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볼 수 없는 검은 밤에 산으로 숨어들었다. 밤이슬 맞으며 몇 시간을 견디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첫 배가 눈에 들어왔다. 젖은 수풀 헤치며 해안선으로 달렸다. 가슴 터질 듯이 숨이 막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저 배만 타면… 저 배를 타고 이 섬을 떠나면… 노예 생활도 끝이다!’

이윽고 도착한 해안선, 눈앞에서 배가 사라졌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눈이 이 순간에 말썽이라니.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떨리는 초점이 자기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너 어디 가냐?”

밤이슬만큼 차고 낮은 목소리. 몸을 돌리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염전주인 홍성태(가명)였다. 몽둥이를 든 그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흔들리는 내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안 들려? 어디 가냐고, 이 새끼야!”

2014년 세상을 놀라게 안 염전노예 사건을 사회에 알린 염전노예 피해자 김주찬(가명) 씨. 그는 ‘안구진탕’이란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셜록

그가 몽둥이를 들었을 때, 소리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섬에서 탈출한 지 9년, 반복되는 이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얼마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김주찬(가명, 1973년생)의 무의식은 여전히 그 섬을 찾아간다.

꿈이 그 섬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이면, 좀처럼 다시 잠들기 어렵다. 대신 눈물이 나온다. 모두가 밉고, 모든 게 증오스러운 게 아닌데도 아침까지 뒤척이곤 한다.

‘그 아들마저 아버지를 닮았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까. 그 어린 녀석마저 나를 두들겨 팼다면, 마음 편히 그 섬을 증오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는 김주찬 씨를 지난 3월 만났다.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마주했을 때 김 씨는 기자에게 몇 번을 당부했다.

“그 섬 사람들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악몽에 시달린다는 염전노예 피해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런 김주찬 씨의 마음 속에는 그 섬에서 나고 자란 한 청년과 나눈 특별하고도 비밀스런 관계가 있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그 섬 사람들도 이제는 알고 있을까?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를 속인 ‘염전주인 아들의 결단‘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와 달리 그 아들은 엄청 착했어요. 아버지 몰래 자기 전화기를 저에게….”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를 속인 ‘염전주인 아들의 결단‘이 있었다 ⓒ셜록

김주찬 씨의 두 눈은 태어날 때부터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사물은 흔들렸고, 가까운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안구진탕‘이라는 증상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애를 극복한 슈퍼맨‘이 되길 바랐는지, 김 씨를 매몰차게 대했다.

김 씨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스무 살 무렵부터 독립했다. 불편한 눈으로 여러 직업을 거쳤지만, 돈은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그는 2012년 7월 한 직업소개소에 속아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 걸리는 섬의 염전으로 팔려갔다.

“한여름에는 새벽 서너 시에 홍성태 사장이 자기 방에서 비상벨을 눌러요. 그러면 일꾼들이 자는 방에 벨이 울리거든요. 그때부터 염전으로 나가 바닷물 채우고 소금 밀고 포장하는 일을 하는데, 늦으면 밤 10시, 12시까지도 작업해요. 아주 죽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일하다간 죽겠다 싶어 김 씨는 홍 사장에게 “그만두고 육지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너무 순진했다. 괜히 그런 말 했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런 날이면 염전주인 홍 사장의 아들이 곁으로 슬쩍 다가왔다.

“삼촌, 많이 아프죠? 아버지한테는 괜한 말 하지 마세요. 맞으면 아프잖아요.”

자기 집 노예에게 “삼촌“이라 부르던, 20세를 갓 넘긴 홍 사장의 아들. 아버지와 달리 진심으로 김주찬의 처지와 몸을 걱정하는 듯했다. 당시 청년은 공익근무를 위해 고향 섬에 들어와 있었다.

그 섬에선 염전노예가 자유롭게 길을 걷는 건 불가능했다. 혼자 선착장으로 간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과 비슷했다. 주민들은 서로 염전노예를 감시하며 “너희 집 일꾼 어디 간다“며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홍 사장이 잠든 깊은 밤에 처음 탈출을 시도했거든요. 산에서 새벽까지 버티고 한 민가에 찾아가 ‘육지에 나가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어디로 전화를 걸더라구요. 참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홍 사장에게 연락한 거였어요. 금방 홍 사장이 와서 저를 잡아갔죠.”

