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을 진 노인들이 산길을 오른다. 느린 걸음. 고요한 침묵. 내내 땅을 보며 걷다가 이따금 고개를 들면, 아련한 눈빛들이 서로 마주친다.

이 땅이 아버지의 무덤이려니. 이 흙이 아버지의 뼈와 살이었으려니.

70여 년 전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들. 그들이 어느새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돼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경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를 알리는 안내판 ⓒ구자환 감독

마을에 와서 건장한 장정들만 불러가지고 이걸(구덩이를) 파라고 했답니다. (구덩이를 다 파니까) 마을 사람들은 다시 내려가라 하고, 그러고 난 뒤에 트럭에 사람을 태워가지고, 포승줄을 엮어가지고 올라가는 걸 마을 사람들이 봤답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메주골. 이성수(78세)는 마을 어른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전쟁 중이었지만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은 없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지시하고, 트럭에 사람을 가득 싣고 산을 올라간 이들은 우리 국군과 경찰이었다.

“조금 있으니까 총소리가 들리고, ‘아, 저기서 사람이 죽는가 보다’ 했죠. 한참 뒤에 또 경찰이 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불러가지고 (시신들을) 여기다 묻어라, 그래서 묻었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경주 지역은 좌우 대립이 심각했다. 빨치산의 활동과 군·경의 토벌작전이 반복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좌익으로 몰려 피해를 당했다.

▲빨치산에게 밥을 해줬다 ▲빨치산에게 잡혀간 경험이 있다 ▲가족 중 좌익활동을 한 사람이 있다 ▲경찰에 붙잡힌 남로당원에게서 입수된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을 주민에 의해 좌익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등 그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이런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만든 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 직후인 7~8월 경주경찰서는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해 경주경찰서 유치장, OK캬바레, 경주역사 등에 구금했다.

“아버지는 밤에는 산사람(빨치산)을 피하고, 낮에는 경찰이 무서워가지고 삼밭이나 콩밭 고랑에 숨어 있고 (그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저희 네 식구가 경주 황남동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됐는데, 어느 날 논에서 일하는 중에 경찰 두 명이 와가지고 아버지를 연행해갔습니다.”

이성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골짜기, 천북면 골짜기, 울산시 강동면 대안리 골짜기, 감포 앞바다 등 여러 장소에서 사살되거나 수장됐다. 적법절차 없이, 그저 ‘빨갱이’일 거라는 의심만으로 학살이 이뤄졌다.

그들에게 총을 쏜 이들은 육군정보국 산하 CIC(첩보부대) 경주파견대와 경주경찰서 경찰들이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군위·경주·대구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에는 당시 ‘사살’에 가담했던 사람의 증언이 남아 있다.

“트럭이 도착한 곳은 대구형무소가 아닌 내남면 노곡동의 골짜기였다. (…) 나에게는 5명의 여자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머뭇거리고 있자 다른 동료 경찰이 그 여자들을 사살하였다. (…) 두 번째 현장에 동원되었을 때는 낮 시간이었으며 현장에는 이미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당시 현장은 이북 출신의 CIC대장이 지휘하였는데 그날 처형된 사람은 65명 정도였으며 처형자 중에는 15세도 안 되는 소녀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경주 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이 최소 200명,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중 일부는 실제 좌익계열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농사를 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잡혀간 다섯 사람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은 3일 정도 있다가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풀려났답니다. 그 아저씨가 한 3년 지나서 그 얘기를 해줬습니다. 자기만 살아서 돌아온 게 미안해서 그동안 (우리) 어머니 앞에 말을 못했다면서….”

경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학살지에 누군가 놓아둔 꽃 ⓒ구자환 감독

학살지를 찾아가는 길은 여전히 험하다. 길도 없는 길을 걸어서 ‘아는 사람만 아는’ 땅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어디는 공장 부지에 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찾아가볼 수도 없는 땅이 됐다. 70년 전 피울음을 기억하고 있는 땅. 아들들의 눈에만 그날의 참상이 보이는 듯하다.

눈길을 끄는 꽃다발 하나. 또 누가 다녀갔을까. 사무치는 그리움을 꽃다발에 담아 남겨뒀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표식처럼, 빨간 꽃송이들이 땅을 지키고 있다.

“그분은 지금 마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고향(경주)에 오면 여기 꽃을 가져와서 꽂고…. 자기 아버지가 어디서 총살당하고 매장됐는지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2014년에 처음 여기 와서 학살지를 확인하고 그분이 여기서 땅을 짚고 대성통곡하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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