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편 <이등병의 흔적 없는 죽음… 부대는 유족까지 속였다>에서 이어집니다.

1980년 당시 부대의 지휘관들은 김진현의 가족들만 속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증인을 조작해 사건 보고서까지 거짓으로 꾸며냈다.

당시 보고된 ‘최초 목격자’는 김진현과 같은 초소 근무조였던 병장 송정호(가명).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내무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사건은 김진현 혼자 초소에서 근무하던 도중에 일어났고, 숨진 그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다음 번 근무자인 일병 함의형(가명)이었다.

저는 당시 망인(김진현)의 시신을 발견한 최초 목격자가 틀림없으나 당시 헌병대 수사관에게 진술서, 진술조서, 구두 조사를 받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당시 송정호(가명) 병장이 망인과 같은 위병소 근무자였으나 당시 망인과 함께 근무를 나가지 않았고, 제가 근무교대를 하면서 최초로 망인의 사망사실을 목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 일병 함의형(가명)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당시 부대에는 고참들이 근무를 서지 않고 후임병들에게만 연달아 근무를 서게 하는 ‘말뚝근무’가 관행처럼 행해졌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최초 목격자를 함의형에서 송정호로 바꿔치기 했다. 사실대로 보고했다가는 송정호가 근무를 서지 않은 것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은 병장 송정호에게 ‘김진현과 같은 시간대의 근무자니까 근무를 나가서 총을 위병소 바깥에 걸어놓고 소변을 본 것으로 하라’고 거짓증언을 지시했다. 사건 당시 헌병 수사관들은 그 말에 모두 속아 넘어갔다. 지휘관들은 증인을 조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증거까지 인멸했다. 그들은 죽은 김진현의 관물대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당시 망인(김진현)이 집에 안부편지를 보내려고 써놓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호남(가명) 중사와 정○ 준위가 사고현장을 조작해놓고 망인의 수첩, 편지 등은 임의로 소각하였다고 기억한다. (…) 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통신선을 임의로 절단해놓고 상급부대와 헌병대에는 ‘통신선이 절단되어 보고가 늦었다’고 변명을 하려고 하였고, 그 이전에 (…) 말을 맞추었다. 이건 100% 맞는 이야기다. – 병장 조○○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김진현의 죽음으로 부대 내 부조리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지휘관들은 증인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김진현이 사망한 시각은 오전 2시 40분경. 하지만 최초 보고는 약 세 시간 뒤인 오전 5시 30분경에 이뤄졌다. 그들은 치밀하고 기민했다. 사건을 조작하느라 보고가 늦어진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통신선까지 일부러 절단하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등병 김진현이 남긴 마지막 편지는 사라졌다. 김진현 역시 사라졌다. 그는 그 편지에 어떤 말을 남겼을까. ⓒpixabay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군사망사고규명위)는 김진현의 사망 원인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현장 상황이나 시신의 상태, 당시 부대원들의 진술 등에서 타살이나 사고사의 개연성을 찾지 못했다.

망인(김진현)이 실탄을 장전하여 근무를 서야 했던 정황과 방아쇠 안전장치가 임의로 작동하여 총구가 망인의 좌측 귀 상부에서 발사되었을 상황을 상정하여나 하나 그러한 사고현장의 상황이나 망인의 두부관통총창상의 상태 등은 발견되지 않아 망인의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은 어렵다고 추정됨.(군사망사고규명위 조사결과보고서 중)

그럼 김진현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무엇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그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전입한 것은 1979년 12월 15일. 그가 소속된 부대는 탄약을 취급하는 부대였다. 마침 그 시기에 105mm 포탄 등 탄약류 58량이 강릉역에 도착해, 전 병력이 동원된 고된 주야간 작업이 12월 22일부터 31일까지 열흘간 계속됐다.

