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를 운영했던 섬 주민들은 같은 세계관을 가졌는지, 다들 비슷한 말을 했다.

“오갈 데 없고, 육지에 있으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바보들’ 먹여주고 재워 준 게 우립니다! 지금도 우리 섬 이름을 포털에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염전노예’가 떠요. 피해자는 우리라니까요!”

이들의 말하는 것처럼 염전노예 피해자들은 생각, 판단력이 없고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일까?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 16일 오후 부산을 찾았다. 섬 탈출 이후 독립해 살아가는 염전노예 피해자 박종현(가명. 1973년생) 씨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박 씨는 IMF 즈음, 부도를 맞은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직업소개소를 찾았다가 섬으로 팔려간 발달장애인이다. 그는 실종 17년 만에 섬에서 탈출해 부산시 사상구 집까지 직접 찾아왔다. <셜록>은 지난 12월 30일 박종현 씨의 사연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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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염전노예로 살면서도 여동생이 등록금 문제로 대학 졸업을 못 했을까봐 걱정했다는 박 씨의 사연에 많은 독자는 공감을 표시했다.

박 씨는 전날 전화통화에서 “내 직장으로 오라”고 했다. 박 씨의 알려준 주소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언덕 위 동네였다. 역시 붉은색 외벽의 3층 짜리 건물 1층에 자리한 ’한마음직업재활원’, 이곳이 박 씨의 직장이다.

염전노예 피해자 박종현(가명) 씨가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셜록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동자 20여 명이 사무실 가운데 놓인 책상에 길게 마주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박종현 씨는 동료들이 볼까 봐 왼손으로 종이를 가린 채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관리자가 조정민(가명) 씨를 호명하며 종이에 적은 내용을 발표하게 했다.

“저는 동료 김OO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담배 냄새가 싫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대부분이 박 씨처럼 발달장애인인 작업장. 작업이 일찍 끝나면,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6일엔 서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발표했다. 상대가 좋아하는 걸 존중하고, 싫어하는 걸 하지 않으면서 배려하는 것, 이곳에서도 중요한 직장문화였다.

오후 5시가 노동자들은 각자의 출퇴근카드를 들고 퇴근 준비를 했다. 출퇴근카드를 정확히 찍고 일한 시간만큼 급여를 받는 건 상식이다. 세상에 배려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사람을 공짜로 부리는 건 그 섬에서나 있던 일이다.

“각자 장애 특성에 맞는 일을 맡기긴 하지만, 원칙은 다른 사업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전 9시 출근-오후 5시 퇴근을 정확히 지키도록 하고, 몸이 아프면 병가를  쓰게 합니다. 박종현 씨는 초창기에 종종 결근을 했었는데, 그런 날은 예외없이 연차를 쓰게 했습니다. 상담을 통해 출퇴근 원칙을 지키게 했구요.”

한 관리자의 말이다. 박 씨는 2020년 즈음부터 여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비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져 임금은 높지 않지만 그는 노동의 대가를 받는 직장인이다.

뭘 적을지 고민하는지 박종현 씨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셜록

이곳이 박 씨의 첫 직장은 아니다. 박 씨는 중학교를 마친 후 신발공장 등에서 일한 적 있다. 섬 탈출 이후 다른 작업장에서도 일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듯, 돈은 그에게도 중요하다. 1997년 집을 나갔을 때도 박종현 씨의 목적은 돈이었다. 그는 동생 학비라도 벌고 싶었다.

박 씨는 염전에서 죽어라 종일 일하고, 10년을 일해도 염전주인은 돈을 주지 않았다. 박종현 씨는 염전에서 두들겨 맞은 기억과 더불어 ‘임금체불’을 불쾌하게 여긴다.

“일을 했으면 돈을 줘야 하는데.. 안 주더라구요. 1년을 해도 안 주고, 10년을 해도 안 주고.. 달라고 하면 ‘나중에 준다’는 말만 하고….”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박 씨는 염전주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강한 처벌을 두려워한 염전주인은 부산까지 찾아와 합의를 요구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구치소에 수감된 염전주인은 이런 사과문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합니다. 속담처럼 피해자 가족 분들께 바라지는 않지만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열어 주시면… (중략) 다른 사람은 통장이 있어 (임금을) 지급했는데 피해자(박종현)은 통장이 없는 관계로 미루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용서.. (중략) 박종현 씨가 다쳤을 때 병원에 데려간 적 있는데, 모두가 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염전노예를 가족처럼 생각했다는 주장. 미운 놈에게 떡도 주고 싶지 않았다. 사과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내용이지만 박종현 씨는 합의를 해줬다. 합의를 거부하려 했지만, 염전주인들은 재판에서 줄줄이 선처를 받고 있었다. 실형을 선고 받은 염전주인이 거의 없을 정도다.

퇴근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박종현 씨(가명). ⓒ셜록

박종현 씨는 합의금 일부를 전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기부했다. 피해회복을 도와준 활동가에 대한 고마움, 자신과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 씨의 동생 박수현(1974년생. 가명)은 지난 11월 20일 인터뷰 때 당시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합의를 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오빠의 피와 땀이 담긴 돈이니까, 오빠가 결정하는 게 맞잖아요. 오빠에게 또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우리가 좀 도와주는 게 어떠냐고 설명을 했더니, 수긍을 하더라구요.”

염전노예 피해 합의금 일부를 인권단체에 일부 기부한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지난 16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박종현 씨에게 돈 기부에 대해 물었다.

