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이라는 단어는 김진국(80세)의 자랑이었다. 마당에 차를 대고,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우리 집안이 군대하고는 인연이 굉장히 깊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형제가 칠형제인데 넷째 하나 빼고는 전부 다 군에 갔다 왔습니다. 하나가 군에 안 간 건 여섯 살 때 뇌염을 앓아서 장애가 있어서 못 갔습니다. 고 한 명 빼놓고는 여섯 형제가 다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친 사람들입니다. 참 우리 가족만큼 이런 집안도 드물 거야.

형제들만이 아니다. 김진국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그 유명한 군함도에 수용됐던 강제동원 피해자다. 죽을 고생을 하고,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절 일본에, 아들들은 해방된 뒤 대한민국에 청춘을 바쳤다. 강제동원 노동자와 군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이들에게 헌신을 요구한 대상은 모두 같은 ‘국가’였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김진국의 집. 고향집 터에 새로 빨간 벽돌집을 지어올렸다. 거실에서 김진국과 마주 앉았다. 그의 머리 뒤편으로, 벽에 걸린 ‘훈장증’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국훈장 광복장. 그가 35년간 군무원으로 일하고, 2000년 퇴직하면서 받은 것이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청와대’ 시계 역시 그때 받은 것. 김진국의 자부심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군이란 단어에는 그의 일생과 형제들의 헌신이 모두 압축돼 있었다.

김진국과의 인터뷰는 지난 3월 14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이뤄졌다. 거실 벽에 걸린 ‘훈장증’. ⓒ셜록

“얘는 너무 온순했습니다. 너무 온순해서 친구들하고 싸우는 일도 별로 없었고, 형제가 일곱이나 있지만 얘는 다른 형제들하고 다투는 일도 없었어요.”

여섯째인 김진현(1959년생)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그 ‘온순함’이 떠오른다. 김진국은 칠형제 중 맏이. 김진현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큰형 김진국은 마치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김진국의 부인 역시 형수라기보다는 어머니에 가까운 존재였다.

“시집왔을 때 막내(일곱째)가 대여섯 살밖에 안 됐고, 시동생들이 어렸어요. 옛날엔 작은 기와집에 있었거든요. 방 두 개 중에 어른들(시부모) 한 방 쓰시면 방이 하나밖에 없어요. 어린 시동생들하고 우리 방에 같이 자고 그랬죠. (나중에 분가해서도) 우리 집에서 학교 댕기고 직장 댕기고, 내가 도시락 싸주고 빨래 해주고 완전히 내가 키웠지.”(김진국의 부인)

김진현은 고향인 기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시내에서 분가해 지내던 큰형 김진국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김진현은 2년 정도 공장에서 일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늘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놀아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다 스물한 살이 되던 1979년. 군대를 빨리 갔다 와서 제대로 돈을 벌어야겠다던 김진현은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송아지 한 마리 사는 게 그의 꿈이었다.

“집사람도 고생 많이 했지만, 지금은 우리 애들도 다 크고, 밥 먹고 사는 건 되니까 괜찮은데, 억울하게 간 동생 생각하면은 참… 나는 너무… 너무너무 애통해요. 너무 애통해.

“일곱 형제 중에서도 제일 착했다”는 김진현에게, 송아지 한 마리라는 소박한 꿈도 허락되지 않았다. 1980년 1월 3일 새벽, 그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입대한 지 겨우 66일 만이었다.

처음 연락을 받은 사람은 김진국이었다. 군무원으로 일하던 그의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죽었다니.

“억울하게 간 동생 생각하면은 참… 나는 너무… 너무너무 애통해요.” 김진현의 형 김진국. ⓒ셜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논산훈련소에서 헌병 대위로 있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선뜻 동행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김진국은 어머니를 모시고 부대로 출발했다. 부산에서 강원도 명주군(1995년 강릉시에 통합)까지, 꼬박 하루를 길 위에서 보내고 밤늦게 도착했다.

“사고 난 장소를 보여줬어요. 뭐 벌써 청소를 다 해놨죠. 외관상 보기는 깨끗하더라고. 동생 시신도 염을 다 해놨어요. 거기(부대 측)서는 총기 오발사고다,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초소 위병근무 중 총기 오발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 머리에 총구를 향한 채 (총을) 다루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당시 부대에 따졌지만 졸다가 방아쇠에 손이 놓여져서 그런 것 같다는 무책임한 답변밖에 (…) 아무리 따지고 악을 써봤자 더 이상 아무런 답변이나 조치는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고 장례 잘 치러주라는 말만 하더군요.(김진국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정서 2020. 9. 10.)

현직 헌병 대위였던 고종사촌은 김진현이 지내던 내무반에 들어가봤다. 김진현의 관물대를 열었다. 그가 남긴 물건 중에 죽음의 이유를 밝힐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수첩도, 편지도, 메모지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헌병 대위라고 해도, 다른 부대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개입할 수는 없었다. 고종사촌은 이틀 밤을 지내고 먼저 돌아왔다.

