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남자는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 걸리는 섬에 산다. 많은 사람이 “한 번 들어가면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추억하는 그 섬이다.

그 섬으로 가는 배는 목포여객터미널에서 하루 다섯 번 뜬다.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탔다. 배에서는 물고기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배 엔진을 돌리고 연소한 기름 냄새가 모든 바다냄새를 집어 삼켰다. 금방 머리가 아팠다.

‘누구 한 명 데리고 올 걸…. 괜히 혼자 왔네.’

완벽한 살인의 총지휘자를 섬에서 홀로 만나려니 두통이 뒷목을 타고 어깨까지 내려왔다. 그놈은 칼을 잘 쓰는 게 분명했다. 섬에서 자연산 회, 백숙을 파는 식당을 하니 말이다. 그는 사람 배 찌른 칼을 4년간 버리지도 않았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팔 때, 그 칼을 썼다.

육지를 떠난 배 2층 좌석에 앉아 눈을 붙였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기름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어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배는 예정 시간을 조금 넘겨 오후 1시께 섬에 닿았다. 지난 10월 21일의 일이다.

선착장에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으로 그 남자 박대성(가명)의 식당이자 집을 검색했다. 느리게 달려도 10분이면 닿을 거리에 화살표가 찍혔다. 그는 민박집도 운영하고 있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심장이 아까보다 빨리 뛰었다.

식당 주차장에 들어서자 오래돼 녹슨 하늘색 컨테이너 박스가 바로 보였다. 몇 해 전 형사들이 이 식당에 머물 때, 박대성은 5평 남짓한 저 컨테이너 박스에 사람을 숨겼다.

그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박대성이 20년 넘게 부려먹은 노예 두 명은 원래 저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고, 살았으니까.

식당 주차장에 설치된 낡은 컨테이너 박스. 염전노예 두 명은 저 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다. ⓒ셜록

“계십니까?”

떨고 있다는 걸 감추려 애써 목소리를 키우면서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닦은 지 1년은 넘은 듯한 지저분한 유리 현관문에는 패찰이 붙어 있었다.

“친절한 도민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딸랑딸랑’ 종이 울렸다. 손님 없는 어두운 식당에 종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낮게 깔렸다. 종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박대성 씨…. 아무도… 안 계십니까?”

종소리가 멈추고, 인기척도 없었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바다가 보였다. 박대성의 집, 식당, 민박동은 바다와 붙어 있다. 그의 식당을 떠나면서 고개를 돌려 어두운 현관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안 보이던 게 보였다. 현관문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건강과 평화를.”

이 문구와 정반대의 일이 박대성의 집과 일터에선 벌어졌다. 그의 집에 오래 체류한 사람은 총 세 명. 그중 한 명은 살해됐고, 한 명은 배에 칼을 찔렸으며, 다른 한 명은 두들겨 맞아 장애인이 됐다. 세상은 그들을 흔히 ‘염전노예’라고 불렀다.

박대성(가명)이 운영하는 식당 출입구에는 ‘친절한 도민의 집’이란 패찰이 붙어 있다. ⓒ셜록

박대성과 이들은 살인사건의 가해자-피해자-목격자로 얽혀 있다. 한 명이 살해됐으니, 이제 남은 건 두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고, 칼로 찌르고, ‘노예 20년’을 착취한 박대성은 어떻게 아무런 처벌 없이 무탈했을까?

진실은 사라진 두 사람, 우성수(가명)와 이근만(가명)이 안다. 이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차에 시동을 걸고 면소재지와 마을 쪽으로 향했다. 주민들은 우성수, 이근만은 물론이고 살해된 염태성(가명)을 모를 리 없다. 탈출이 어려울 뿐, 이 섬에서 소문과 소식은 밀물과 썰물처럼 우직하고 꾸준하게 퍼졌으니까.

2009년 4월 식당을 열기 전, 박대성은 섬에서 염전을 운영했다. 염전을 만들고, 바닷물을 채우고, 소금을 밀고 포대에 담는 고된 노동 대부분은 그의 노예 서너 명의 몫이었다.