“거기 박수인 선생님(전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활동가) 있잖아요. 그분한테 많이 고마웠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제 일도 도와주고….”

박수인 활동가 이야기만 나오면 박종현 씨의 얼굴은 밝아진다.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박 씨는 혼자 출퇴근을 한다. 부산서부터미널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31번 버스를 탄다. 이날 박 씨는 버스기사에게 “두 명이요”라고 말하며 내 버스요금까지 내줬다.

퇴근길. 박종현 씨(가명)는 버스를 이용해 출퇴근을 한다. ⓒ셜록

박 씨의 자립이 처음부터 가능했던 건 아니다. 우선,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박 씨의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그의 부모님은 많은 노력을 했다. “남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남들처럼 친구와 놀게 하고, 남들처럼 회사에 다닐 수 있도록” 늘 사람들 속에 박종현을 세웠다.

염전주인은 “박종현은 통장이 없기 때문에 임금을 못 줬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박 씨는 지금 은행통장을 갖고 있고, 체크카드도 사용한다. 자기 돈을 인출할 줄도 안다. 박 씨의 동생이 이 모든 걸 알려줬고, 박종현은 배워서 이용하는 중이다.

오빠의 사회성과 자립이 높아질수록 동생 수현 씨는 안도와 가슴 통증을 함께 느낀다.

“오빠가 염전으로 끌려가지 않고 계속 사회에서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게 자꾸 떠올라요. 지금보다 사회성이 훨씬 높았겠죠. 실종 전 오빠의 능력은 꾸준히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그게 17년간 중단된 거잖아요.”

박 씨의 자립을 가족만 도운 게 아니다. 부산시 사상구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한 장보람 사회복지사도 곁에서 힘을 보탰다.

“박종현 씨는 염전에서 탈출한 직후에는 자신감이 없었고, 겁도 많았어요. 저희는 우선 상담을 통해서 박종현 씨가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걸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차분히 설명했죠. 직접 선택하고 결정하는 등의 사회성을 키우는 게 중요하거든요.”

장보람 사회복지사가 19일 전화통화에서 한 말이다. 장 씨는 “우선 박종현 씨를 사회복지관으로 나오게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게 하고, 선택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알려줬다.

박 씨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복지사의 요청이 없어도 본인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주민센터와 복지관을 찾았다. 지금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 역시 그가 먼저 요청해서 구했다. 박종현 씨는 스스로의 선택을 늘려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종현 씨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월급으로 혼자 살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족과 공공기관의 조력, 일할 수 있는 직장이 그를 자립하게 만들었다.

박종현(오른쪽. 가명)씨와 박상규 기자. 퇴근 후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셜록

16일 퇴근해 함께 외식을 하고 집에 도착했을 땐 늦은 밤이었다. 타인의 집에 가면서 작은 선물 하나 들고 가는 걸 깜빡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나가서 과일 좀 사올게요. 귤이랑 딸기 뭐가 좋습니까?”

박 씨는 내 얼굴을 보며 슬쩍 웃었다.

“사람들 보니까.. 요즘 딸기를 많이 먹데요. 비싸서 문제지.(웃음)”

아파트 입구 상가에서 딸기와 귤을 구입했다. 집에 들고오자 박 씨는 딸기를 냉장고에 넣고, 귤만 방바닥에 펼쳤다. 우리는 함께 앉아 귤을 까먹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한참 뒤 내가 “딸기는 언제 먹을 거냐”고 물었다. 박 씨는 다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중에.. 나중에 제가 알아서 먹을 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그의 선택과 호불호, 살짝 약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박 씨는 TV 예능을 보며 깔깔 웃었다.

박 씨는 밤 11씨에 잠들어 오전 5시께 일어난다. 출근을 위해 집에서 나가는 시각은 오전 8시다. 17일 오전 그와 출근 동행을 했다. 늦은 밤과 이른 아침, 그는 무엇을 할까?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고 외롭죠.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할 텐데, 2년 전에 돌아가셔서.. 좀 심심합니다. 코로나 때는 직장이 문을 닫았는데, 그땐 종일 집에 있어야 하니까.. 많이 힘들었죠. 할일도 없고.”

그는 집 앞에서 다시 31번 버스를 탔다. 이번엔 그의 버스요금을 내가 냈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내려서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 길에서 한 중년 남성이 그에게 “서부터미널이 어디냐”고 길을 물었다. 대형 쇼핑센터에 탓에 길 건너 터미널은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 가셔서.. 저 건물 뒤편으로 가면 바로 터미널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박종현 씨(가명). 이날 작업장에선 콘센트 조립 일이 진행됐다. ⓒ셜록
다 조립한 콘센트 박스를 트럭에 옮기는 일도 박종현 씨(가명)의 업무였다. ⓒ셜록

박종현 씨는 다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직장으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한 그는 출입구에 설치된 체온계 앞에 서서 체온을 측정했다. 문 옆에 설치된 출퇴근카드도 직접 찍었다. 오늘의 업무는 전원코드 조립. 동료 노동자들은 책상에 앉아 손으로 조립하고, 박 씨는 완성품이 담긴 박스를 나르는 일을 맡았다.

박 씨는 자기가 할 일을 정확히 알았고, 그걸 묵묵히 했다. 누구의 말마따나 박종현 씨는 “오갈 데 없고, 육지에 있으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바보”가 아니다. 그저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약간 시간이 더 걸릴 뿐이다.

모든 인간이 어떤 분야에서 그렇듯이 말이다.

출근길. 직장으로 향하는 박종현 씨(가명). ⓒ셜록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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