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500원이 없어서… 노예로 살았고 ‘살인자’로 죽었다>에서 이어집니다.

섬 사람들이 숨긴 소금밭 살인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물에 떨어진 소금처럼 사람 하나 흔적 없이 지웠건만, 하필이면 “동네 바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 봤는데… 누굴 바보로 아요? 지들은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왜 사실대로 말을 못해. 말을 안 하면 벌어진 일이 없던 게 되나부지? 치….”

주민들에게 무시당한 그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다 녹아 사라진 줄 알았던 사건이 그렇게 물 위로 떠올랐다. 경찰, 검사가 몇 번을 물어도 그의 말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경찰 앞에서 윗옷을 올려 “배를 깠다”. 가로로 약 30cm 그어진 칼자국이 선명했다.

섬에서는 살인사건만 은폐된 게 아니다. 육지에서 헬기가 날아와 칼에 찔린 사람을 목포로 이송했던 사건. 목포시 한국병원이 “우린 치료할 수 없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광주 전남대병원까지 환자를 옮긴 ‘살인미수’ 사건마저 조작됐다.

여기엔 그 섬의 경찰도 개입돼 있다. 침묵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살인사건을 기억하고, 또 다른 살인미수 사건을 몸으로 입증하는, ‘20년 염전노예’ 이근만(1961년생, 가명)을 찾아야 했다.

살인미수 사건의 증거를 몸에 간직한, 사라진 염전노예를 찾아야 했다 ⓒ셜록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터졌을 때, 인권단체와 최정규 변호사 등이 이근만을 상담하고 도왔다. 그는 경찰 등 공권력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소송도 제기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근만의 근황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했던 박수인 활동가가 오래된 그의 연락처를 알려줬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약 2개월간 응답이 없던 그가 전화를 받은 때는 지난 11월 말.

“다 끝난 일을 왜 또 보요? 우리 집에 오겠다고? 주소는 광주 북구….”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뜻을 알기 어려울 만큼 발음이 어눌했다. 불러준 대로 받아쓴 주소는 지도에 없는 동네였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열 번, 스무 번을 해도 받지 않았다.

일단 KTX를 탔다. 무안동, 부암동, 주안동, 후안동, 두암동… 비슷한 발음의 동네를 검색했다. 그중 ‘주공아파트’, ‘9동’, ‘16층’이라는 세 힌트가 일치하는 동네는 하나, 광주 북구 두암동이었다.

임대아파트 단지는 꽤 컸다. 16층 아파트의 모든 집 초인종을 누를 순 없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얼굴이 붉고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 남성이 내 앞을 지나갔다. 다리가 불편한지 걸음이 느렸고, 살짝 절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근만 선생님 아니십니까?”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몸 전체를 돌렸다. 고개만 돌리기엔, 그의 몸이 이미 많은 굳은 듯했다.

“이근만은 맞는데… 선생님은 아녀… 선생님은 학교에 있지… 왜 길에서 선생님을 찾아?”

그에게 명함을 건네자 눈을 찡그리면서 한참을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읽어…. ‘K’는 알겠는데…. 박상규….”

이근만은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영어는 ‘SK’, ‘KT’ 정도는 읽을 줄 안다. 그는 “다 끝난 사건”이라며 인터뷰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염전노예, 살인, 살인미수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서 있기 힘든지 이근만은 보도블록에 주저앉았다.

“담배 있소? 없으면 하나 사다줘요. 에….”

그가 담배 이름을 불러줬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몇 번을 불러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갑자기 ‘버럭’ 했다.

“에쎄! 에쎄! 순한맛! 그런 것도 모르요?”

편의점으로 뛰어가 그가 말한 ‘에세 순한맛’을 샀다. 담배 한 갑을 들고 돌아오니, 그새 이근만은 사라졌다. 9동 16층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아파트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현관문 하나가 열렸다.