몽둥이질은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을 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괜히 기분이 틀어지면 그때 구타가 시작됐다. 전용 몽둥이가 있는 건 아니다. 기분이 수틀린 그 순간에 눈에 보이는 물건을 홍 사장은 집어 들었다. 홍 사장은 때리면서 자기만의 연설도 했다.

오갈 데 없는 너 같은 놈을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도망을 가? 배은망덕한 놈. 뭐? 급여를 달라고? 너 같은 놈한테 돈 줘봤자 술이나 처먹고 나쁜 짓만 하잖아. 그래서 안 주는 거야.”

염전노예 피해자 김주찬(가명) 씨는 안구진탕이란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멀리 있는 물체는 흔들리고, 스마트폰의 문자 메시지도 가까이 봐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염전노예 피해자 김주찬 씨는 2023년 현재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2015년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하다. ⓒ셜록

첫 탈출 실패 후에도 김주찬 씨는 육지로 가는 꿈을 접지 않았다. “여기서 맞아 죽거나,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사느니, 죽도록 탈출을 시도하는 게 타당한 길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탈출마저 실패하고 다시 매타작을 당한 밤, 같은 방을 쓰는 발달장애인 동료 염전노예가 말했다.

못 나가. 이 섬에선 죽어도 못 나가. 나도 옛날에 도망가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포기해.”

홍 사장의 아들도 어느 날 물었다.

“삼촌, 진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당연한 걸 왜 묻나 싶어 대답하지 않았다. 청년은 분명 아버지와 달랐지만, 홍 사장 귀에 들어갈까 우려되기도 했다. 가끔 툭툭 던지는 질문만 아니라, 청년의 여러 행동은 그 섬 사람들과도 많이 달랐다.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염전노예 김 씨에게 자기 오토바이를 빌려주는가 하면, 가끔 치킨을 배달시켜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별일 아닌 듯 보이지만 이런 행동은 섬 사람들의 감시, 촘촘하다 못해 깨알같은 착취 구조를 고려하면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홍 사장 밑에서만 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집 소금을 트럭에 실을 일 있으면 그쪽 노동도 해야 하거든요. 그럼 트럭 운전기사들이 우리 염전노예를 불쌍하게 여겨서 그런지 3만 원이나, 5만 원씩 수고비로 주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돈을 거의 다 뺏어가요. ‘아까 쉴 때 내가 커피 타주지 않았냐, 그 커피값 내야지’ 하면서, 우리한테 돈을 받아가요.”

믹스커피 값으로 몇 만 원을 받아가는 주민들 속에서 “치킨과 맥주는 쏘는” 청년은 그야말로 남달랐다. 시각장애가 있는 김 씨가 숙소에서 혼자 밥을 하거나 반찬을 할 때에도 청년이 종종 나서기도 했다.

“제가 눈이 안 좋아서 서투니까, 자기가 쌀 씻고 물도 맞춰주고 하더라구요. 간단한 반찬 만드는 거 돕기도 하고…. 아버지랑 달라서 디게 착했어요.”

홍 사장이 집에 없어 염전노예들이 짧은 휴식을 취하거나 낮잠을 자면, 청년을 집 밖에서 망을 보기도 했다. 저 멀리서 아버지 홍 사장 차가 다가오면 청년을 숙소로 다가와 속삭였다.

“삼촌, 일어나세요. 아버지 오고 있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염전주인 아들과 특별한 관계와 인연이 쌓여도 김 씨는 섬을 나가야만 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자력 탈출은 불가능한 상황. 휴대전화를 가진 노예는 없었고, 유선전화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섬 주민들 누구도 염전노예 김 씨에게 전화기를 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그 섬을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셜록

김 씨는 집에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탓에 집과 인연을 끊은 지 10년이 넘었고, 섬으로 팔려온 지도 벌써 2년째. 부모님 집 주소는 기억했지만, 여전히 그곳에 살고 계실지 확신이 안 섰다. 많은 불확실 속에서 김 씨는 밤에 몰래 편지를 썼다.

