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쿵쾅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날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수현아… 오빠 돌아왔다. 네 오빠가 17년 만에 집을 찾아왔다.

오래전에 실종된 사람, 경찰도 찾지 못해 어디선가 외롭게 죽었을 거라 여긴 오빠가 자기 발로 집에 돌아왔다니. 발 딛고 선 현실 세상이 모두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심리치료 수업을 받는 발달장애 학생은 그날따라 지각을 했다. 평소라면 “늦었네” 가볍게 말했을 텐데, 이번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다른 이야기가 올라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선생님이 오래 기다렸잖아. 많이 보고 싶었거든.

가슴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눈앞의 아이만이 아니라, 오빠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이로써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생은 오랫동안 오빠를 기다렸다.

20대 중반에 사라져, 40대 초반에 돌아온 오빠는 어떤 모습일까.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고향 부산까지 가는 내내 몸을 뒤척였다. 부산역 광장에서 17년 만에 마주한 오빠의 모습에 동생의 가슴은 무너졌다. 

“다리를 절고, 빡빡 깎은 머리에 상처가 너무 많은 거예요. 미소년 같았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왕년의 모습이 사라진 건 당연했다. 오빠는 섬에 끌려가 두들겨 맞으면서 염전노예로 살았다. 그날 밤, 동생은 새로운 걸 깨달았다.

“사람이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밤새 울었는데,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고, 오빠가 너무 불쌍했고….”

박수현(가명, 1974년생) 씨는 오빠 박종현(가명, 1973년생)에게 미안한 게 많다. 그날의 눈물에는 후회와 회한도 들어 있다. 오빠를 망가뜨린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생은 오빠의 ‘잃어버린 17년’과 유년 시절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동생 박수현(가명)의 1981년 초등학교 입학식 모습. 왼쪽이 오빠 박종현(가명)이다. ⓒ박수현 제공

어린 박종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아이였다.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었고, 묻는 말에만 단답형으로 겨우 답하는 정도였다. 엄마가 오빠를 병원에 데려갔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오빠는 여섯 살 무렵에 자폐성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저는 오빠가 다른 집 형제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정말 창피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오빠가 미웠고, 제가 못되게 굴기도 했고..

어린 시절, 오빠는 동네에서 유명인사였다. 밥 먹듯이 집과 길을 잃어버렸으니, 부산 감전동 고향 마을은 오빠를 찾는 ‘마을방송’이 수시로 울려퍼졌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동네 사람들은 ‘2인 1조‘로 짝을 이뤄 손전등을 들고 오빠를 찾아 나섰다. 동네 파출소 순경들이 ‘박종현’ 이름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

늘 말이 없고 종종 독특하게 행동하는 오빠는 초등학교에서도 꽤나 유명한 아이였다.

“제가 오빠랑 한 살 차이가 나거든요. 초등학교 내내 오빠랑 같이 다닌 거죠. 어린 마음에 ‘남들과 다른’ 오빠를 창피하게 여겼어요. 학교 친구들은 나와 오빠를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는데… 부끄럽고 부담스러웠어요.”

엄마와 아버지는 자폐성 발달장애 오빠를 남들과 똑같이 키우려 많은 애를 썼다. 특히 엄마는 ‘치맛바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활약했다. 수시로 학교에 찾아와 교사에게 “우리 종현이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고, 틈만 나면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음식을 해주며 “우리 종현이랑 잘 놀아달라”고 당부했다.

일부러 오빠에게 돈을 주고 가게에 심부름을 보내기도 했다. 물건을 고르고 사는 법, 셈을 하고 거스름돈을 받는 법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엄마와 아버지의 소망은 “남들처럼, 남들과 똑같이 우리 종현이를 키우는” 것이었다.

다행히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이어서, 주민들은 오빠를 함께 돌보고 키웠다. 집을 못 찾으면 데려다 주고, 용변을 실수하면 치워주고. 하지만 오빠의 특별함은 동생 박수현에게 부담이었다.

