일 결혼식을 했다. 딸이 자라는 21년 세월을 함께 하지 못한 최인철이 딸 손을 잡고 예식장에 입장했다. 최인철은 기쁘고, 서럽고, 미안해서 펑펑 울고 싶었다.
“딸은 제가 감옥 가기 전 어린 시절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저는 딸이 성장하는 동안 곁에 있어주지 못했잖아요. 2013년에 출소한 뒤 겨우 4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젠 또 따로 살아야 하니까.. 마음 같아선 통곡하고 싶었는데, 아내가 옆에서 우니까 저라도 참아야했죠.”
신랑, 신부의 인사가 끝난 뒤 최인철은 딸 최미현을 꼭 안아줬다. 교도소 만남의 집에서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허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최인철은 속으로 울면서 겉으론 웃었다. 기억속에 아버지가 거의 없는 최미현은 아버지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결혼식 마무리 즈음, 온 가족이 연단에 올라 사진을 찍는 시간. 무기수의 시간을 함께 견딘 정숙기는 아픈 무릎 탓에 연단에 오르는 걸 힘겨워 했다. 남편 최인철이 아내의 손을 잡아줬다.
최미현의 남편까지, 이젠 다섯이 된 가족이 한 곳을 보면서 웃었다. 사진사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