“들어와요. 추운데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라면과 쌀자루부터 눈에 띄었다 ⓒ셜록

10평이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자 출입구 쪽에 놓인 라면 10봉지와 쌀자루가 보였다. 주민센터에서 보낸 것들이다. 난방을 안 하는지 그의 집은 추웠다. 거실 겸 방으로 쓰는 곳엔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TV가 자리한 한쪽 벽 위엔 달력이, 그 위엔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십자가 옆으로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그림이 걸렸다. 이런 문구와 함께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기초생활수급자인 이근만은 매달 국가에서 주는 약 55만 원으로 홀로 산다. 아버지는 그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해 얼굴을 모른다. 엄마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TV 옆엔 엄마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떠올리고 싶지 않다니.

“그런 건 묻지 말고…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께. 나중에 기회 되면, 그때 이야기해줄게.”

담배를 받아든 그는 베란다로 가더니 바로 붙을 붙였다. 금연이 원칙이지만 “16층은 꼭대기라서 원래 괜찮다”고 우겼다. 그는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방에 걸려 있는 ‘예수님과 열두제자’ 그림 ⓒ셜록

2015년 즈음 이 작은 아파트로 오기 전, 그는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 걸리는 섬에서 ‘염전노예’로 살았다. 한두 해를 제외하고 1991년부터 박대성(가명)의 염전에서 ‘무보수 중노동’을 했다. 이근만은 박대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 마음에 안 들고 아주 지×염병을 하지. 아주 포악해. 평소엔 괜찮은데, 가끔씩 홱 돌아버리는 사람이여. 몽둥이 휘두르고 뺨 때리고….”

박대성은 알뜰하고, 꼼꼼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근만이 그의 염전에 도착했을 때 우성수(가명), 염태성(가명)이 먼저 노예노동을 하고 있었다. 박대성은 염전노예 3~4명을 “굴렸다”.

자기 염전에 일이 없으면 섬 이웃의 염전에 이근만 등을 ‘파견’ 보냈다. 일당은 적게는 5만 원, 많게는 15만 원이었지만 모두 박대성이 챙겼다. 염전노동이 끝나는 겨울철에도 이근만-우성수-염태성은 놀지 못했다. 섬에는 염전 말고도 논, 밭, 공사장이 많았다. 이근만 등은 농사일을 하며 다시 일당을 박대성에게 갖다 바쳤다.

앞선 기사에서 말한 대로, 박대성은 1994년 8월 우성수를 교사해 염태성을 죽였다.(관련기사 : 염전노예 살인의 총지휘자…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바로 옆에서 이근만이 이 모든 걸 지켜봤다. 인근 염전 노동자와 일부 주민도 이를 목격했다. 그럼에도 박대성은 처벌받지 않았다. 염태성은 혼자 바닷물에 빠져 죽은 ‘익사’로 처리됐다.

“그때 해주(바닷물을 가둬놓는 곳) 깊이가 고작 50cm였어.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런 물에 빠져 죽는다고? 그게 말이 돼?(웃음) 근데 목포에서 경찰이 그걸 믿더라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우린 박대성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

이근만-우성수만이 아니라 섬 주민들도 침묵했다. 염전노예가 도망을 가면 서로 잡아주는 이웃들은 살인 비밀도 잘 지켜줬다.

박대성은 2007년 즈음에 염전을 접었다. 그럼 염전노예를 고향에 보내줄 법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염전을 그만두더니 식당을 열더라고. 그 식당 지을 때 우리가 일했지. 공짜로.(웃음) 뭐 밥 주고 잠만 재워주면서. 식당 일? 바쁠 땐 우리가 도와주고 그랬지.”

담배를 받아든 그는 베란다로 가더니 바로 붙을 붙였다 ⓒ셜록

사람을 죽이고 처벌받지 않은 박대성은 거칠 게 없었다. 문제의 칼부림 사건은 2010년 3월 21일 벌어졌다. 그날 이근만은 식당 주방에서 불판 설거지를 했다. 박대성과 동거하던 여인은, 박대성과 닮았는지 이근만에게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개새×야 깨끗이 좀 닦아!”

