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근은 ‘도장’이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도장을 받던 사람들. 누구는 이웃사람이고 누구는 또 친척이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깟 도장 한 번 못 찍어주랴. 뭔지도 모르고 찍어준 도장은 황기원(1950년 당시 11세)의 집안에 상상도 못한 풍파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단체로 도장을 찍어달라고 동네를 댕겼어요. 우리 동네가 한 팔십몇 호 됐어요. 젊은 사람들만 도장을 다 받은 거야. 도장 찍어줄 때는 몰랐지. 뭐하는 건지.

황기원(1950년 당시 11세). 다큐몹 인터뷰 화면 캡처. ⓒ구자환

황기원이 살던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마을 사람들도 도장을 찍었다. 그중에는 황기원의 아버지 황창숙도 있었다. 그가 도장을 찍은 서류는 바로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였다.

1949년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하며 결성된 국민보도연맹. 법률이나 훈령에 근거해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지만,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맡는 등 정부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안동 지역에서는 1950년 2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전쟁이 일어나기 약 4개월 전.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 안동군연맹’의 규모는 약 1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국민보도연맹 안동군연맹 결성 선포대회는 지난 20일 오전 10시 안동극장에서 열리였는데 이날 관민유지다수와 맹원 등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 폐부를 찔으는 애국애족의 조사는 일반맹원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한층 더 새로히 한 바 있었으며 (후략)”(남선경제신문, 1950. 2. 23.,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정말 ‘좌익전향자’뿐이었을까. 실제로는 ▲공비들에게 식량이나 의복을 어쩔 수 없이 제공했다는 이유로 가입되기도 하고 ▲징역을 살고 나와서 자동적으로 가입되거나 ▲도장을 잘못 찍어서 가입된 사람들도 많았다. 황기원의 아버지처럼.

황기원의 어머니에게 원한의 단어가 된 밀, 밀밭. ⓒpixabay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됐다. 황기원의 나이는 11세, 아버지 황창숙은 32세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7월 말. 지서(지금의 지구대에 해당) 경찰들은 ‘보도연맹원’들을 불러모았다.

“회의가 있으니까 보도연맹원들은 내일 지서로 오라고 연락이 왔어. 우리 아버지가 그날 밀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누가 가자고, 가야 된다고 억지로 그래서 데리고 갔어.”

아버지의 생사를 가른 첫 번째 불운. 어머니는 평생을 두고 이 순간을 원망했다. 그냥 하던 밀 타작이나 하고 있었으면 될 걸 왜 따라갔는지. 들어줄 사람도 없는 말을 허공에 뱉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지서에 도착한 뒤에 또 한 번의 불운이 찾아왔다.

“지서에 갔더니 (아버지를 아는) 면 직원이 하나 있었어요. (아버지한테) ‘형님,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다 오소.’ 그랬다는 거라. 자기들은 (여기 있으면 죽는다는 걸) 이미 아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됐어, 끝나고 가지 뭐.’ 그러셨대요. 그때 (눈치를 채고 집에) 왔으면 되는데… 그때만 빠져버리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못 빠진 거야.”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아버지는 작은 의심도 품지 않았다. 오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점심을 먹으러 돌아가라는 직원의 말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보도연맹원 소집의 목적이 회의가 아니라 ‘학살’이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포승줄에 묶이면서 알아차렸을까.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면서 세 번째, 마지막 불운이 찾아왔다.

“(기름)땅고개라고, 지서에서 한 2㎞ 될 거라요. 포승줄에 (사람들을) 엮어가지고 (끌고 갔어요), 우리 아버지는 가면서 (손목에 묶인 줄을) 이렇게 비볐어. 그렇게 포승줄을 딱 끊어가지고 (도망을 쳤어). 그런데 (멀리 못 가고) 등(언덕) 하나밖에 못 올라간 거야.

손목의 포승줄이 풀리는 순간,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온 힘을 다해 내달렸을 발걸음. ‘살아야 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버지는 거기서 총에 맞았다.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에 게재된 학살 현장(기름땅고개) 사진 ⓒ진실화해위원회

피바람이 지나갔다. 40명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는 소문이 마을을 떠돌았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나선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이 골짜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 음력 6월 13일(양력 7월 27일)이 아버지의 제삿날이 됐다.

“(같이 끌려간) 집안 어른 한 분도 (아버지가 도망친) 뒤에 도망쳤는데, 경찰들이 아버지 잡느라고 가서, 아버지 쏘느라고 그 사람을 못 쏜 거야. 그래서 도망을 가서 살았어. (…) 저 건너 밭에 고추 따러 가니까, 웬 사람이 숨어 있는 거야. 이상하다 싶어서 들여다보니까, 보지 말고 가라고 막 손짓을 하더라고. 그 다음에 우리 아버지 죽었다고 소문이 오는 거야.”

약 60년의 세월이 흐른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경북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1950년 7월 하순 안동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안동경찰서 경찰과 국군 8사단 25연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수상동 한티재 ▲와룡면 태리 기름땅고개 ▲서후면 성곡리 뒷산계곡 등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

진실화해위원회는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민간인의 수가 100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 2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황기원의 아버지 황창숙의 이름도 포함됐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렇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남은 가족들이 지나온 70년의 신산한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다. 원한과 회한이 뒤섞인 감정의 덩어리가 아직도 황기원의 말문을 막는다.

“어머니가 ‘밀 타작이나 하고 있었으면 될 걸 왜 따라갔느냐’고 평생 그 소리를 하더라고. 왜 따라갔느냐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 사는 데 고생이 많았죠. 혼자 농사지어서 먹고사는 것도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살았지. 말도 다 못하죠, 뭐 아이고…. 이젠 지나간 얘기니까 할 얘기도 없고…. 안타깝죠….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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