고된 노동을 하는 와중에 가혹행위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선임병들은 구타, 얼차려, 욕설, 괴롭힘 등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특히 병장급 선임병들은 야간 위병소 근무에 나가지 않고, 후임병들에게만 말뚝근무를 강요했다. 사망 당일, 신병인 김진현이 혼자서 위병소 근무를 서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기합, 욕설, 갈굼 등 가혹행위가 자주 있었다. (…) 후임병들을 집합시켜 놓고 ‘개×끼, ×새끼, 씨×놈’ 등 심한 욕설을 하면서 주먹이나 군홧발, 곡괭이 자루 등으로 구타를 가하거나 괴롭힘을 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당시 망인(김진현) 등에게 군기를 잡기 위해 병장들이 ‘군기를 잡아라’라고 하면 밑에 군번들이 알아서 군기를 잡았다. – 병장 송정호(가명) 진술

군사망사고규명위는 대구대학교 심리학과 박중규 교수에게 김진현에 대한 심리 부검을 의뢰했다. 그 결과 “망인(김진현)은 체력적으로, 또한 정신적․심리적으로 심한 압박감과 큰 부담감을 일거에 느꼈을 것”이라며, “강한 급성스트레스는 무력감과 자기조절(자기통제)감의 상실, 극도의 두려움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견이 돌아왔다.

죽음의 원인에는 과도한 업무와 가혹행위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는 이를 관리하거나 개선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망 이후에 은폐와 조작으로 진실을 감췄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차호남(가명) 중사가 징계위에 회부됐으나 처벌 없이 사건은 묻혔다.

군사망사고규명위는 2022년 6월 이와 같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국방부에 김진현의 사망 구분을 ‘순직’으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김진현이 죽은 지 42년 5개월이 지난 뒤였다.

김진국의 손. 그는 군사망사고규명위에서 온 모든 서류를 날짜까지 기록하며 모아두고 있었다. ⓒ셜록

“이걸(조사결과 보고서를) 딱 받고 나니까, 제일 먼저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 살아계실 때 (진실을) 알았더라면 원통함이 좀 풀렸을 텐데. 내가 이걸 보고 다음 날 아침에 어디 밖에를 못 나가겠데요. 눈이 부어서. 눈물이 나서 도저히 밤에 잠을 못 이뤘어요.

(동생이)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고달픈 생활을 했는데, 형이 돼서 면회 한번 못 가봤다는 게 죄책감이 드는 거라. 마음만 있었으면 어떻게든 갔다 올 수 있었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보고 왔으면 마음이 좀 덜 아플 텐데…. 엊그제도, 세 번째 읽으면서 또 울었어요.”

2013년에 어머니가 먼저, 2015년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10년만 일찍 진실을 알게 됐다면, 부모님 가시는 길이 조금은 편하셨을까. 형 김진국도 그사이 팔십 노인이 됐다.

그래도 고마웠다. 40년 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수소문하며 전국을 찾아다닌 조사관의 수고에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했다. 죽은 동생도 이제 억울함을 조금 내려놓지 않았을까.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슴에 사무치게. 복잡한 마음은 또 김진국을 잠 못 들게 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유품이라도 남겨둘 걸. 그걸 보면 또 생각이 나니까, 또 마음이 아프니까, 가족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동생의 물건과 사진을 모두 태웠다. 그렇게 마음에서도 떠나보내려 했다. 이제 동생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오직 사진 한 장뿐.

“2020년에 (군사망사고규명위에) 진정서 넣을 때, 서류하고 같이 보내려고 동생 사진을 찾아봤어요. 집 안 온 데 다 찾아도 없었는데, 이게 딱 하나 있더라고. 자기(김진현) 혼자 찍은 사진이 아니고 우리 애하고 찍은 사진이 하나 딱 있더라고.”(김진국)

“삼촌(김진현)이 저를 데리고 놀러를 많이 다녔어요. 해운대도 갔고, 용두산공원도 간 기억이 있어요. (이 사진은) 내 사진이라고 남겨놓은 거예요. 삼촌 사진이 아니라.”(김정연)

김진현의 생전 모습이 담겨 있는 유일한 사진. 조카의 사진이라 버리지 않고 둔 것이다. ⓒ셜록

국방부는 군사망사고규명위의 조사 결과에 따라, 김진현을 ‘일반사망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그를, 군인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숨진 사람으로 기억하게 됐다.