“엄마는 적십자봉사회 등에서 사회활동을 왕성히 했어요. 제가 오빠랑 둘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근데 오빠는 다른 집 형제들처럼 나와 말 상대도 놀이 상대도 되지 못했어요.”

동생 박수현(가명)은 초등학교 시절, 캄캄한 밤 화장실에 갈 때면 오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지원

무료함이 극에 달하면 동생은 오빠에게 말을 태워달라고 했다. 오빠는 거절하지 않고 동생에게 등을 내주고, 두 팔과 무릎으로 방을 기어다니며 말을 태워줬다. 자전거 뒷좌석에 동생을 태우고 동네 골목을 다니기도 했다. 늘 말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도, 동생 수현이의 부탁은 거절하지 않았다.

일명 ‘오빠의 효능감’이 폭발한 적도 있다. 우선, 집에 바퀴벌레가 출몰할 때다.

“제가 바퀴벌레를 보고 무서워하고 피하면, 오빠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잡는 거예요. 그때 ‘아… 오빠가 저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싶었죠.”

다음은 화장실 갈 때다. 1980년대 초반, 부산 감전동 주민들은 대개 공동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했다. 어린 동생은 밤에 화장실 때면 늘 오빠를 불렀다.

“무서워서 오빠한테 같이 가자고 했죠. 그럼 오빠는 한 손에 전등을 들고 같이 가줬어요.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보면 내 옆에서 오빠는 전등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죠.”

하지만 오빠의 효능감은 언제나 찰나로 끝났다. 시간이 흐르고 몸도 커지면서 “오빠 때문에 안 되는 일”과 짜증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집이 문제였다. 남들은 집도 넓히고 이사도 잘 가는데, ‘종현-수현이네’ 는 남들처럼 살 수 없었다.

“제 방도 갖고 싶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데, 오빠 때문에 이사를 갈 수 없었어요. 겨우 교육시켜서 오빠한테 집 찾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사를 가면 오빠가 집을 못 찾아오잖아요. 감전동 이웃들처럼 돌봐줄 사람이 없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이 힘든 오빠 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못 갔어요.”

오빠 때문에 이사를 못 가니, 동생이 떠나야 했다. 동생은 피아노학원에 가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늦게 집에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고교는 집에서 먼 곳으로 진학해 학교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오빠와 멀어졌다.

오빠 덕분(?)인지 타고난 재능 때문인지, 동생은 피아노 대회에 나가 자주 상을 탔다. 대학도 피아노 전공을 택해 먼 곳으로 갔다. 몸도 마음도 오빠와 더 멀어졌다.

IMF 파도가 덮치기 직전, 종현-수현 남매의 집이 먼저 타격을 입었다. 아버지는 시계도매업을 했는데, 1997년 부도를 맞았다. 대학생 박수현은 피아노 레슨을 하며 집에 돈을 보탰다. 빚쟁이들이 자주 집으로 찾아오고 수시로 전화로 “돈을 달라”고 독촉했다.

“그 무서운 빚쟁이”를 세상 물정 모르는 오빠가 집에서 자주 상대했다. 빚쟁이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전화기 너머에서 욕을 하기도 했다. 발달장애인 오빠도 위기를 충분히 감지했다.

실종되기 전 오빠 박종현(가명)의 모습. 왼쪽 박종현의 엄마다. ⓒ박수현 제공

오빠가 실종된 건, 1997년 그 즈음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오빠는 땡볕 아래 뿌려진 물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빠를 봤다는 마을 주민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오빠는 수시로 사라졌거든요. 이상한 종교단체에 몇 개월 끌려갔다 온 적도 있구요. 익숙했던 일이어서 기다리면 오겠지, 오겠지, 했는데 안 오는 거예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도 찾을 수 없고….”

오빠 박종현은 누구에게 끌려간 게 아니다. 빚쟁이들의 독촉으로 집이 어려워졌다는 걸 안 오빠는 스스로 부산 자갈치시장에 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말 없는 오빠가 직업소개소 사장에게 입을 열었다.

“일 좀 시켜주세요. 돈 벌어야 하는데…. 리어카 끄는 일 할 수 있어요.”