이들을 노예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박대성은 이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았다. 기분 틀어지면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한 번 성질을 내면 아주 고약해요. 주로 연장으로 폭행을 하는데 쇠붙이, 쇠파이프, 바이스플라이어(펜치 종류) 등으로 때렸습니다. 평소 손으로는 잘 때리지 않고, 연장을 들어서 때렸습니다.”(2014년 4월 16일 이근만,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진술)

박대성은 이웃 염전에 일꾼이 필요하면 자기 노예를 보냈다. 그 일당까지 박대성이 챙겼다. 박대성에게 노예 세 명은 ‘현금인출기’와 다름없었다.

일을 시키고 일당은 박대성에게 송금한 이웃들, 살인사건의 피해자 염태성, 가해자 우성수, 그리고 목격자 이근만을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염전노예 사건이 크게 터진 2014년 봄 당시 경찰이 작성한 사건 기록 일부를 <셜록>은 입수했다. 이근만-우성수가 일했다는 염전의 주인 정○○, 김○○, 임○○ 등을 찾아갔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정○○의 집. “저기요, 말 좀 여쭙겠습니다”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은 이렇게 말했다.

“몰라. 우린 아무 것도 몰라요.”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모른다”는 말부터 했다. “우성수 씨 좀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우성수가 누구야?”라며 모른 척을 했다. 박대성이라는 이름과 우성수가 일했던 연도를 말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우린 돈 다 줬어요. 우린 아~무 잘못 없어. 박대성한테 가서 물어봐요.”
“그 살인사건 있잖습니까. 염태성 씨 죽은 사건이요….”

마당에서 종이박스를 정리하던 정○○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약 3~4초간 말이 없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으실까. 우린 아무 것도 모르는데…. 가세요. 우린 몰라요.”

김○○은 집에 없었다. 산 너머 임○○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연로해 건강이 안 좋다는 그 대신 아들이 나를 맞았다. 그 역시 “저기요, 물어볼 게 있는데요”라고 하자, 이 말부터 했다.

“몰라요. 우린 아무 것도 몰라.”

아들의 목소리에 그의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누구세요? 뭐 물어보실라고? 근데 우린 아무 것도 몰라요.”

사라진 염전노예들. 그들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는 한결같이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셜록

섬 주민이 다들 모른다고 하니, 우성수가 누군지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겠다.

우성수(1956년생)는 이 섬과 가까운 압해도에서 나고 자랐다. 발달장애는 없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그는 20대 초반 “돈 벌러 서울 간다”며 집을 나갔다. 일이 잘 안 풀렸는지 우성수는 28세 무렵 빈털터리로 목포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고향으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했던 시절, 그는 택시를 타고 여객터미널로 갔다. 택시요금은 3000원이 나왔는데, 그에게는 2500원뿐이었다.

“500원만 깎아주세요.”

잘못 걸렸다. 택시기사는 발달장애인이나 사람 잘 믿는 어리숙한 사람을 직업소개소로 팔아 넘기는 ‘휘빠리’이기도 했다. 우성수는 목포시내 한 여관에서 약 열흘간 감금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박대성의 염전으로 ‘팔려’ 왔다.

우성수는 박대성의 염전에서 일하고, 이웃집 염전에서 또 일했다. 박대성 친척이 운영하는 전북의 돼지농장에서도 일했다. 돈은 거의 받지 못했다. 동료 노예는 염태성, 이근만 순으로 증원됐다. 사건은 1994년 8월 18일 오전 8시 30분에 터졌다.

“기분 틀어지면 주변에 있는 온갖 도구로 사람을 패는” 박대성이 갑자기 염태성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며 트집을 잡았다. 그가 우성수에게 지시했다.

“야, 염태성 무릎 꿇려.”

겁에 질린 우성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박대성은 소금창고로 가더니 노끈을 가져왔다. 그걸로 염태성의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 그가 다시 우성수에게 지시했다.

“그 새× 대가리 해주에 처박어.”

해주는 바닷물을 가둬놓는 곳이다. 우성수는 머뭇거렸다.

“안 들려? 대가리 물에 처박으라고 새×야!”

우성수는 덜덜 떨며, 두 손이 결박된 염태성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잡고 해주의 바닷물에 머리를 처박았다. 염태성은 몸부림쳤다. 우성수는 자기 손의 힘을 풀었다. 박대성이 다시 “처박아!”라고 소리쳤다.