지난 3월 9일 김진국에게 배달된 ‘순직확인서’. 봉투 안에는 ‘군인 사망보상금 청구 안내서’와 ‘유가족 보훈 안내서’가 같이 들어 있었다. 김진국은 이제 순직이 확인됐으니 뒤따르는 문제들은 국방부가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족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이런저런 서류들을 만들어서 관청을 찾아다니는 일이 또 시작됐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김진국 가족에게 지급될 사망보상금은 ‘0원’이었다. 현재 사망보상금 지급 대상 유족의 범위가 배우자, 자녀, 부모, 손자녀 및 조부모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직계친족이 없는 군인이 사망할 경우 그 누구도 사망보상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것.

과거에는 순직 군인의 ‘형제자매’도 사망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베트남전쟁 파병 후인 1974년부터 연금을 받는 유족의 범위에서 형제자매가 빠졌다.

20대 초반에 군 복무 중 사망했다면 배우자나 자녀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또 세월이 오래 지나 순직이 인정됐다면 그 사이 부모 또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1974년 이후 순직 ▲배우자·자녀 없음 ▲부모 사망, 김진현은 이 세 가지에 모두 해당된다.

최초 사망시 일반사망으로 분류되었다가 추후 전사·순직 등으로 재분류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시차가 발생하였고, 전사·순직으로 재분류되더라도 거의 유일한 수급권자인 직계존속이 고령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상당수를 차지한다. (…) 순직 군인의 형제자매를 유족의 범위에 포함함으로써 수급권자를 확대하여, (…) 전사·순직자의 유족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순직군인 형제자매 보상에 관한 연구> 책임연구원 하주희, 2021. 2. 24.)

이런 규정 때문에 보상의 길이 막힌 사례는 김진현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는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군인 재해보상법 일부개정법률안’(설훈 국회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됐다. 해당 법안은 지난 2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상정된 상태다.

기자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김진국의 뒷모습 ⓒ셜록

순직이 확인되면 군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가 했더니, 그게 아닌 거라. 해당도 안 되는데 (사망보상금 청구 안내서는) 왜 보냈을까? 속만 더 상하게…. 동생을 잃고 43년 동안 슬픔 속에 이렇게 있었는데… 좀 안타깝습니다. 마음이 안 좋네요. 참… 너무 무심합니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슬픔과 고통 속에 보낸 유족들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도 않는다.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있는 보상은, 진실을 밝힌 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기대만큼 큰 허탈함만 되돌아왔다.

1980년 사건 당시 군의 ‘중요사건보고’에는 “유족 여비 3만 원 전달”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진국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3만 원이 지금까지 국가가 준 보상의 전부다.

43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김진현을 죽음까지 몰아붙이고, 증인을 바꿔치기하고, 편지와 수첩을 불태우고, 가족들에게 거짓말까지 했던 이들. 그리고 모든 군인이 건강하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던 군과 국가, 어느 누구도.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라 자신만을 책망하며 보낸 세월. 아무도 김진국에게, 그 가족들에게, 죽은 김진현에게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이 밝혀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직접 찾아오진 않더라도 최소한 문서상이라도, 이런 일들로 인해서 귀댁의 가족이 겪었을 슬픔에 대해 사과 말씀 드립니다, 최소한 그 정도라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김정연)

‘군’이라는 단어는 김진국의 자랑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길. 김진국이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여전히 텅 빈 마음은 억지 미소로도 감출 수가 없다. 그가 손을 흔든다. 마른 손목에 채워진 ‘청와대’ 시계가 저무는 저녁 해를 받아 반짝거렸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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