“OO섬 누구네 염전에 잡혀 있다, 감시가 심해 탈출하기 어려우니 엄마가 다른 볼일 보러 오는 것처럼 위장해서 섬을 방문해 달라고 편지에 적었죠. 써야 할 내용은 다 적긴 했는데, 이 편지가 마지막 기회인데… 엄마가 이사를 갔으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죠.”

오래 전 집 주소와 더불어 김 씨는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화 딱 한 통, 그거면 되는데, 그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어려웠다.

“집에 전화를 해서 식구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그게 너무 어렵고 막막했어요.”

집에 보낼 편지를 품고 전전긍긍 걱정을 이어가던 2014년 1월 겨울, 김 씨는 넘을 수 없는 선을 한번 넘어보기로 했다.

염전주인 홍 사장이 집에 없던 날이었다. 김 씨는 홍 사장 아들에게 어렵게 입을 뗐다.

“저기… 네 휴대전화를 한 번만 쓰면 안 될까? 딱 한 통화면 되는데….”

청년은 김 씨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 몇 초의 침묵은, 김 씨가 산으로 도주했을 때 아침을 기다리며 맞았던 그날 밤의 이슬처럼 춥고 차가웠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김 씨에게 건넸다.

“아버지 오기 전에 빨리 하세요.”

청년을 집 앞으로 나가 도로를 살피며 망을 봤다. 김 씨는 기억 속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용건만 말해야 했다.

“엄마, 저 주찬인데요, 길게 말 못합니다. 집 그대로 살고 계시죠? 그러면 곧 편지가 도착할 텐데요. 그 편지대로만 해주세요. 꼭이요.”

염전노예 피해자 김주찬 씨는 2023년 현재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2015년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하다. ⓒ셜록

짧고 굵은 전화 통화가 끝났다. 밖에서 망을 보던 청년이 돌아왔다. 이번엔 김 씨가 말없이 휴대폰을 청년에게 돌려줬다. 청년은 김 씨가 어디에, 무슨 용건으로 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삼촌… 이젠 집에 돌아가시는 거예요?”

김 씨는 청년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면, 목소리가 떨릴듯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도 그 마음 다 안다는 듯이 더는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은 김 씨가 육지의 누군가에게 전화했다는 걸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김 씨는 이발소에 가는 길에 편지를 보냈다. 일주일이 가고, 또 일주일이 갔다. 엄마는 섬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구로경찰서 소속 서제공 형사가 찾아왔다. 관광객으로 위장해서 말이다.

섬 사람들은 끝까지 겁이 없었다. 서제공 형사가 김 씨와 함께 섬을 나가려고 선착장에서 목포행 배표를 끊는데, 김 씨에겐 표를 주지 않으려 했다. 형사 앞에서도 “염전 일꾼은 주인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서 형사가 섬 사람을 “좋게 타일렀다”. 경찰 앞에서도 이러시면 곤란하다고.

2014년 1월 24일, 김주찬 씨는 드디어 섬에서 나가게 됐다. 배에 오르고서야 섬을 떠나는 게 실감났다. 돌아보니, 그 청년에게 고맙다는 말도 작별 인사도 못했다. 그렇게 청년과 영영 이별을 했다.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김 씨의 편지 한 통이었다. 김 씨를 시작으로 약 400명의 염전 노동자가 섬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염전노예 대탈출이었다. 그 편지 한 통 뒤에는 누구보다 가혹했던 염전주인 홍성태, 그의 아들이 있다.

그 청년이 보여준 연민, 호의, 친절…. 그리고 전화 한 통과 철저한 비밀 유지가 아니었다면 김 씨의 악몽은 꿈이 아닌 여전한 현실이었지도 모른다. 김 씨 탈출 이후, 그 청년의 아버지 홍성태 사장은 구속됐다. 그에겐 징역 3년 6월이 선고됐다.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김주찬(가명) 씨의 편지 한 통이었다. 그 편지 뒤에는 염전주인 아들의 전화 한 통이 있다. ⓒ셜록

인터뷰를 마쳤을 때, 김주찬 씨는 장애가 있는 눈을 오래 비볐다. 다시 초점이 흔들리는지, 아니면 마음이 흔드리는지 두꺼운 안경을 벗고 오랫동안 눈을 비볐다.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이 말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 섬 사람들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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