우성수는 다시 염태성의 얼굴을 바닷물에 담갔다. 잠시 뒤 염태성의 몸부림이 뚝 그쳤다. 심장도 더는 뛰지 않았다. 박대성은 놀라고, 우성수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놀랐다. 옆에서 이근만이 이 모든 걸 지켜봤다.

이근만(가명) 씨가 경찰에서 염태성 씨 살인사건에 대해 진술한 내용 ⓒ셜록

박대성이 교사하고 노예 우성수가 실행한 염태성 살인사건. 사람이 죽었으니 당연히 목포에서 경찰이 섬으로 들어와 수사했다. 그 전에 박대성이 살아남은 두 노예 우성수, 이근만을 집합시켰다.

“야, 염태성은 일하다 염전에 빠져 죽은 거야. 알았지? 그냥 지 혼자 익사한 거야. 경찰이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들은 시키는 대로만 해.”

이근만에 따르면, 염태성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본 섬 주민들은 또 있다.

“임○○ 씨 부인은 (살인현장) 옆에 본인 염전이 있었기 때문에 봤을 것이고, 또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은 그때 아침에 지나가다 봤습니다. ○○마을에 살았던 아주머니도 지나가면서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염전 노동자)도 조금 떨어진 염전에서 일을 하다가 봤을 것입니다.”(2014년 3월 21일 이근만,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박대성은 “못하는 게 없는 독한 놈“이었다. 정말로 그의 말대로 염태성 사건은 살인이 아닌, 지 혼자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은 익사 사건으로 처리됐다. 이근만은 경찰에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섬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박대성이 인부를 죽인 것으로 소문났거든요. 우성수한테 물어보면 모든 진실이 나올 것입니다.”(2014년 3월 21일 이근만,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 진술)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웠을까?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터졌을 때, 박대성은 우성수를 저 멀리 전북의 한 돼지농장으로 숨겼다. 경찰이 그해 4월 우성수를 구출했을 때, 그의 옷과 신발은 오물로 더러웠다. 손톱, 머리, 얼굴, 손 등 신체 역시 비슷했다.

’20년 염전노예’가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갈 당신, 지금 어디 있습니까 ⓒ셜록

박대성의 지시에 따라 살인에 연루된 죄책감 때문인지, ‘20년 염전노예’가 정신에 큰 상처를 남겼는지, 우성수는 점심부터 저녁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찰의 요청으로 인권단체 관계자가 우성수를 면담했다. 인권단체 관계자는 면담 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오른팔의 하박 부분 치료가 매우 절심함. 과거 폭행을 당하여 팔이 골절되었고, 뼈가 부러진 상태로 유착된 상태임. 오른팔로 물건을 들거나, 쥐고, 누르는 것을 힘들어 함.”

“염전주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큼. 박대성이라는 인물을 통해 본인이 본래 갖고 있던 자아는 말소, 증발되었다고 보여짐.”

500원이 바꿔놓은 기구한 삶. 섬 사람들은 같은 행정구역 주민, 쉽게 말해 고향 사람을 수십 년 노예로 부린 셈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반복한다.

“우린 잘 몰라.”

그날의 구체적인 진실을 아는 우성수-이근만이 이 섬에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어느덧 섬을 떠나야 할 시간, 차를 선착장으로 몰았다. 길가에서 박대성의 식당 간판이 보였다. 다시 한 번 들러볼까, 아니면 그냥 갈까….

차 핸들을 식당 쪽으로 틀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식당으로 걸어가며 “계십니까?”라고 다시 크게 외쳤다. 나보다 머리가 덜 벗겨진 60대 남자가 청소를 하는지 휴대용버너 부탄가스 등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 구릿빛 피부의 그는 키 170cm 정도로 몸이 다부져 보였다. 박대성이다.

저쪽 바닷가 쪽에선 쓰레기가 타고 있었다. 이미 섬 주민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그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뭐가 궁금해서 왔습니까?”

☞ 2화 <500원이 없어서… 노예로 살았고 ‘살인자’로 죽었다>로 이어집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얼룩소>(https://alook.so/posts/KmtBzVj)와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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