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산재 법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쓰는 말을 빌리면, 그야말로 ‘갑자기?’였다. 여야 합의 없이 날치기로 없던 법이 생겨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획 ‘반도체 아이들의 가려진 슬픔’으로 태아산재 법 필요성을 주장한 나조차도, 법 제정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그것도 여야 큰 이견 없이, 압도적 표결로 말이다. (본회의 175명 참석. 찬성 173명, 기권 2명)

한국 사회에서 노동 이슈는 대체로 ‘핫’ 하지 않다. 뜨겁기는커녕 진부하고, 고루하고, 관심 없는 의제로 치부된다. 누군가 떨어져 죽고, 끼어 죽고, 불에 타거나 물속에서 질식해 죽어야만 겨우 사회적 눈길을 받는, 말 그대로 죽어야 사는 이슈다.

이걸 잘 알기에 해당 기획을 진행하며 나는 자주 내면의 의구심과 싸워야했다.

‘노동 이슈로, 그것도 태아 건강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여론을 만들어 산재법 개정까지 과연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영화계는 관객수를, 방송계는 시청률을 중요하게 생각하듯, 언론 역시 흥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클릭수’는 물론이고, 보도 후 사회적 파급력 같은 것 말이다.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와 언론사의 고민이 이러한데, 태아산재 문제를 직접 겪은 당사자의 걱정은 그동안 얼마나 막막했을까.

태아산재가 누군가에겐 생소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아주 오래된 소망이자 일상의 문제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의료원. ⓒ주용성

‘산재법상 태아를 수급주체로 인정하라‘는 요구는 약 10년 전부터 있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자녀에 대한 산업재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게 2012년 때 일이다. 당시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선천성심장 질환아를 출생했다. 자녀의 질환은 엄마 ‘본인의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엄마들은 약 10년간 행정소송 끝에 ‘아이의 치료비를 근로자인 엄마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산재보험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한 몸‘, 즉 ‘본성상 단일체‘로 취급된다. 태아는 모체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모와 함께 근로현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이 판결로 문제가 바로 해결된 건 아니다. 당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에는 임신 중 업무상 재해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질병을 보상하는 규정이 없었다. 요양급여, 휴업급여 중 어떤 걸 지급해야 하는지, 기간은 얼만큼 설정해야 하는지,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었다.

이번엔 삼성반도체 출신 여성노동자들이 나섰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한 계기였다. 선천성 무신장증과 식도 폐쇄증을 앓는 아들을 낳은 김성화(가명) 씨. 아픈 몸으로 태어난 아이를 보며 자책만 하던 김 씨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저는 회사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가족력 때문에 아이가 아픈 걸까 고민했죠. 저나 남편한테서 원인을 찾고, 서로 자책하는 걸 반복했어요. 그런데 저랑 남편은 둘 다 너무 건강하거든요. 주변에 알아보니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본인이 아프거나 혹은 유산한 사례가 참 많더라고요. ‘정말 회사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

김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했다. 자책을 넘어선 노동환경에 대한 인식. 이런 생각의 변화는 다른 엄마들의 마음속에서도 시작됐다.

엄마 김혜주(기명)씨와 아들 김민준(가명, 18세) 군. 이들이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위치한 삼성반도체 공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주용성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 출신 김혜주(가명) 씨는 임신 8개월 중순 때까지 반도체 공정에서 일했다. 김 씨의 아들은 왼쪽 신장없이 태어났다. 남은 오른쪽 신장도 제 기능의 10% 밖에 하지 못한다. 18세가 된 아들은 여전히 단백뇨와 혈뇨 때문에 병원을 다니고 있다.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출신 황영애(가명) 씨는 임신 30주 때까지 반도체 공정에서 일했다. 황 씨는 임신한 몸으로 고온의 설비에 ‘런 캐리어’를 넣고 빼는 일을 주로 했다. 황 씨의 딸은 가성장폐색이란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 올해 아홉 살이 된 딸은 밥 대신 고농도의 수액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 오른쪽 가슴에는 중심정맥과 연결된 주사바늘이 24시간 꽂혀 있다.

자책을 극복한 이 엄마들은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거나, 할 예정이다. 산재 인정 문턱이 높은 사회에서, 관련 법과 제도가 없어 용어마저 생소한 일을 추진하는 게 얼마나 막막했을까. 포기하지 않은 엄마들의 행동은 우리 사회에 무거운 화두를 던졌다.

‘부모의 노동환경 탓에 아픈 몸으로 태어난 아이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태아산재 법이 통과된 당일 떠오른 말 ‘갑자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문제는 오래전에 생겼고, 누군가는 그 문제의 인과관계를 따졌으며, 10년간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을 오가며 싸웠다. 없던 법과 제도가 저절로, 갑자기 생겨날 리 없다. 나의 ‘갑자기?’는 ‘이제야?’로 수정돼야 마땅하다.

최현철(가명) 씨와 아들 최지후(가명) 군이 학교 운동장을 뛰고 있는 모습. ⓒ주용성

엄마들의 노력으로 이제야 겨우 산재법상 태아가 수급주체로 인정됐다. 완벽하고 정확한 목적지에 닿은 건 아니다. 이번 개정안에는 남성 노동자의 업무 환경으로 인한 태아산재 보상은 포함되지 못했다.

이미 새로운 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다. 삼성 LCD 노동자 출신 최현철(가명, 40) 씨는 지난 1일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해 선천성 희귀질환을 앓는 아이를 낳았으니 태아산재를 인정해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삼성은 이미 2019년 5월에 최 씨에게 경제적 지원금을 보상했다. 아버지의 노동환경과 자녀의 아픈 몸 사이의 인과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셈이다.

내 탓을 극복한 엄마들의 인식 변화가 끝내 없던 법과 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제는 정부가 아빠 업무 탓에 아이가 아플 수도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좀 하면 어떨까? 정부의 인식 변화가 기왕에 만들어진 법을 조금 더 좋게 만들 것 같아 하는 말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