김진국은 남아서, 동생의 시신이 화장장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21년간 ‘현아’라고 부르던 한 사람을, 이제는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동생을, 돌아오는 길 이름 모를 산에 뿌렸다. 1980년 1월 7일.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시간이 나흘간 흘러 있었다.

“산에 뿌려주고 왔습니다. 나무 밑에…. 같이 피를 나눈 형제인데 건강한 놈이 군에 가서 그런 사고를 당하고, 장례도 못 치르고 산에 뿌리고 왔으니까 그 마음은,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형인 내 마음하고, 부모 마음하고 또 다릅니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고향집에 돌아와 보니까) 아버님은 아무것도 드시지도 못하고 완전히 폐인이 돼 계시더라고. 얼마나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때 그 마음은 말을 다 못합니다.”

“산에 뿌려주고 왔습니다. 나무 밑에…. 그 마음은,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셜록

한동안 질문 없이 김진국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곳에 시선을 멈춰두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옆에 있던 아들 김정연이 대신 입을 열었다. 김진현이 큰형 김진국의 집에서 공장에 다니던 시절, 퇴근 후 놀아주던 꼬맹이 조카가 바로 김정연이다.

“삼촌 돌아가셨을 때 제가 아홉 살이었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되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온 집안이 울음바다죠. 그 분위기가 적어도 1년은 간 것 같아요.”(김정연)

가족들은 영혼결혼식도 치렀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자손 없이 돌아가신 조상이나, 제삿날을 모르는 조상에게 9월 9일 중양절에 제사를 올리는 풍습 때문이다.

화목했던 집안에는 말이 사라졌다. 아무리 ‘왜’라고 물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 산 사람은 자신을 원망했다.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깊은 곳으로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모두 말을 아꼈다. 가족들은 그 아슬아슬한 시절을 침묵으로 힘겹게 건너왔다.

“어제도 또 잠이 안 왔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오신다 했는데, 틀림없이 과거에 어떻게 됐는가 물어보실 건데…. 참…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다시 내 입으로 꺼내려고 하니까 내 자신이… 마음이 어딘가 죄책감이 들어서 잠이 안 왔습니다.”

부모님만은 이따금 죽은 아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참아도, 숨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그리움이 목구멍을 넘어 나왔다. 살아 있으면 지금 몇 살일 텐데, 결혼을 했으면 애들도 있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안 잊어버리면 마음에 병만 됩니다, 영혼결혼식도 시켜줬으니까 저승에서라도 잘 살 겁니다”라고 부모님을 위로하는 것은 장남 김진국의 몫이었다.

김진국이 손목에 차고 있는 ‘청와대’ 시계. ‘군’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셜록

가족들은 기억하기에도 잊어버리기에도 너무 어려웠던 그 이름을, 군은 몇 장의 서류만으로 쉽게 지워버렸다. 기록에 남아 있는 김진현의 사인은 “두부관통총상”. 그리고 “사망자(김진현)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 고된 작업 등으로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자 군복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결심”(<사망확인조서> 1980. 1. 3.)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자살’이라니. 그날 김진국과 가족들은 분명 총기 오발사고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이미 서류에 자살이라고 적어두고서, 가족들에는 사고사라고 말한 거였다. 김진현의 병적기록부에도 사인은 ‘자살’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나라 탓을 해야 되나, 누구 탓을 해야 되나, (그동안) 하소연할 데가 없는 거야. 형이 돼가지고 동생 뒷바라지도 못해주고 명예회복도 못해주고, 내 나이 지금 80인데, 내 생이 벌써 다 됐는데, 이렇게 가고 말 건가…. 내 마음 이런 복잡한 걸 말을 다 못합니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김진국이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그날 텅 비어 있던 관물대 안에, 김진현은 원래 무엇을 남겨뒀던 걸까. 진실을 찾아가는 길은 2020년 여름에 시작됐다. 군무원 출신인 김진국은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신문인 국방일보를 여전히 구독하고 있었다. 우연히 본 기사 하나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2018년에 생겼죠? 그때 알았더라면 일찍 좀 진정을 했을 건데, 못 보고 있다가 2020년 7월인가 국방일보에서 기사를 봤어요. 그걸 보고 내가 (동생 사건을) 진정 서류를 접수했습니다. (이제는 진실을 밝힐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20년 12월 조사를 시작했다. 사건 이후 40년 만에 시작된 조사. 1년 반의 시간이 더 흐르고, 800쪽이 넘는 조사 기록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진실’이 고개를 들었다.

☞ 하편 <증인도 증언도 ‘가짜’… 42년 만에 밝힌 죽음의 진실>로 이어집니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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