이 소리를 듣고 박대성이 식당 안쪽에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방에서 요리할 때 쓰는 칼을 집더니 이근만의 배를 찔렀다. 이근만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장기의 일부가 배 밖으로 나올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박대성과 그의 동거인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랐다.

박대성은 자기 차에 이근만을 태워 섬 보건소로 향했다. 보건소장은 “여기선 치료할 수 없다, 이근만은 죽을 수도 있다”며 섬 파출소에 연락해 헬기를 요청했다. 상황 파악을 마친 경찰은 헬기를 불렀다.

이근만은 헬기를 타고 목포시 한국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 측은 “장기 일부도 손상이 됐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며 이근만을 구급차에 태워 광주에 있는 전남대병원으로 보냈다. 이근만은 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약 보름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갔음에도 경찰은 사건을 수사하지 않았다. 박대성과 동거인은 입을 맞췄다.

“이근만이 주방에서 설거지하다가 혼자 넘어졌습니다.”

넘어졌는데, 배에 칼에 찔렸다니. 이 믿기 어려운 말은 그대로 사실로 굳었다. 경찰은 그렇게 정리했다.

박대성은 앞서 말한 대로 꼼꼼한 인물이다. 그는 입원치료가 끝난 이근만을 다시 자기 식당으로 데려와 노예처럼 부렸다. 이웃집 염전으로 파견도 보냈다. 이근만은 아픈 배를 부여잡고 소금을 밀고, 날랐다. 급여는 모두 박대성이 챙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하루는 내가 직접 파출소로 찾아갔지. 내 배를 박대성이 찌른 것이라고 신고했는데, 경찰이 수사도 않더라고. 다 서로 친해.”

그의 몸에 영원히 남은, 살인미수 사건의 증거 ⓒ셜록

살인미수 사건은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진상이 밝혀졌다. 이때도 박대성은 경찰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근만의 배를 찌른 적 없습니다. 지가 혼자 넘어져 칼에 찔린 겁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살인미수로 재판에 넘겨져서 1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에선 5년으로 감형됐다. 이근만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선 2심 재판부가 사실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 사건 당시 경찰공무원은 즉시 범죄 발생 여부를 조사한 다음 이근만의 구호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략) 경찰공무원의 부작위로 이근만은 이후 약 4년간 박대성에 의해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피고 대한민국은 이근만에 대해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지급책임을 부담한다.

이근만은 국가배상금으로 3000만 원을 받았다. 박대성은 사건 발생 4년 만에 뒤늦게 구속됐다. 과거 염태성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살인사건은 공소시효 도과로 진실이 묻혔다.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염전노예 20년’이 그의 마음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셜록

박대성은 “치밀하고 끈진긴 놈”이었다. 2019년 9월, 형기를 마친 박대성은 이근만을 찾아왔다. 그는 “어디 좀 같이 가자”며 이근만을 차에 태웠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건강보험공단 지사.

박대성은 이근만에게 ‘진료비 변제각서’를 쓰게 했다. 2010년 이근만이 칼에 찔려 치료를 받을 당시, 건강보험공단 측이 부담한 돈은 약 500만 원. 박대성에게 이 돈에 대한 구상권이 청구되자, 그는 이근만을 찾아온 거다.

“그 치료비, 그거 네가 내라. 낼 수 있지?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래.”

칼에 찔렸던 이근만이 지금 이 돈을 내고 있다. 국가에게 받는 돈 약 55만 원 중 다달이 10만 원씩 자신이 변제하고 있다. 살인미수 범죄 피해를 입고 그 치료비를 자기가 부담하고 있다. 박대성이 시킨 일이다.

박대성은 치밀하고, 꼼꼼하고, 잔인한 놈이다.

염전노예 이근만(가명) 씨의 얼굴. 우리는 닮아 있었다. ⓒ셜록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https://alook.so/posts/q1tpJBd)와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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