오빠는 딱 봐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직업소개소 전문가(?) 눈에는 그게 오빠의 매력으로 보였다. 오빠는 조기잡이, 새우잡이 배로 팔려갔다.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겪어보지 못한 쓴맛이 오빠를 기다렸다.

박종현은 지난달 19일 인터뷰에서 이런 기억을 들려줬다.

“새우잡이 배였나, 조기잡이 배였나…. 갑자기 인부 한 명이 몽둥이로 제 머리를 때렸어요. 일하는 게 마음이 안 든다면서… 머리에서 피 쏟아지고 난리가 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해양경찰이 저를 봤어요.”

경찰은 오빠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며 오빠를 해경 배에 태웠다. 그렇게 뭍으로 나왔는데… 박종현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거기가 부산인지, 군산인지, 목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역시 기억이 불분명하다. 기억하는 건 하나다.

배를 3년 탔는데… 돈은 하나도 못 받았어요. 월급 달라고 하면 똑같이 말하던데요. ‘지금은 곤란하다… 나중에 줄게….”

오빠는 어떻게 전남 목포까지 갔는지, 무슨 연유로 염전으로 유명한 섬으로 팔려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염전노예 사건 판결문에는 섬 주민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 35만 원 준다”는 말로 직업소개소에서 오빠를 산 걸로 나온다. 2003년 즈음의 일이다.

전남 한 섬의 염전과 추수를 마친 논 모습 ⓒ셜록

그 즈음 부산의 고향집은 완전히 몰락했다. 부도와 빚쟁이에 시달린 박종현의 부모는 이혼을 했다. 엄마는 부산을 떠나 수도권으로 이주했다. 동생 박수현은 음악공부를 계속 할 수 없어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부산을 떠났다.

아버지는 부산 감전동 쪽방에 남았다. 

“아버지는 오빠가 살아 있으면 집에 돌아올 거라고 막연하게 믿은 거예요. 자기마저 동네를 떠나면 오빠가 찾아올 수 없으니까, 감전동에 남았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경찰도 오빠를 찾아내지 못했다. 오빠를 미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이 되어 동생 박수연의 가슴을 지독하게 두드렸다.

“오빠가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으니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오빠한테 장난치고 괴롭힌 기억도 자꾸 떠오르고…”

전공을 심리상담으로 바꾼 동생은 “어린시절의 오빠같은 발달장애인과 가족들을 자주 만났다. 동생은 “전공과 직업을 바꾼 배경에는 오빠에 대한 부채감도 있다”고 고백했다.

기억과 죄책감은 세월 앞에서 무기력했다. 오빠는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가끔 뉴스에서 백골이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면 “혹시 오빠가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였다.

2014년 초봄, 염전노예 사건이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온통 장식했을 때였다. 집에서 뉴스를 보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 종현이도 혹시 저런 섬에 끌려가 있을까….”

기대와 걱정은 빗나갔다. 염전노예 사건이 한창일 때, 오빠의 이름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반전은 염전노예 사건이 마무리된 그해 가을에 벌어졌다. 오빠가 자기 발로 걸어서 부산 감전동에 돌아왔다. 경찰이나 외부 사람의 도움도 없이. “세상에 그런 노숙인은 없을법한” 모습으로 말이다.

“염전노예 사건 터졌을 때, 주인이 오빠를 창고에 가뒀대요. 그런데 단속이 자꾸 떠서 오빠를 부려먹을 수 없으니까, 풀어줬다고 하더라구요.”

17년 만에 고향집을 찾아온 염전노예 피해자 박종현(가명) 씨 ⓒ셜록

오빠는 서해안의 섬에서 부산 감전동까지 어떻게 왔을까?

“드라마,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 건데요. 오빠 기억 속에 ‘우리 동네 감전동’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물어물어 부산서부터미널까지 왔다고 하더라구요. 거기서 또 감전동까지 걸어왔는데… 17년 만에 너무 많이 변했잖아요. 그래서 집을 못 찾았는데….”

