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준의 집안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종가의 종손인 할아버지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면소재지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다. 학교 문턱도 못 넘어본 사람도 수두룩하던 그 시절,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돈이든 명예든 모자란 것이 없는 집안이었다.

이세준이 네 살 되던 1950년, 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마을까지 인민군이 들어왔다. 인민군은 이세준의 할아버지를 ‘인민위원장’으로 지명했다. 종가의 종손인데다 지역 유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원치 않았지만, 세상이 뒤바뀌었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말씀 들어보면, (인민군한테) 밥해준 거 뿐이래요. 그런데 ‘인민군한테 밥을 왜 해줬노?’ 그러면서 인민군한테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거예요. 할머니 말씀은 국군한테도 밥해줬대요. 양쪽 다. 밥을 다 해줬는데 부역혐의 집안이 된 겁니다.”

인민군의 점령은 채 두 달도 되지 못했다. 9월 말에는 국군과 경찰이 안동을 수복했다. 수복 이후 경찰은 지역 곳곳에서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한 혐의자를 색출하는 데 열중했다.

경북 안동지역 부역학살 사건 피해 유족 이세준 인터뷰 ⓒ구자환 감독

그때 아버지가 안동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밤에만 몰래몰래 걸어서 안동까지 왔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우선 몸을 피해 있으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집안이니 경찰이 눈여겨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다가 와서 아무 죄가 없으니 괜찮다” 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에, 괄시받던 동네 머슴들이 ‘저 집에 아들 왔다’고 고발을 했어요. 이하출장소 경찰들이 집에 와서 ‘아드님 오셨구나’ 하고 웃으면서 인사도 하고 악수도 했답니다. 잠시만 같이 가서 이야기나 좀 하자고 데리고 나갔대요.”

집을 나선 경찰들은 굽이를 돌자마자 표정을 바꿨다. 웃으며 데리고 나간 아버지의 손목을 철사로 묶고 죄인처럼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마을 사람이 지켜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바로 그날 이하출장소 도랑 건너편 골짜기로 끌고 가서 처형한 겁니다. 이튿날 연락이 왔어요. 시신 찾아가라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안동 지역에서는 1950년 9월부터 12월까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또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민간인이 경찰과 국군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학살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 약 7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 보고서에 게재된 학살 현장 사진 ⓒ진실화해위원회

할머니는 아들(이세준의 아버지)을 잃고 아버지 제사 때마다 통곡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일평생을 아들 제삿날마다 통곡을 했던 걸 제가 기억을 합니다.”

이세준의 어머니는 스물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됐다. 홀로 외동아들 이세준을 키우며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78세에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제일 불쌍하죠. 그리고 저도 성장과정부터 참 어려웠습니다. 동네별로 연락책이 있어요. 내가 움직이는 걸 다 (경찰) 지서에 보고해요. 일주일 이상 외출할 때는 지서에 신고하고 가야 되고, 갔다 와서도 또 신고해야 되고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을,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은 슬퍼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빨갱이’의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 때문에 아들 이세준 역시 ‘감시’의 대상이 됐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와 고통은 쉽게 잊히지 않는 상처로 그에게 남아 있다.

저는 평생을 직업을 못 가졌습니다. 신원조회 때문에. (학살로) 아비를 잃은 한(恨)도 있지만, 일평생 무직으로 지내면서 너무나 궁핍하고 어렵게, 그렇게 평생을 보냈습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