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잠은 오지 않았다. 빚 독촉, 급여 통장 압류, 왼쪽 발목의 전자발찌..가슴 속에서 짜증과 분노가 일었다. 자리에 눕기 전, 컴퓨터를 켜고 음란동영상을 봤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이었다.

평소와 다른 건 아침이었다. 직장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지 않았다. 길이 20cm에 이르는 칼을 챙겨 길을 걸었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이런 순간을 대비해 며칠 전 A씨의 뒤를 밟아 집을 알아뒀다. 금방 그 집 앞에 섰다.

‘붙잡히면 감옥에 가지 뭐.’

A씨는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 TV에서 고개를 돌렸다. 서진환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A씨를 제압한 뒤 강간했다. 범행 현장에 DNA 정보도 남겼다. 이후 A씨의 삶은 평소와 많이 달라졌다. 훗날, A씨는 수사기관에서 말한다.

“식구들도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워서 집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서진환은 집에서 평소처럼 살았다. 아침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술을 마시고, 밤이면 음란동영상을 시청한 뒤 자고..그의 일상은 일관됐다. 물론 각오는 했다.

‘일주일 내로 경찰에 잡혀 가겠지. 내 DNA 정보를 국가가 갖고 있으니까. 될 대로 되라지 뭐.’

일주일이 지났다. 경찰은 오지 않았다. 열흘이 지났다. 경찰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범행 이후 11일이 지났을 때, 보호관찰소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전력이 떨어진 전자발찌 충전만 하고 돌아갔다. 경찰, 보호관찰소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 다음날 밤도 술을 마시고 음란동영상을 봤다. 다음 날 아침, 서진환은 회사에 있지 않았다. 서울 중곡동에서 두 아이의 엄마인 장주영(가명)을 강간살해했다. A씨 강간 이후, 13일이 지난 2012년 8월 20일의 일이다.

서진환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때까지도 경찰은 서진환이 A씨를 강간한 범인이란 걸 몰랐다. 서진환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장주영 살인범으로만 수사하던 경찰은 8월 31일에야 서진환의 추가 범행을 알아챘다. 그의 DNA를 분석하다가, A씨 사건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범인 DNA와 일치한다는 걸 인지했다. 서진환은 추가 범행을 숨긴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 범행(A씨 강간)이 드러난다고 해서 저에게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A씨가 사건에 휘말려 고통을 당할까 봐 미안하기도 해서 범행 사실을 숨겼습니다.“

상식 차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A씨 사건 범행 현장에서 범인의 DNA 정보를 확보한 경찰. 왜 서진환을 못 잡았을까? 일찍 체포했다면 장주영 살해는 막았을 텐데 말이다.

서진환은 성폭력 혐의로만 세 차례 복역한 상습범이었다.

2012년 8월 20일 장주영을 강간살해한 서진환. 사진은 현장검증 때의 모습이다. ⓒ 연합뉴스

그가 교도소에 있던 2010년, 대검찰청은 서진환의 DNA를 채취해 갔다. 그의 재범을 막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A씨를 강간했을 때, 서진환은 현장에 DNA를 남겼다. 서진환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다시 교도소로 끌려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A씨 강간 후 일주일 내로 검거될 줄 알았습니다. 내 DNA 정보를 국가가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검거되지 않아 다시 범행(장주영 강간살인)을 저질렀습니다.” – 2012년 10월, 보호관찰소 임상심리전문가와의 상담에서

일주일 내에 검거될 것이란 서진환의 빗나간 예측과 2차 범행. 한 여자이자 두 아이 엄마였던 장주영의 죽음. 여기에는 경찰과 검찰의 ’10년 힘겨루기’와 어중간한 타협이 숨어 있다.

범죄예방과 국민의 권익보호를 위해 제정된 ‘디엔에이(DNA)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디엔에이법)은 수형자의 DNA는 검찰총장이, 범죄현장과 구속 피의자의 DNA는 경찰청장이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형이 확정된 범죄인의 DNA는 검찰이, 범죄현장 등에서 확보한 DNA는 경찰이 관리한다는 뜻이다. 경찰-검찰이 서로 범죄인의 DNA를 관리하겠다며 10년 동안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다 타협한 게 이런 이원화 관리 체계다.

범죄인 DNA를 경찰-검찰이 각각 관리하는 건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다. 범죄 예방과 국민 권익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서진환의 범행이 이를 입증한다.

A씨가 강간 피해를 겪은 날은 2012년 8월 7일. 경찰은 바로 다음날 범인의 DNA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얼마 뒤, 국과수는 ‘일치하는 DNA 없음’이라고 경찰에 답한다. 서진환의 DNA는 검찰청에서 관리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경찰이 검찰에 DNA 조회만 했어도 범인은 서진환이란 걸 알았을 텐데, 경찰은 이걸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검찰에 DNA 감정을 별도로 의뢰해야 할 법적 근거나 이유가 없습니다.” – 법원 사실조회요청에 대한 경찰의 답변

범죄인의 DNA 채취, 관리를 서로 하겠다고 싸우느라 한 여자의 강간살인을 막지 못한 수사기관. 이런 힘겨루기와 이원화 체계의 문제점은 사건 발생 3년 전에 이미 국회에서 논의됐었다. 2009년 12월, 디엔에이법 제정 이전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

“저희들이 우려하는 것은 결국 (범죄인 DNA 채취-관리가) 이원화됐을 때 생기는 문제점들은 굉장히 걱정이 되는 면이 있습니다.” (후략) – 김상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저희가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DNA 데이터베이스가 왜 이원화되느냐, 여기에 대해서 위원님들께서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제가 솔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를 서로 갖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의가 안 됐던 겁니다.” – 황희철 법무부차관

“일원화가 정부 내에서 안 돼서 이원화된 것인데, 그로 인한 다소의 불편이 있을 텐데, 정부 내에서 도저히 일원화가 안 돼서 지금 이렇게 절충해 온 것 같아요.” – 장윤석 소위원장

“아, 그게(일원화) 불가능한가요?” – 홍일표 위원

“뭐, 하여튼 경찰-검찰 간에 한 10여 년 서로 이것을 가지려고 하다가 그러면 수사 진행 절차 속에서 각자 관리하되 연계하자 이렇게 타협..” – 장윤석 소위원장

(중략)

“이렇게 두 군데에서 (범죄인 DNA를) 관리하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아마.” – 이주영 위원

“맞습니다.” – 최교일 법무부검찰국장

김상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의 말대로 “굉장히 걱정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원화된 범죄인 DNA 관리 문제는 ‘다소의 불편’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사 진행 절차 속에서 (범죄인 DNA를 경찰과 경찰이) 각자 관리”하는 나라에서 서진환은 한 여자를 죽였다. 장주영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나라에서 강간살해됐다.

장주영 사망 6개월 뒤에야 경찰과 검찰은 범죄인 DNA 정보 공조체제를 마련했다. 장주영 본인과 유가족에게는 한스러운 일이다. 경찰, 검찰, 법원 등 어떤 국가기관도 장주영의 죽음에 “미안하다”고 말한 적 없다.

이런 나라 없을 거다, 아마.

(2016년 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연재한 기사입니다. 2021년 <셜록> 홈페이지 옮겼다는 걸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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