그 순간 엄마의 지독한 교육이 오빠의 기억에서 빛을 발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오빠한테 만날 외우게 시켰거든요. 우리 집이랑, 앞집 구씨 아주머니 전호번호를요. 길 잃어버리면 집이나 구씨 아주머니에게 연락하라구요. 시간이 지나 우리 집 번호는 바뀌었는데, 구씨 아주머니 번호는 그대로였어요. 오빠는 그걸 정확히 외우고 있었고. 동네 근처에서 구씨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자기 박종현이라고….”

오빠는 늘, 어떻게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발달장애인 오빠에게 집과 감전동은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곳,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섬에서도 염전주인에게 전화 좀 쓰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거부당했다고, 오빠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돌아온 오빠는 몸도 마음도 망가진 상태였다. 염전주가 찾아올까봐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동생이 물으면 짧게,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이다. 동생 박수현은 오래도록 오빠에게 말을 걸어 기억을 끄집어내, 결국 염전주인을 알아냈다.

오빠 머리의 무수한 상처는 “염전주인에게 망치로 맞은” 결과였다. 절룩이는 다리 역시 고된 노동과 폭행의 결과였다. 동생은 오빠를 착취하고 때린 염전주인을 찾아내 법정에 세웠다.

그토록 오랜 인터뷰에도 오빠는 동생에게 먼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유년의 그때처럼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오빠는 동생의 도움으로 지금은 부산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자립해 살고 있다. 복지관과 공무원의 도움도 받고 있다. 스마트폰도 개설했고, 은행에서 돈 찾는 법도 배웠다.

유년 시절 박종현(가명)과 가족의 모습. 바다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박수현 제공

동생 박수현은 서울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2015년 어느 겨울날, 동생 스마트폰에 오빠 이름이 떴다. 오빠가 먼저 전화를 건, 대화를 시도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놀란 동생은 전화를 받았다.

“수현아….”
“응… 오빠….”

드디어 오빠가 말을 걸었다. 동생의 가슴이 뛰었다.

“니… 대학은 졸업했나?”

17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빠의 첫 질문이었다. 동생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집안이 몰락해 모든 가족이 돈을 벌던 1997년 그때, 오빠는 동생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응… 오빠 나 졸업했다. 졸업식 때 오빠 없어서 엄마, 아버지랑만 사진 찍었다.”
“다행이네…. 그게 항시 궁금했다. 네가 졸업 못했을까봐….”

동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울었다. 오빠는 동생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심리상담사를 이해 못할 듯해 동생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나 그런 일 해, 오빠.”

동생은 오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유년 시절을 제외하면, 동생이 집을 떠나 있거나, 오빠가 섬에 있었다. 동생은 오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오빠 사건 해결을 위해 목포와 부산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던 2015년의 어느 날, 동생은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나랑 같이 놀러가자.”
“나… 바다가 보고 싶다.”

예상 밖 대답. 동생은 “섬에서 그 고생을 하고 또 바다가 보고 싶냐”고 물었다. 오빠는 그래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 길로 남매는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갔다.

섬에서 많은 고생을 한 염전노예 피해자 박종현(가명)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광안리 바다에서 박종현은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오지원

바닷가에 도착한 오빠는 벤치에 앉아 오래 바다를 바라봤다. 마치 키 작은 어린아이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듯이, 오빠는 두 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오빠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동생은 오빠에게 오랫동안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오빠… 어릴 때 내가 오빠 괴롭혀서 미안해. 오빠도 나 많이 미웠지?”

오빠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난 그런 거 다 잊었다.”

동생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오빠의 말에 미안함이 커지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빠는 옅은 미소로 바다를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계속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오빠는 스스로에게 ‘이젠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박종현이 혼자 사는 집의 벽에는 사진이 두 개 걸려 있다. 엄마, 아버지, 종현-수현 남매가 담긴 가족사진. 그리고 고교생 박수현이 피아노 치는 사진 하나.

염전노예 피해자 박종현(가명)이 사는 집 한쪽 벽엔 가족 사진과 여동생이 피아노 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다 ⓒ셜록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https://alook.so/posts/54twLK4)와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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