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엄마 이야기 금지!” 염전노예 이근만의 비밀>에서 이어집니다.

#6. 목표여객터미널 : 탈출

세상 어디에나 “머리 좋은 놈들”이 있다. 염전노예 중에서도 “잔머리가 비상하게 발달한 놈”이 있었다. 옆동네 노예 남기현(가명)이 딱 그랬다. 돈 한 푼 못 받고 일한 지 어느덧 16년째가 된 2007년 겨울, 남기현이 이근만에게 슬쩍 말했다.

“야, 우리 토끼하자.”

‘토끼’는 섬에서 도망가자는 노예들만의 은어다. 산으로 도망간 ‘산토끼’, 바다로 도주한 ‘바다토끼’…. 그 섬엔 수많은 토끼들이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다시 잡혀와 두들겨 맞는 “초주검 토끼”가 되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다.

“목포로 토끼하면… 내가 못 받은 월급도 받게 해주고… 여자도 만나게 해줄게.”

남기현의 유혹은 달콤했다. 이근만은 토끼가 되기로 결심했다. 잔머리가 발달한 남기현은 계획이 다 있었다.

“으슥한 바닷가에 숨어 있었는데, 정말 쎄네기(모터보트)가 오더라고. 그거 타고 하의도로 일단 토끼했지. 하의도 알지? 김대중 대통령 고향.”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하의도에서 하루 머문 뒤, 다시 “쎄네기를 타고 목포까지 토끼”했다. 육지 땅을 밟은 희귀하고 드문 토끼, 바로 이근만이다. 남기현은 2단계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고용노동부 목포지청에 임금체불로 박대성을 신고했다.

공권력의 힘은 강했다. 박대성의 동거인이 합의금 1500만 원을 들고 목포여객터미널 인근 여관방으로 찾아왔다. 이근만은 드디어 목돈을 만져봤다. 딱 하루 동안 말이다.

여관방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이근만 주머니엔 300만 원뿐이었다. 남기현은 1200만 원을 들고 어디론가 튀었다.

광주에서 출발한 차가 전남 무안에 도착할 즈음, 조수석의 이근만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며 말했다.

“동생, 그거 알어? 세상 어디에나 머리 비상한 놈들이 있어. 그런 놈들은 꼭 있어!”

육지 땅을 밟은 희귀하고 드문 토끼, 바로 이근만이다 ⓒ셜록

#7. 도초도 : 새우잡이

이근만의 손에 남은 300만 원도 염전에 고인 바닷물처럼 순식간에 증발했다. 돈 받긴 어려워도 쓰는 건 한순간이었다.

“뭐 하긴. 술 먹고, 자고, 여자 만나고… 그러면 금방 사라져. 허무하게 사라져.”

이근만은 한글은 읽고 쓸 줄 알지만 돈 계산은 약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여관방이 있었더니 어느새 빚만 쌓였다. 다시 팔려갈 운명. 직업소개소는 도초도 새우잡이를 추천했다.

동생, 새우 잡아봤어? 굵은 새우 말고… 째깐한 거. 바다에 오도 가도 않는, 서 있는 배가 있어. 거기서 1년 내내 새우 잡아봤는가? 그 일이 말이여… 아주 힘들어. 기가 막히게 힘들어.”

이근만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새우잡이 배를 탔다. 운 좋게 육지에 닿았을 때, 한 주민에게 휴대전화기를 빌렸다. 이근만의 주머니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그가 소지한 유일한 번호.

“형님이여? 여기 도초도인데… 나 좀 다시 델구 가면 안 될까?”

“형님”은 염전주인 박대성이다. 얄궂게도 이근만의 주머니에 있던 유일한 번호의 주인은 박대성이었다. 이렇게 이근만은 다시 염전노예로 돌아갔다. 답답해서 내가 물었다.

“근만 아저씨, 왜 다시 염전으로 돌아갔어요?”

이근만은 대답하지 않고 차창 밖만 내다봤다. 더는 간판을 읽지 않았다. 잠시 뒤 한숨을 크게 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부탁할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새우잡이보단 염전 일이 낫더라고.”

#8. 파출소 : 가족이란 무엇인가

다시 섬으로 돌아가 노예생활을 한 이근만.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터졌을 때, 경찰도 그의 선택과 이력을 특이하게 여겼다. 그해 3월 10일, 섬 파출소에서 경찰이 이근만에게 물었다.

경찰 : “왜 섬에서 나가지 않고 일을 하나요?”
이근만 : “여기가 밖보다 살기 좋아서요.”

경찰 : “박대성을 가족이라 생각하는가요?”
이근만 : “네.”

경찰 : “왜 가족이라고 생각하나요?”
이근만 : “한 30년 동안 (같이) 살았으니까요.”(실제로는 약 20년)

경찰 : “박대성도 이근만 씨를 가족으로 생각할까요, 일꾼이나 종업원으로 생각할까요?”
이근만 : “(한숨을 쉬고) 종업원이라 생각할 테죠.”

이근만의 태도는 섬을 벗어난 3월 14일, 전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진술할 땐 많이 달라졌다.

경찰 : “다른 염전에서 일하러 갔을 때 노임은 어떻게 하였나요?”
이근만 – “돈을 받아오면 바로 박대성에게 줍니다.”

경찰 : “이근만 씨가 일을 해서 받은 돈을 왜 박대성에게 줍니까?”
이근만 : “그것이 불만입니다. 일은 내가 했는데….”

경찰 : “돈을 안 주면 어떻게 하나요?”
이근만 : “성질 내고, 욕하고, 염병을 해요. 뻔히 그 사람 성질을 아니까… 내 돈 달라고 하면 때릴 것이니까… 그 사람 속셈을 다 알고 있어요.”

