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28일. 한여름 땡볕 밑에서도 농사꾼의 손은 바빴다. 전쟁통에 인간세상은 뒤숭숭했지만 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경북 안동군(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산골 마을. 이재원(당시 5세)의 아버지 이유붕(당시 28세) 역시 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이유붕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찰 지서(지금의 지구대에 해당)에서 부른다고 했다. 그들은 한 마을 여섯 사람을 데려갔다. 강연이나 교육 같은 걸 들으러 가는 거라고 안심시켰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선 사람들 중 다섯 사람은 다시는 집으로, 농사짓던 땅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 마을 다섯 집의 제삿날은 ‘음력 6월 13일’로 똑같았다.

“지서에서 볼일이 있다고 오라 한다면서, 저희 마을에 제가 듣기로는 다섯 명(실제는 여섯 명)인가 불려간 걸로 알고 있는데, (아버지도) 그날 가서 돌아가신 모양이라요. 그때는 수갑을 안 차고 포승줄로 사람을 엮어가지고 갔는데, 한 분이 줄을 풀고 산을 넘어서 탈출한 사람이 있어요. 나머지 분들은 ‘(기름)땅고개’인가 거기서 모두 사살된 걸로 압니다.”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족 이재원 ⓒ구자환 감독

다섯 살 꼬마 이재원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이유. 바로 ‘국민보도연맹’이었다. 1949년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하며 결성된 국민보도연맹. 하지만 실제로는 좌익 전향자뿐만 아니라, 공비들에게 밥을 해준 사람,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 심지어는 도장 한번 잘못 찍어준 사람들도 가입됐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제목의 비상통첩을 전국에 내려보냈다. 주요 내용은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서 구금할 것’, 그리고 ‘요시찰인 중 특히 의식계급으로써 사찰대상이 된 자에 한하여 우선 구속하고 성명, 연령, 주소를 명기하여 보고할 것’ 등이었다.

“지서에, 그 당시에 순경 앞잡이라고 하나요?(의용경찰이나 우익단체원을 가리키는 듯) 그분이 저희 마을에 돌아가신 어르신들 명단을 해가지고 전달했는 모양이라요. 어머니는 그분을 항상 원망했어요. 나쁜 사람이라고…. 그 소리만 기억이 나죠.”

당시 안동경찰서 의용경찰로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 업무에 참여한 박○○은, 훗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치안국에서 명령이 내려와서 예비검속을 하였다”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안동경찰서가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서 안동경찰서 유치장에 20여 명, 무도관에 50여 명, 동부초등학교에 100여 명을 각각 구금시켰다가, 경찰과 군인이 남후면 쓰레기 집하장 부근, 무릉계곡 부근, 서지미 고개(기름땅고개) 부근에서 총살했다”라고도 증언했다.(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2009년)

“제가 기억나는 건, 오후 늦게이지 싶습니다. 저희 마을 입구에 조그만 산이 있는데, 거기 시신 몇 분이 누워 있고 뭐를 덮어놨어요. 어르신들이 그걸 들춰보고 울고 난리 났지요.

한 마을 다섯 집의 제삿날은 ‘음력 6월 13일’로 똑같았다 ⓒpixabay

다섯 살 꼬마가 예순이 되도록 세월이 흘렀다. 2005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듬해 이재원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 진술, 참고인 진술 및 목격자 유무, 시신 수습 여부, 제적부 사망 기록, 4대 국회 양민학살보고서 등을 근거 삼아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재원의 아버지 이유붕의 제적부에는 “1950년 6월 14일(양력 7월 28일) 와룡면 태동 유지령(油地領)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한자로는 유지령. 우리말로는 ‘기름땅고개’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유붕을 비롯한 25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경북 안동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기름땅고개 외에도 수상동 한티재, 서후면 성곡리 뒷산계곡 등의 학살지를 확인했다. 그곳에서 안동경찰서 경찰과 국군 8사단 25연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100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pixabay

“저는 형제가 없고 저하고 어머니하고 모자 둘이 살았거든요. 당시에는 저희들 생활하는 데 도와주는 분도 아무도 없고 하니까, 어머니가 농사도 손수 지어야 되고 땔나무도 손수 산에 가서 해오시고….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을 정말 많이 하셨죠.”

아버지의 죽음 이후, 6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다. 아버지도 돌아올 수 없다. 이재원은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던 그의 말이 잠깐 멎는다. 잠시 숨을 고르듯 마음을 고른 뒤 입 밖으로 꺼내보는 ‘우리 아버지’. 그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참 삶이 억울하죠. 아버지가 계셨으면 아버지 사랑을 받으면서 안 살았겠나, 생각을 많이 하지요. 주변에서 집에 형제도 있고 어르신들(부모님)도 있고 잘 사시는 분들 봤을 때, 우리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나고…. 아버지가 안 계신 원망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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