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이 그때 결혼한 지 불과 1년 정도밖에 안 됐을 땐데…. 음력으로 8월 스무 날 넘어서, 들에 나락(벼)이 누럴 때 나락 베러 갔다가….”

전쟁통에도 벼는 익었다. 온 들에 누렇게 벼가 익어 고개 숙이던 계절. 농사꾼에게 그보다 바쁜 때가 또 언제 있을까. 하양태(1950년 당시 7세)의 형님 역시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들에 나간 형님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하양태 가족이 살던 안동 마을은 경북 안동시(안동군) 서후면 교리. 안동 지역은 전쟁이 일어난 지 39일 만인 8월 3일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안동에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인민위원회에는 전쟁 전 좌익활동을 했던 주민들뿐 아니라, 강요에 의해 명단에 이름만 올리거나, 자기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인민군 점령기는 두 달도 되지 못했다. 국군은 9월 24일 낙동강 이남의 안동 지역을, 이틀 뒤에는 낙동강 건너 안동 읍내를 수복했다. 군인들은 수복작전과 더불어 ‘부역자 처리’도 진행했다. 수복 후 들어온 경찰들 역시 공비 토벌과 부역자 처리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연행-구금-조사 등 기본적인 법적 절차도 생략한 채 민간인들을 살해한 경우가 많았다.

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족 하양태 ⓒ구자환 감독

경찰이 총 메고 왔는데, 명단을 적어 온 모양이라. 아랫동네 정씨가 세 분, 윗동네 우리 일가(하씨) 세 분 이렇게 잡으러 왔는데…. 그중에 한 분은, 군경이 ‘이 사람 어디 갔나’ 이러니까, (누군가가) ‘이 사람 오늘 저 멀리 풍산면에 남의 집 일 하러 가서 여기 없다’고 그래서 살았어요. 나머지 다섯 분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서 화를 당하고….”

총을 멘 사람들이 같이 가자는데 버틸 재간이 있나.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던 다섯 사람 중에 형님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그날로 서후면 금계리 경광마을 산골짜기에서 희생됐다.

그때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 그의 증언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 조사보고서>(2008년)에 남아 있다.

김○○은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경찰 3명이 총을 메고 마을주민 5명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경광마을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났고 벼를 베고 난 후 마을에 오니, 마을사람들이 죽었다고 난리가 났다”고 진술하였다. (…) 아내가 오전에 서후지서 경찰이 집으로 와 자신을 찾았다고 하면서 “아마 제가 집에 있었으면 나도 경찰에게 끌려가 총살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중)

학살지인 경광마을 골짜기 가까이 살던 주민도 “총을 든 경찰 3명이 교리 사람 5명을 끌고 골짜기로 넘어간 후 얼마 있다가 총소리가 나더니 조금 지나 경찰 3명만 골짜기를 넘어와 서후면 소재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증언을 전했다.

“인민군 점령기에 심부름 했다는 부역혐의로 죄를 덮어씌워서 그런 거(처형한 것) 같아.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동장들이 (부역혐의자) 명단을 적어올릴 때, 자기하고 약간 감정이 있다든지, 조금 밉게 보였다든지 그러면 죄 없는 사람도 명단에 적어서 지서(지금의 파출소)에다가 얘기를 했어. (경찰은) 그걸 보고 나와서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총살을 시켰지.”

전쟁통에도 벼는 익었다. 온 들에 누렇게 벼가 익어 고개 숙이던 계절. 들에 나간 형님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pixabay

하양태의 형과 같이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람은 안동 지역에서만 최소 70여 명이 더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또는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많은 민간인들이 경찰과 국군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안동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 73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의심’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뭐라 설명 한마디, 항변 한마디 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죽은 자만큼이나 큰 원통함이 가족들에게도 남았다. 그 후로 73년이나 지났지만, 한(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세월만큼 켜켜이, 켜켜이 가슴 밑바닥에 쌓여갈 뿐이다.

한마디 묻는 것도 없이 무조건 총살을 시켰으니까, 그게 너무 억울하지. 요새 같으면 법으로 재판도 하고 그럴 텐데, 아무런 이유 없이 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무조건…. (희생된 형님이) 제일 맏형이다 보니까 (가족들 모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그 이야기를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죠.”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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