경찰 : “박대성은 나쁜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인가요?”
이근만 : “나쁜 사람이요.”

경찰 : “앞으로 어디에서 살고 싶나요.”
이근만 : “일자리가 문제라…. 육지에서 할 것이 없잖아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9. 뻘낙지 전문식당 : 간절한 기도

건강보험공단에 가기 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근만은 “불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무안군의 낙지골목을 보더니, 눈이 돌아갔다.

“어이 동생, 낙지 어때?! 무안이 뻘낙지가 유명한데…. 낙지탕탕이 한 접시 먹고 싶네.”

뻘낙지 전문식당에 들어갔다. 이근만의 제안대로 낙지탕탕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이근만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곧바로 눈을 꾹 감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줬잖아. 그럼 고맙다는 기도를 하고 먹어야 하는 거야. 왜냐? 이 모든 건 하나님이 주시는 거거든.”

이근만은 마시듯이 낙지를 들이켰다. 소주도 한 병 시켰다. 긴말을 할 때처럼, 이근만은 눈을 감고 낙지와 함께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염전노예 피해자 이근만은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한다 ⓒ셜록

“동생, 그거 알어? 나한테 이렇게 대접을 해준 사람은… 우리 동생이 처음이야. 난 좋은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에이, 설마요. 낙지 하나가 뭐라고요.”

이근만은 작은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라니까! 난 말이야. 염전에서도, 새우잡이 배에서도 열심히 일했어. 정말 열심히 일했어.”

낙지를 씹으며 길게 말하려니 힘든지 이근만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으면, 돈을 줘야지. 왜 나한테는 다들 돈을 안 주는지… 정말 섭섭해! 내가 뭔가를 줬으면 상대는 보답을 해야지. 안 그래? 난 정말 섭섭해. 난 정말 죽을 듯이 일했거든. 근데 왜 나한테는 다들….

가슴속에 맺힌 게 많은지 이근만은 한참을 말했다. 그에게 “왜 바보처럼 돈 달라는 말을 못했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잘못은 이근만이 한 게 아니니까.  잘못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상대방이 한 거니까.

#10. 건강보험공단 : 말의 기술

이근만의 일생에는 섭섭하고 억울한 일 투성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한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그의 처지를 내가 직원에게 설명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를 찾은 이근만.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셜록

그는 이번에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근만은 넋두리처럼 혹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말이라는 건 말이여… 그거 대단한 기술여. 말을 한다는 건… 큰 기술이여. 난 그런 기술이 없어. 우리 엄마도 없었어. 내가 왜 기술이 없냐… 뭐… 내가 말해도 어차피 다들 내 말은 안 들어. 아무도 안 들어줘….”

#11. 가덕마을 : 엄마 이야기 금지

이근만의 집에 놓인 가족 사진에는 엄마 모습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엄마 이야기 금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비밀은 우연한 계기로 풀렸다.

일을 마치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는 길. “전남 함평”이라는 이정표가 나오자 이근만은 “고향마을에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는 함평 가덕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에 도착해서야 이근만이 “엄마 이야기 금지” 이유를 털어놨다.

“엄마가 말을 못하고, 듣지도 못했으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어. 엄마를 생각하면 내 가슴이 짠하고 아파. 너무 아파. 미안하고. 그래서 엄마 생각을 하기 싫은 거야.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살 수가 없어.”

고향 마을을 둘러본 이근만은 “많은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더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해 뭣혀. 맘만 아프지….”

염전노예 피해자 이근만과 함께 그의 고향 함평군 가덕마을을 찾았다. ⓒ셜록

#12. 탈출 노예의 궁전 : 한밤의 전화

섬에서 20년간 ‘탈탈 털린’ 이근만, 그는 지금 열 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갈 데도, 부르는 데도 거의 없다. “이젠 늙어서 염전에서도 날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전화기에 내 번호를 저장해줬다.

12월 연말, 그에게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그의 말은 대개 비슷하다.

“동생… 아직도 교회 안 다녀? 그럼 안 돼!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실천해야 나처럼 은혜롭게 살 수 있어. 나 새우잡이 배에서, 염전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도 살아 있잖아. 그게 다 하나님 덕분이라니까!”

하나님에 관한 말씀은 자주 이렇게 이어진다.

“동생 근데, 5만 원만 보내줄 수 있을까? 국밥 한 그릇 사먹을라고. 내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난 열심히 일했는데, 다들 나한테 돈을 안 주니까…. 난 가난해. 돈이 없어. 그래도 하나님이 지켜주니까….”

#13. 에필로그 : 이근만의 자부심

이근만은 섬에서 도망친 노예이자, 돌아온 노예였다.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2022년 4월 기준, 그 섬의 염전에 고용된 노동자는 114명. 이중 절반은 2014년 염전노예 사태 때 섬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이다. 해당 군청은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이근만처럼 자기 발로 돌아갔다고 그들을 ‘노예’로 대한 섬 사람들의 행동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다. 먹여주고 재워준 일이 ’20년 중노동 무임금’을 상쇄할 리도 없다. 이근만은 인터뷰하는 동안 자부심과 섭섭함을 자주 밝혔다.

“난 정말 섬에서 두들겨 맞으면서도 열심히 일했어. 내가 그렇게 일로 베풀었으면, 그 사람들도 좀 나한테 보답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섭섭했지.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자꾸 바보 취급하고, 이웃으로 생각도 안 하고. 지금도 그게 가슴에 남아.”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https://alook.so/posts/70tvjoq)와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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